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황도 공방전(4)
「Arrrr…!」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아스모데우스의 목에서 흘러나온 음성에 마탑이 진동했다.
거리를 좁히던 알베르트가 발을 멈췄다.
귀 깊숙한 곳을 찌르는 이명은 형체를 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귓속을 넘어 머리를 파고드는 통증. 눈앞의 광경이 흔들렸다. 대지가 요동치는 것 같다. 몸이, 공기가 무겁다. 일순간 무너지는 자신을 다잡는다. 내공을 가속한다. 신체를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벗어난다.
자세를 바로잡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아스모데우스는 말했다.
「아하! 그래, 이 정도로 쓰러지면 재미없지. 어디 얼마나 어울려줄 수 있을지 볼까?」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가슴에 두 손을 올렸다.
창백한 드레스 위로 재생한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검은 핏방울이 맺힌다. 살점이 찢겨나간다. 자신의 살덩이를 뜯어낸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쯤 파버린 가슴에서 꼬리와도 비슷한 촉수가 튀어나왔다.
미성숙한 소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촉수가 한 데 엮여 가시나무와도 같은 형태를 취했다.
자라난 나무를 쓰다듬듯이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끊어진 가시가 아스모데우스의 앞에 떨어졌다. 가시가 성장한다. 벽처럼 솟아난 그것은 알베르트의 앞을 가로막듯이 가시덤불로 자라났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저런 것으로는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
적대자를 향해 가시가 솟아났다.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눈. 코. 입. 목. 어깨. 가슴. 팔. 다리. 전신을 노리는 가시덤불의 숫자는 흉악할 정도다. 눈앞까지 당도한 가시들을 알베르트는 한 번의 휘둘림으로 떨쳐냈다.
가시덤불은 멈추지 않는다. 기포가 끓어오르듯이 꿈틀거린다.
월아의 빛에 타오르면서도 알베르트의 발을 잡고자 한다. 그러나 재생이 타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모데우스가 손을 들었다.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던 신검이구나. 그렇지만….」
가시덤불이 변화를 시작했다.
가시가 떨어지고, 불타오르는 줄기에서 흉측한 입이 떠올랐다. 하나가 아니다. 줄기 군데군데서 나타난 입은 하나의 생명체에 가까웠다. 온다. 빠르다. 위쪽이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휘둘렀다. 손에 닿는 감촉이 다르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어류를 베어내는 느낌이다.
절단된 부분이 꿈틀거린다.
검은 피와 함께 땅에 떨어진 입은 그것으로는 끝나지 않는지 펄떡거렸다. 물속에서 꺼낸 물고기 같다. 몇 번이고 펄떡거리던 입이 알베르트를 향해 뛰어올랐다.
재빨리 몸을 기울인다.
지나간 입을 월아의 검기로 마무리 지었다.
완벽하게 움직이지 않는지, 확인할 여유는 없다.
우측에서 다가오는 입. 내리쳐서 베었다. 좌측에서 다가오는 입. 검막에 휩쓸려 찢겨나갔다. 녀석은 공포라는 감정을 알지 못하는 걸까. 움직임이 더뎌지는 일이 없다.
덤불 때와는 다르다. 피가 튀는 게 아니라 잘린 입에서는 고름과도 비슷한 액체가 튀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다행히 독소는 없는 것 같다. 개의치 않고 검격을 이어간다. 멈추지 않는 입은 뱀과 비슷하다. 알베르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위협적이지는 않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재생 속도. 벽 뒤에 선 아스모데우스는 손을 까닥거리고 있을 뿐이다.
위기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
좀 더 체력을 아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천마신공 오의
천마혈참
압도적인 검격 앞에 벽과 같았던 입이 쪼개졌다.
검기는 벽을 가른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뒤에 숨어있던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잘려있었다.
「바보 같은…. 어떻게 이런 일이…?」
타격이 있는 걸까. 새어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녀가 품은 마기는 달라진 것이 없다. 실제로 받은 타격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겠지. 그런 알베르트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무너지듯이 몸을 수그리던 아스모데우스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정말 재미없는 남자네. 여자의 거짓말이 뻔히 보인다고 해도 말이지. 그것에 어울려주는 것이 멋진 남자의 덕목이야.」
마기가 갈라진 몸을 이어 붙였다. 상처가 봉합되자 그녀는 흘러내린 피로 손을 뻗었다.
