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황도 공방전(5) (18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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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공방전(5)

유피에르는 불타는 황도를 유유히 나아가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날뛰는 이형의 악마들을 수비군이 막아낼 길은 없다. 창은 놈들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검은 드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의미 없는 저항이 계속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하는 병사들과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가는 민간인들.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녀의 앞으로 뛰어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악마의 발을 잡고 있던 수비대는 이미 전멸한 지 오래다. 그 뒤를 쫓아오는 악마는 급하지 않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마음에 드는 반찬을 골라 먹듯이 한 명, 한 명. 민간인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남은 사람의 수는 이제 몇 되지 않는다.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수. 그래도 그들은 달린다. 정신없이 달리던 그들은 유피에르와 마주했다.

두 스켈레톤. 롯과 블라우를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발이 멈췄다.

후방에는 거인과도 같은 악마가.

전방에는 언데드와 함께 선 네크로맨서가.

망설이는 민간인을 악마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낄낄거리며 손을 뻗는 악마의 모습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소피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곁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뛰쳐나갔다.

인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악마의 발을 그녀는 여과 없이 쳐냈다. 충돌과 동시에 소피아의 몸이 날아갔다.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힘의 차이는 역력하다. 정면에서 부딪치는 건 무모했다. 그래도 잠깐의 시간은 벌었다. 은빛 마법진이 황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너라, 한 줄기의 빛이여. 지고한 왕관이 그대를 부르니라.」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악마를 향하고 있었다.

「천홍뇌편.」

찢어지는 빛이 황도를 갈랐다.

하늘에서 떨어진 검붉은 뇌견이 악마를 물어뜯었다. 한 박자 늦게 굉음이 뒤따랐다. 신벌은 악마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 어금니에 닿은 악마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바싹 타버린 악마의 몸이 천천히 넘어간다. 그 아래 있던 건물을 뭉갠 놈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야.”

양양에서의 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 유피에르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

다프네 신전은 생각보다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마기로 얼룩진 하늘 아래에서도 그 신성한 모습은 빛바래지지 않았다. 성가대를 비롯한 신전기사단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화로운 광경이다. 악마의 침공이 시작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유피에르는 알아차렸다.

신전의 앞에 있는 것.

기분 나쁜 푸른색으로 빛나는 존재는 악마였다.

머리에서 솟아난 외뿔. 어깨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가시. 등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곤충의 그것을 닮은 네 쌍의 날개다. 마물과 곤충을 반쯤 섞어놓은 악마는 신전의 안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손안에 잡힌 구슬이 불쾌한 소리를 냈다.

신전기사단 사이에서 한 성기사가 그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군. 이번 사냥감은 너인가.」

구슬 소리가 멈췄다.

오만하게 앉아 있던 악마는 성기사를 맞이했다.

“사냥한다? 누가, 누구를? 인간을 얕보지 말아라, 악마.”

「짖는 것뿐이라면 기어 다니는 개라도 할 수 있지. 네 놈이 앞의 잡것들과 무엇이 다르지?」

놈의 대답에 성기사는 검을 들었다.

사제들의 축복이 한 데 모인 걸까. 악마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 그는 검을 휘둘렀다.

악마의 손아귀가 검을 잡았다. 신성력을 두른 검이 빛난다.

검과 맞닿은 악마의 육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신성한 불에 몸이 먹혀들어가자, 놈은 주먹을 쥐었다.

타오르던 화마가 진화되었다. 신성력은 손바닥에 옅은 화상을 남겼을 뿐이다. 성기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검이 멈추는 일은 없다. 이번 공격으로 작은 상처를 입혔다면, 또 다시 상처를 안겨주면 될 일이다.

거듭해서 상처를 쌓아 올리자. 결실은 그 이후에 건지면 충분하다.

