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황도 공방전(3)
마탑 정문을 향해 악마들이 꾸역꾸역 밀려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된다. 호령 소리에 맞춰 각 병단이 순차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얼음과 불의 향연이 시작된다. 떨어지는 포격 아래에서, 고풍스러운 철문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변해갔다. 마탑이 자랑하는 부지가 쑥대밭이 되고, 아름답던 정원에서는 연기만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악마들의 진입을 막을 수는 없다.
쏟아지는 포격 속으로 놈들은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1병단 물러나라. 2병단 포격을 이어가라.”
끓어오르는 마나를 달래기 위해 1병단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대기 중이던 2병단이 들어섰다.
포격이 끊겼다. 찰나의 시간을 벌기 위해 골렘과 키메라가 투입되었다. 별다른 타격은 주지 못하겠지만, 잠시 발을 묶어두는 것은 가능하겠지.
“위도 옵니다!”
“그쪽의 탑의 인원에게 맡겨라!”
학생들을 보고 있는 교수들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결계의 위쪽이 부서지며 하늘을 나는 악마가 들어왔다.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기다란 촉수가 보였다. 창백한 촉수가 단숨에 뻗어졌다. 놈의 공격에 화답하듯이 마탑에서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날아갔다. 한기와 맞닿은 악마의 몸이 얼어붙었다. 녀석의 속도가 느려지자 한 마법사가 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5서클 마법사인 나이드라 교수다.
이미 캐스팅이 끝난 상태인지 그가 든 지팡이 앞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악마를 향해 나이드라는 지팡이를 겨누었다.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
빛이 어둠을 갈랐다.
검은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악마를 작살 냈다.
놈이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리하델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제히 포격!”
마도 병단의 포격이 재차 시작된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법이 악마에게 날아들었다.
놈들의 진격이 느려진다. 간신히 포격을 뚫고 부지 안으로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리하델의 마법이 악마를 저격했다. 그러나 녀석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발걸음이 멈추는 일은 없다. 부지 안에 쌓여가는 시체가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쌓이기 시작했을 무렵, 군단 사이에서 작은 악마가 나왔다.
소녀 같은 체형의 악마다.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가 어딘지 모르게 요염하다. 서큐버스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힘으로 뚫으려는 게 아니라 다른 기책을 쓸 수도 있다. 리하델의 지시에 맞춰 병단은 경계태세를 올렸다. 보강되는 실드를 보고 소녀 악마는 손을 들었다.
악마의 검지가 병단을 가리켰다.
검은빛이 손끝에 맺혔다.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암광이 빛났다.
목표를 확인한 악마의 입이 열렸다.
「Bang!」
암광이 달렸다.
일직선으로 쏘아진 검은 빛이 병단을 갈랐다. 2병단의 실드를 꿰뚫은 암광은 마탑을 관통했다. 굉음과 함께 마탑 일부가 박살났다. 붉은 피가 치솟았다. 낭자 하는 선혈을 본 악마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터티. 레빌드. 녀석을 맡아라.”
병단의 두 부관이 앞으로 나섰다.
진형 앞으로 나오는 두 마법사를 본 악마는 재차 왼손을 들었다.
그 손끝에 어두운 빛이 맺혔다.
“안티 매직 실드.”
“록 실드(Rock Shield).”
두 마법진이 겹쳐지며 방패를 만들었다.
암광이 번뜩였다. 쏘아진 어둠이 방패와 맞닿았다. 방패는 일순간 빛의 진격을 막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얼음판이 깨져나가듯 방패 위로 쩌저적 금이 생겨났다. 수복 속도가 따라가질 못한다. 두 술사가 다급히 마나를 때려 박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방패를 돌파한 암광은 두 마법사의 목숨을 앗아갔다.
“…….”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리하델의 말문이 막혔다.
킥킥거리는 악마의 웃음소리만이 울렸다.
실수했다. 저건 규격 외의 괴물이다.
누군가에게 맡길 것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잡은 리하델이 녀석의 앞으로 나섰다.
「…?」
악마의 눈이 리하델을 주시했다.
병단의 다른 마법사들과 비교하면 꽤 나이가 있다. 송송한 백발과 침착한 느낌을 주는 하얀 수염.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인자한 대답이 돌아올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리하델을 둘러싼 마나는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악마도 이를 꿰뚫어 본 거겠지.
