# 188
황도의 이면
지옥도가 발현되기 1시간 전.
셀렌느 후작은 지하수로에 있었다.
황도 지하에 자리한 커다란 뒷골목. 비오 교황의 행적은 이곳에서 끊겨 있었다.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지하수로 중앙에 있는 루미너스 일루젼을 보며 셀렌느 후작은 투덜거렸다. 분명 지하수로에 들어온 흔적은 남아 있다. 교황이 머무르고 지냈던 장소까지 전부 확인했다.
어디로 도망친 기색도, 달아난 기척도 없다.
그는 분명 이곳에 있었고, 이 수로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마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수색은 틀리지 않았을 터다. 그래, 그럴 터인데.
지하수로의 마을 어디에서도 교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
왜 이렇게 찾아오지 못하냐고 안달이 났을 성녀를 떠올리자,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교황의 탐색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고생하는 건 셀렌느 후작 본인이다.
그 여자는 모르겠지. 직접 현장에서 느끼는 고생을 말이다.
“땅이 꺼지겠군. 뭘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 거냐?”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흔적이 끊겨버려서 추적이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
자연스레 대답하던 셀렌느 후작은 말꼬리를 흐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카라스 크로만.
마탑의 대마법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스승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셀렌느.”
늠름한 스승님의 모습에 셀렌느 후작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드디어 그 방구석에서 벗어나시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네 놈은 정말인지 안 할 말, 할 말 다 꺼내는구나. 그딴 식으로 말하는 버릇을 못 고치니까 타인의 눈총을 받는 거다.”
“신경 안 씁니다. 귀찮게 뭘 그런 걸 일일이 확인합니까.”
“멍청한 놈. 그게 너 하나의 문제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공인이 되었으면 당연히 따라오는 책임이 있기 마련이다. 아직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이해했으면 제가 마탑을 나가지도 않았겠죠.”
“그것참 자랑이구나.”
셀렌느가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유.
크로만 가 내에서도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는 남자다. 차라리 재능이라도 보잘것없었으면 나았으련만.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던 그 꼬맹이가 참 많이도 컸군.”
“잔소리하러 오신 거면 그만 가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래 보여도 일하는 중입니다.”
“누구는 놀러 온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카라스는 셀렌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웅장한 자태를 보이는 루미너스 일루젼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 크게도 벌려줬군, 하고 카라스는 투덜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아래에서 수작을 부리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들을 이용할 만한 인물은 아닌데.”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추적하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비오 교황. 다른 건 몰라도 여신에 대한 그의 신앙심은 진짜였다.
여신에게 실망해 신앙에서 눈을 돌리게 된 그는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여신이 직접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자신이 그들을 인도한다. 그것이 더러움을 뒤집어쓰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암계를 주름 잡은 검은 손.
그 정체가 비오 교황이라는 것을 크로만 가의 수뇌부는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도 그를 내버려 둔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는 편이 더 이득이 많기 때문이다. 암계를 감시하에 둘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크로만 가는 이를 약점 삼아 루미에르 교와의 거래에서 더 유리한 측면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득은 금액으로 환산하기 힘든 값어치가 있었다.
그 거래의 결과는 보다시피다.
암계를 조작하는 것은 교황이지만, 표면상으로 흘러나오는 소문은 크로만 가의 이름뿐이다.
그러니 교황이 섣부른 움직임을 취할 이유가 없었다.
암계의 존재는 필요악이다. 지운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손에 쥐고 있는 쪽이 편하다. 비오 교황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혼란과는 거리가 있었다.
겉으로 표방하지 않을 뿐이지.
암계를 쥔 그가 걸어온 길은 성인의 그것과 같았다. 블러드 트리의 치안을 바로 잡고, 굶주린 이들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주고, 일거리를 만들었다. 블러드 트리의 주민은 루미에르 교를 싫어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킨 것은 교황이었다.
그런 그가 왜 루미너스 일루젼이라는 물건에 손을 대고, 이런 위험을 감수했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눈앞의 물건을 부정할 수도 없다.
이 일련의 사태의 뒤에 있는 것은 비오 교황이 확실했다.
“또 감시하는 중이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로였다. 모란다와 갤메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산책할 생각으로 거리에 나온 것인지, 그녀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명령이 없으면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니까. 애초에 축제까지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좋게좋게 협조해. 감옥에 처박아놓아야 하는 걸 이렇게 풀어줬으니 말이야.”
“말은 바로 해야지. 우리를 풀어놓으라고 한 건 위에서 지시한 거겠지. 당신이야말로 좋게 생각해. 우리가 고분고분 이곳에 처박힌 건 따로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야.”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일어날 수 있다. 하로의 말은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래. 정말 무섭네.”
“…….”
셀렌느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그녀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빈말인지도 모르고 경계했었지만, 요 며칠 사이 하로라는 소녀의 사람됨을 파악한 셀렌느는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노친네는 누구야?”
당돌한 그녀의 말에 대마법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말조심해라, 꼬맹이.”
예상외다. 하로는 카라스의 얼굴을 모르는 것 같다.
“스승님이다.”
“아, 그래? 당신의 스승님이라면 아주 귀한 귀족님이겠네.”
“뭐, 그렇지.”
굳이 스승님의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다.
“이곳의 간부 중 한 명입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기는 전부 압수했고, 조사는 끝났습니다. 최소한 이곳에서 사고를 벌일 만큼 생각 없는 친구들은 아닙니다.”