그런 성기사의 전략에 악마는 따분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인족이라는 건 이렇게까지 학습 능력이 없는 걸까. 앞에서 쓰러진 이들 모두 같은 전철을 밟았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일일이 받아주는 것도 귀찮다. 가슴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 막을 필요도 없다. 안쪽을 내준 악마는 성기사의 팔을 잡았다.

우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성기사의 팔이 뽑혀 나갔다.

“…!”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팔을 잃은 성기사의 몸을 악마는 내리찍었다. 성기사의 몸이 핏덩이로 변했다. 형체조차 온전히 남지 않은 그것을, 악마는 문 바깥쪽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이미 똑같은 결말을 맞이한 시체가 가득했다.

「다음.」

악마는 자리에 앉았다.

성기사가 다가오기 전과 같은 모습이다. 지면에 굴러다니는 구슬을 쥔 그는 잘그닥, 잘그닥 손안에서 비비기 시작했다. 유피에르는 구슬에서 느껴지는 생기에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한 구슬이 아니다. 구슬 안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악마의 손에서 구슬이 부서질 것처럼 형태를 바꿨다.

그 모습에 기사단의 몸이 떨렸다. 사제들도 별다를 바 없다.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한 채, 다시 희생자를 세울 무의미한 대치가 계속될 따름이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녀는 깨달았다.

그렇군.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인질인가.

악마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성가대와 기사단 사이에는 성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신석의 기운이 다소 약해진 걸 보았을 때, 안쪽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는 사이 또 한 명의 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소피아의 모습에 유피에르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려.”

“무운을.”

“빚 하나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유피에르는 악마를 향해 발을 떼었다.

놈은 신전을 응시하고 있다.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자신감. 악마라는 족속들이 가질만한 오만함이다. 정면에서 어울려줄 의리는 없다. 이대로 뒤를 친다.

「무엇보다 지고한 왕관이 고한다.」

세계수의 문을 두드린다.

안쪽까지 깊게 들어갈 필요는 없다. 세계수의 이해는 받아들였다. 그녀가 해야 할 것은 그저 약간의, 정말 조금만 힘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전부다.

이제는 두렵지 않다.

세계수에 오르는 걸 무서워하던 고양이는 더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무를 오르고, 그 안에 있는 금단의 과실에 손을 댄다.

대지가 마녀의 부름에 답했다.

지진과도 같은 흔들림이 시작된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악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악마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마나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꺼림칙한 이 힘은 신성력이다.

지하를 달리던 그것은 악마를 향해 뛰어올랐다.

흙으로 만들어진 용이다.

모래로 이루어진 어금니가 적의를 드러냈다. 악마는 돌진하는 지룡을 잡았다. 힘 싸움이라면 밀리지 않는다. 위턱과 아래턱을 잡은 놈은 그대로 지룡의 입을 찢었다. 턱이 분리된 지룡의 형체가 무너졌다.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그 안쪽에서 또 한 마리의 지룡이 나타났다.

「음!」

지하를 달리던 지룡은 한 마리가 아니다.

악마의 앞뒤, 좌우. 모습을 드러낸 용은 총 4마리다. 하나하나 상대할 수는 없다. 주먹을 쥔 악마는 돌진하는 지룡의 머리를 박살 냈다. 모래가 흩날린다. 신성력과 반응한 육체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타올랐다. 지룡을 전부 제압한 그는 이 현상을 가져온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차분하게 악마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은 유피에르다.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선명한 은빛을 머금은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악마가 눈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녀석을 향했다.

「지룡중래(地龍重來).」

제압했던 모래가 하나로 합쳐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지룡이 악마를 내려다보았다.

노기로 가득 찬 용안(龍眼)을 마주한 악마는 이것이 어디선가 본 광경이라는 걸 깨달았다.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때는 수룡.

이번에는 지룡.

달라진 것은 용을 구성하는 소재뿐이다.

「그렇군. 이 술식. 그때의 그 죄인인가!」

탐식의 벨제붑.