검은 피가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입안에서 감도는 비릿한 맛을 음미한 아스모데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있지. 우리 군단장을 상대하는 데 네가 힘을 아낄 여유 같은 게 있어? 빨리 그걸 보여줘 봐. 벨제붑한테 보여줬다는 강기의 꽃. 나도 꽤 관심이 있거든.」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알베르트의 앞에 당도한다.
읽었다. 월아가 번뜩였다. 두 손톱이 월아와 맞물렸다. 튕겨낼 수 없다. 힘 싸움은 밀린다. 거리를 벌릴 수 없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펼칠 뿐이다. 월아가 춤춘다. 따라오는 검격을 본 그녀는 아하, 하고 웃었다.
눈앞에서 날아드는 검격이 즐겁다.
신검이 내뿜는 빛은 아무리 아스모데우스라도 무시할 만한 힘이 아니다. 그녀와 같은 군단장 마몬이 쓰러졌던 것처럼. 월아의 검 끝이 몸에 닿는다면 현계에 강림한 육체를 쓰러뜨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황도에 강림한 군단장은 총 세 명.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탐식의 벨제붑.
분노의 마몬.
두 세상을 이은 통로는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절대라는 것은 없지만. 후속 병력이 계속 도착하는 이 상황에서 그들이 패배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렇다면 이 일탈을 즐겨도 되겠지.
애초에 그녀가 이곳까지 나온 이유는 딱 하나다.
이 무료함을 달래줘.
고향에서의 하루하루는 너무나도 지루했다.
제대로 된 유흥거리는 무엇 하나 없다. 그저 동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살육이 전부. 현계로 나갈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소수다. 그것도 재미없는 세상이 주를 이루지, 인간이 있는 세상으로 나오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그런 시점이었다.
마몬과 벨제붑이 부름을 받고 한 번 불태웠던 현계에 강림한 것은. 이번에도 실망만 가득한 침공이 되겠지. 실제로 마몬은 귀환도 빨랐다. 순식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리라. 돌아온 그 바보를 반기러 간 아스모데우스는 한껏 흥분한 마몬을 볼 수 있었다.
그 바보가 그랬다.
현계에서 재밌는 인간과 마주했다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료함에 짓눌려 죽어가고 있던 남자가.
어린애처럼 신이 나서.
「그래. 그래. 너희의 장기를 보여줘. 저런 잔재주는 필요 없어. 너희 인간은 역시 이래야지!」
염증이 날 것 같은 그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상관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좋다. 정신적으로 죽어버릴 것 같은 따분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인간과 마주한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한낱 인간 주제에 군단장을 쓰러뜨린 남자.
이 몸과 마주했음에도 그 검에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올곧은 시선. 그 눈에서 망설임은 엿보이지 않는다. 신검의 선택을 받은 인간. 어느새 무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책없게도, 인간을 앞에 두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못된 남자구나. 여자의 마음에 불을 지르다니!」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교전이 거듭될수록 알베르트의 몸에 상처가 생겨났다. 강림한 육신에 적응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흥분한 걸까. 속도가 붙기 시작한 아스모데우스의 움직임을 알베르트는 따라잡지 못한다.
당연하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한계는 뚜렷하다.
두 군단장이 당한 것은 그저 불완전한 강림이었기 때문이다. 본연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이번 강림과는 다르다.
검을 맞대고 있는 알베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
검의 움직임이 변화한다. 가슴을 찌르는 일격. 검게 빛나는 손톱이 이를 튕겨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검을 회수한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던 아스모데우스는 몸을 뒤로 젖혔다. 얼굴 앞으로 은빛의 검기가 지나갔다.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문득 달콤한 냄새가 났다.
폭음과 불길이 달리는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냄새가.
시작은 아직 여물지 않은 꽃봉오리였다.
하얀 꽃잎이 알베르트의 주변에서 떠다녔다. 비꽃처럼 피어나는 그것은 인간들이 난초라고 부르는 꽃을 닮아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무심코 꽃잎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그것은 강기의 집합체다. 신검과 닿아도 형체를 유지하던 손톱에 금이 생겨났다.