섬뜩한 미소를 지운 녀석은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이, 리하델을 향했다. 어두운 빛이 모인다. 작은 구슬과도 같던 암광이 이번에는 공에 버금가는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리하델의 앞에서 마나가 실드를 형성했다.
실드가 펜타그램을 그렸다.
떠오르는 마법진은 한 개가 아니다. 파이어 월(Fire Wall)과 그 위에 겹쳐지는 안티 매직 실드. 떠오른 마법진이 술식을 강화했다. 견고한 실드가 완성되자, 리하델은 6서클 공격 마법인 문 라이트(Moon Light)를 준비했다. 달빛의 힘을 빌려 적대자를 제거하는 6서클 최강의 공격 마법이다. 대마법사 카라스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 역시 6서클 마법사다. 마도를 탐구하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눈앞의 악마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녀석을 쓰러뜨리는 것은 가능하리라. 아니, 쓰러뜨려야만 했다.
준비를 마친 리하델은 번뜩이는 암광과 마주했다.
안티 매직 실드.
3서클 방어 마법. 술사가 다루는 마나량에 비례해 상대방의 공격을 컷하는 마법이다. 리하델 정도의 마법사라면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라 해도 단숨에 돌파당하지는 않는다. 수합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고, 그 시간에 다른 술식을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허나, 이번만큼은 예외다.
안티 매직 실드는 암광과 맞닿기 무섭게 격파당했다.
파이어 월.
공격과 방어 둘 모두를 겸하는 4서클 마법. 리하델의 주특기인 마법이다. 강화 마법으로 보완된 파이어 월은 이미 4서클 마법이라 할 수 없다. 6서클 마법에 버금가는 방어 마법으로 돌변해 있었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암광과 부딪쳤다. 버틴다. 불길이 역으로 마기를 삼켰다.
방패가 버티는 것을 확인한 리하델은 주의를 캐스팅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였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악마가 얼굴을 찌푸렸다.
녀석은 손을 아래로 휘둘렀다.
“……!”
떨그렁!
주인을 잃은 지팡이가 땅으로 떨어졌다.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리하델은 무릎을 꿇었다. 무너지듯이 주저앉은 그의 오른쪽 팔은 더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뚝뚝. 붉은 피가 쏟아졌다. 흘러내린 피는 순식간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크윽.”
찢어지는 격통에 그는 비명을 억눌렀다.
보이지 않았다.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공격 마법을 준비할 게 아니었다. 좀 더 방어 술식을 보완했어야 했다.
“총장님!”
포격을 이어가던 병단의 마법사가 달려왔다.
실드로 방벽을 친 채 달려오는 그를 본 리하델이 소리쳤다.
“오지 마라!”
경고음을 냈지만 이미 늦었다.
암광이 젊은 마법사를 꿰뚫었다. 실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헛된 저항이다. 상반신을 잃은 마법사는 차가운 지면으로 쓰러졌다.
“이놈…. 감히.”
흘린 피가 많은 탓일까. 눈앞이 흔들렸다.
마탑에 상주하는 루미에르 교의 사제는 없다. 이 부상을 회복할 방법은 없다. 판단을 마친 그는 불길을 자아냈다. 하지만 불길은 그 어깨에 닿지 않았다. 시선을 들자 놈의 손가락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캐스팅을 중단한다. 불길이 있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실드다.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다. 암광의 동선을 꺾는다. 빛줄기가 내달렸다. 새로 만든 실드가 부서졌다.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이어지는 빛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무영창 마법을 시전 할 수밖에 없다. 지혈할 여유는 없다. 방패를 올리는 것이 조금만 늦더라도 목숨을 잃게 되리라.
병단의 마법사들도 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궁지에 몰린 리하델을 구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하고 있지만, 큰 효과는 없다.
「…?」
악마는 즐거워 보인다.
한 손으로는 리하델을 갖고 놀고, 한 손으로는 병단의 공격을 튕겨내고 있다.
카라스 님만 있었어도….