낙양에서 흑토장의 몸을 빌려 강림했던 악마는 유피에르의 모습에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그 죄인을, 설마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벨제붑의 오른팔이 부풀어 올랐다.

무모하게도 악마는 자신보다 큰 지룡을 향해 오른팔을 휘둘렀다. 무식한! 벨제붑의 주먹에 지룡의 몸이 꿰뚫렸다. 과격한 놈의 행동에 유피에르는 얼굴을 찌푸렸다. 모래 바람이 흩날린다. 술식을 부순 벨제붑의 오른팔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신성력에 노출된 탓이다. 이제는 쓸 수 없다. 오른팔을 넌지시 바라보던 놈은 왼손을 들었다.

검은 잿더미가 땅에 떨어졌다.

팔은 재생되지 않는다. 왼손을 굳게 쥔 놈은 유피에르를 보았다.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마. 이 탐식의 벨제붑이 친히 네 목숨을 가져가마, 죄인.」

“어머, 할 수 있겠어?”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건방진 것.」

마기가 부풀어 오른다.

지금까지 취해왔던 행동은 장난이나 다름없었다는 듯 압도적인 마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하얀 도화지에 먹물이 떨어진 것처럼. 성스러운 땅이 탁기로 물든다. 신전에서 사태를 추이하던 사제들이 탄식의 목소리를 냈다. 마기가 영역을 넓힌다. 유피에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녀석의 영향권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꿈틀거리는 마기가 호흡을 옭아온다. 자연스레 일어난 신성력이 녀석의 힘에 대항했다.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치마 밑으로 드러나는 검은 꼬리. 등에서 피어나는 은빛의 날개. 손 위에서 투영되는 악조. 그녀의 본신이다.

몸 안의 골격이 드러나는 꼴사나운 모습이 아니다.

신석의 비호가 사라진 황도는 마족이 본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그래, 그 모습이야말로 죄인에게 어울리지!」

끊어진 놈의 오른팔에서 파리 떼가 쏟아졌다.

독충을 본 유피에르는 뒤로 물러났다.

파리와 거리를 벌린 채 그녀는 지팡이를 들었다.

“홍접(紅蝶).”

붉은 나비가 피어올랐다.

그녀를 추적해온 독충을 전부 불태웠다. 이것으로 매듭지을 수 있을 거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독충을 지나 벨제붑이 손을 뻗었다. 그 위로 작은 인형들이 떨어졌다. 병정 인형과 시녀 인형이다. 인형들의 무장은 검이다. 하나 남은 왼손에 검이 꽂힌다. 평범한 검이 아니다. 신성력을 두른 검은 벨제붑의 피부를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불길이 달린다.

벨제붑이 손을 흔들자 그 행동을 예측했다는 듯 붉은 나비가 그 시야를 가렸다. 병정 인형의 검 끝이 벨제붑의 눈을 노렸다.

「하찮군!」

검은 벨제붑의 눈을 찌르지 못했다.

정확히는 눈을 뚫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다. 신성력을 두른 검이 역으로 부러진다. 일순간 마기를 방출한다. 몸에 들러붙었던 인형들이 떨어졌다. 유피에르의 제어 하에 들어온 인형들은 몸을 일으켰지만, 소용없다. 인형의 몸은 마기에 의해 녹아들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라, 죄인!」

외팔의 형태가 바뀐다.

날카로운 촉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유피에르가 벌린 거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 검은 창이 그녀를 향했다. 악조와 촉수가 부딪혔다. 밀리는 건 유피에르 쪽이다. 손 위에 투영된 악조가 버티지 못한다. 알베르트와는 다르다. 그녀는 솜씨 좋게 힘을 흘리는 법 따위 알지 못한다.

악조가 삐끗거린다.

길게 버틸 수는 없다. 그렇다고 떼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벨제붑 정도 되는 악마라면 술식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녀석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곤란하네.”

유피에르는 아공간을 열었다.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사역마인 롯과 블라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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