블러드 트리 밑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을 아끼는 소녀다.
그것은 먼발치에서 성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포함한 세 명의 간부는 이 마을을 진정으로 아끼고 있었다. 200가구가 채 못 되는 주민들이 위험에 빠질 일은 하지 않으리라.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모습이다.
이제는 지극히 당연한 풍경 중 하나다.
세 간부가 거리로 나왔기 때문일까. 거리 위쪽에서 미카엘라 단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성녀의 명령으로 마을을 감시하고 있는 신전기사단이다. 셀렌느와는 별개로 교황의 자취를 추격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정말로 교황은 이곳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넌지시 바라보던 하로는 곧 흥미를 잃었는지 발을 돌렸다.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거리 중앙의 루미너스 일루젼이다. 거목을 살펴볼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던 소녀는 갑자기 발을 멈췄다.
“왜 루미너스 일루젼이….”
작은 이질감.
열매 하나 보이지 않던 루미너스 일루젼이 검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스승님.”
“무언가 있군.”
주변을 돌아다니던 사람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하나둘 거목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 전체를 먹어치우는 어둠이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주변을 침식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대장님이 그럴 리가….”
망연히 중얼거리던 하로는 자신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운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다. 거리에 나와 있던 모란다와 갤메크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몸에서도 하로와 마찬가지로 검은빛이 피어나고 있었다.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퍼져가는 어둠은 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셀렌느!”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루미너스 일루젼의 열매가 마나가 아닌, 마기로 피어났다.
공정된 술식이 세상을 침식한다. 불과 얼음이 루미너스 일루젼을 향해 떨어졌다. 반대쪽에서 신성한 빛이 달렸다. 미카엘라 단장이 쓴 수다. 황도 내에서도 실력자로 꼽히는 세 사람의 힘이다. 분명 어떤 효과가 있겠지.
그러나 루미너스 일루젼에서 떨어지는 마기는 그 힘을 상쇄했다.
“어째서! 왜 우리를…!”
단말마와 같은 하로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어두운 빛이 지하수로를 달렸다.
마을 전체로 퍼져나가는 마기가 호흡을 옭아맸다. 머릿속이 뒤집히는 착각. 예상치 못한 통증에 셀렌느의 몸이 휘청거렸다. 무릎과 지면이 닿는다. 자아낸 마나로 서둘러 실드를 형성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성기사들은 꿋꿋이 어깨를 펴고 있었다.
몸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으로 보았을 때, 보유한 신성력으로 마기에 대항하고 있는 것 같다. 반면, 마기에 짓눌린 민간인들은 상황이 다르다. 지면에 쓰러진 건 물론이고, 의식까지 잃었다.
“이게 대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마기다.
꺼림칙한 기운이 형체를 갖추고 있다. 마기는 지하수로의 천장을 오가며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싸구려 목재가 썩어들어가고, 수로가 탁한 색으로 물든다. 환경을 더럽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쓰러진 사람들의 몸이 들썩거렸다. 한두 명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단체로 일어난 발작은 무언가 앓고 있는 지병이 단번에 터져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처음 사람에게서 나타난 변화를 눈치챈 것은 카라스였다.
피부의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마물의 그것과도 같은 검은색이 흘러나오며, 피부에 비늘과도 같은 윤택한 빛이 나타났다. 인간에게는 나타날 수 없는 빛깔이다. 마물의 갑피와도 같은 비늘은 이내 사람의 몸을 뒤덮었다.
사람마다 모양새도 가지각색이다.
뿔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개가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다. 어깨에서 끔찍한 안구가 떠오르고, 몸 곳곳에서 가시가 생긴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괴한 현상이었다.
조금 전까지 살아 움직이던 인간이 이형의 모습을 취했다.
그 존재를 뭐라고 말해야 할까. 마족? 아니, 마족이라기에는 너무 기괴한 형상이다.
오히려 키메라와 비슷하다고 해야겠지. 마기를 품은 키메라. 혹은 마물. 명칭은 아무래도 좋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더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두 검을 들어라! 방심하지 마라.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혼란에 빠진 것은 일순간이었다.
미카엘라 단장의 호령 소리에 성기사들이 검을 들었다. 거리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괴물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날뛰었다. 마기가 꿈틀거린다. 몸이 무겁다. 마나를 다루는 것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
“악마라는 것이 정말로 실존했던 거였나.”
“악마요?”
카라스의 중얼거림에 셀렌느가 반문했다.
“보아라, 제자야. 이 압도적인 마기는…. 마족이 소유할 힘이 아니다. 이만한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느냐.”
악마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기운은 세 존재였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하로라는 소녀. 거리로 나왔던 두 간부. 모란다와 갤메크. 녀석들의 몸을 빌려 나타난 악마들은 위압감 자체가 달랐다. 발과 맞닿은 지면에서 마기가 퍼진다. 만약 놈들에게도 계급 같은 것이 있다면, 분명 위에서 군림하는 대장급이지 않을까.
놈들은 마을을 한 번 둘러보더니, 미련 없이 발걸음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마을에서 벗어난다. 이 지하수로에서 빠져나가 황도로 올라갈 생각이다.
신전기사단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신성력을 끌어낸 성기사들이 움직임을 취했다. 부정하고 사악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신성력에서 달아날 수 없다. 하지만 신전기사단은 놈들의 발을 붙잡지 못했다. 그들이 자아낸 마기가 지하수로를 어둠으로 인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
빛을 잃어버린 마을은 곧 소름끼치는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