이 자리에 없는 대마법사를 떠올린 리하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병단에서 검은 바람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마법이라 생각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몸놀림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튀어나온 흑풍은 악마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얼음보다 하얗게 빛나는 검이 창백한 손톱과 경합했다.
일합.
무언가 느낀 것일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악마가 몸을 물렀다.
놈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봤다.
검과 맞닿은 손톱이 잘려있다. 타오르는 것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을 보며 악마는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인간이었다. 그제야 리하델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난입자는, 분명 검의 영애를 보좌하던 루드비히의 집사였다.
악마와 알베르트의 시선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다.
리하델은 알베르트의 움직임을 놓쳤다. 그의 동체 시력으로는 따라가지 못한다. 신비한 빛을 흘리는 도검이 그 위치를 알려줄 뿐이다. 손톱과 도검이 부딪혔다. 빛이 반짝거렸다. 악마는 손을 거두었다. 검처럼 길게 자리하고 있던 손톱이 없다. 지면으로 떨어진 빛은 놈의 손톱이었다.
마탑으로 진입한 이후 처음으로 입은 상처다.
불쾌하다는 듯 악마는 얼굴을 구겼다.
손톱이 사라진 손을 든다. 그 위로 놈의 장기인 검은 구가 떠올랐다. 암광이 향하는 곳은 건방지게도 손톱을 자른 인족이다. 그러나 인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친 것인가? 의문을 품은 것은 실수였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알베르트는 놈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명검법
참
암광이 작렬하는 것보다 먼저 월아가 악마의 손목을 베었다.
알베르트는 거리를 벌렸다.
오른손을 잃은 악마의 절단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면으로 떨어진 손은 신성한 불길에 휩싸여있었다. 떨어진 신체가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놈이 고개를 들었다.
「돌격대장 마몬에게 들었지. 익숙한 무공을 다루는 남자가 있다고. 그래, 네가 알베르트인가?」
여성이 내는 것 같은 가녀린 음성이었다.
그것이 눈앞의 악마가 내는 목소리라는 알아차린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마몬이라면 양양에서 봤던 그 악마 말이군.”
「그래. 알지 모르겠지만 넌 꽤 유명인이야. 마몬은 물론이고, 벨제붑까지 패퇴시킨 인족.」
악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 몸은 음욕의 아스모데우스. 본능에 충실한 이 부대를 이끄는 군단장이야.」
갑주와도 같이 몸을 가리던 비늘이 변화를 시작한다.
창백한 피부 위로 검은 드레스가 나타났다.
치맛자락을 잡은 아스모데우스는 고혹적으로 몸을 꼬았다.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창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체형이 유아에 가깝기 때문일까. 성숙하지 않은 육체는 의도와는 달리 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필 강림한 육신이 이래서 말이지. 그 점은 감수해줬으면 좋겠어.」
아스모데우스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간의 몸에 강림했군.”
「당연한 걸 말하네. 우리의 본체는 이곳에 있지 않으니까. 매개체가 필요하거든. 뭐, 충실한 종이 준비해 준 육신이긴 한데. 조금 실망하긴 했지. 그래도 이름은 괜찮았어. 분명 하로라고 했던가? 어린 소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지하수로에서 만났던 검은 손의 간부다.
“그럼 그 하로라는 소녀는…. 죽은 건가?”
「흐음, 뭔가 했더니.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나는 다른 바보들과는 달라서 말이야. 강림하기 전에 육신의 소망을 최대한 확인해. 참고로 이 하로라는 인간을 말이지. 마음속 깊이 이 썩어빠진 도시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더라고. 불꽃축제와 같은 커다란 불을 지펴달라고 말이야.」
이야, 재밌는 소망이었어. 하고 아스모데우스는 말을 이었다.
「너희 인족은 정말 재밌어. 동포를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건 인족 밖에 없을 거야.」
“…….”
이야기를 더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베르트는 월아를 쥐었다.
“그만하지.”
「그만? 뭘? 이 몸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해봐. 그 멧돼지 같은 마몬을 어떻게 이긴 거야? 벌레나 다름없는 너희가 어떻게 벨제붑을 쓰러뜨린 거지?」
“대답이라면, 그 몸으로 들어라.
「어머, 급한 남자는 취향이 아닌데.」
월아에서 뿜어지는 빛을 본 아스모데우스는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