탐욕의 벨제붑이 말한 강기의 꽃. 과연. 녀석이 타격을 입은 것도 당연하다.
만약 이 강림이 불완전한 것이었다면, 아스모데우스도 위협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강림은 그런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피어오르는 꽃잎 앞에서 그녀는 두 손을 벌렸다.
천마신공 오의
백화혈무
꽃이 만개했다.
인간의 무공이 만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폭발이 이어졌다. 충격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고서클 마법이 떨어진 것 같다. 터져나가는 강기 속에서 아스모데우스는 웃었다.
뚫을 수 없다.
이 정도로는 이 몸을 죽일 수 없다.
그리고 피어올랐던 꽃은 졌다.
지면으로 떨어진 꽃잎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아마도 이것이 알베르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전력. 오랜만에 느끼는 통증이 달콤했다. 상처는 깊지 않다. 회복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치명상은 어디에도 없다.
큰 상처가 보이지 않는 아스모데우스의 모습에 알베르트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녀석이 가진 비장의 수는 정면에서 막혔다.
전의를 앗아가기에는 충분한 장면이었겠지. 그래도 녀석의 검은 움직인다. 그것이 헛된 저항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런가. 이것이 끝이다.
아스모데우스는 알아차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오가는 검은 헛된 저항일 뿐이다.
신검의 힘은 더는 위협적이지 않다. 바닥을 드러낸 남자와 더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이만 끝을 낼까?」
그래도 즐거웠다.
몇백 년 만에 느낀 희열이었다.
이 답례로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해줘야겠지.
다가오는 검격을 아스모데우스는 몸으로 받았다.
「소용없어.」
알베르트의 검은 전부 보았다. 더 본다고 해도 즐길 거리가 없다.
검격에 잘린 신체가 다시 이어 붙는다. 신검의 가호가 있다고 해도 어차피 이 정도다. 재생하는 아스모데우스의 몸을 본 알베르트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신검을 갈무리했다.
「…?」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서 검을 집어넣는 거지? 최후의 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포기한 건가?
아니, 그럴 남자는 아니다. 뭔가 묘수라도 준비하고 있는 걸까?
아스모데우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도 병단의 무자비한 포격 앞에서 군단의 진격은 멈춰있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군단장인 아스모데우스가 알베르트와 손을 섞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갖고 놀던 리하델은 한 소녀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잘린 팔을 회복시키지 않는 걸 봐서는 루미에르 교의 사제는 아니다. 역으로 그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마기다.
그 외의 것은 무엇이 있는가.
지면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꽃잎. 포격이 떨어진 것처럼 쑥대밭이 된 땅. 군단의 시체와 어우러진 인간의 시체. 특이한 것은 없다. 아스모데우스가 이상을 느낀 건 그 시점이었다.
꽃잎은 졌다.
그렇다면 양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리.
그럴 터인데. 왜 지면에 떨어진 꽃잎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거지?
천마신공 오의
린화
떨어진 꽃잎이 작은 환으로 응축됐다.
이곳에 강림한 이후, 아스모데우스는 처음으로 위험을 느꼈다.
위험하다.
이 환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알베르트의 손이 아스모데우스를 가리켰다.
마치 조금 전 아스모데우스가 리하델에게 손을 향했던 것처럼.
린화 개화(開花)
「설마….」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했다.
꽃의 강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
린화가 가라앉는다.
폭음 속에서 아스모데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빛이 흐르던 그녀의 몸에는 보기 흉한 균열이 가득했다. 그녀에게서 전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이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말이야.」
다가오는 알베르트를 본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 마몬이 왜 그리 칭찬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아.」
“이 수를 보인 건 네가 처음이다.”
「그래? 그거 기쁘네. 정말 재밌었어, 알베르트.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즐겨도 될 것 같아.」
“마몬도 그렇고, 너도 그 소리군.”
「물론이지. 우리와 만났다는 건 연이 닿았다는 소리니까. 분명 어디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부탁인데, 그때까지 죽지 마.」
그녀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즐거웠다는 듯 양 볼에 홍조를 띄운 그녀는 알베르트를 주시했다.
촛농이 굳듯이 하얗게 변해버린 그녀는 이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