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황도 공방전(2) (18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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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공방전(2)

아리시엘은 란랑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선두에서 길을 뚫고 있는 것은 알베르트다. 어떤 악마가 와도 그 발길을 잡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막아내는 악마의 외피가, 알베르트의 검 앞에서만큼은 예외다. 검술을 구사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올곧게 나아간 은빛이 모든 걸 가르고 있었다.

“이게 마족으로부터 얻은 힘. 상상 이상입니다.”

“설마 알베르트 님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어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루인과 마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악마들에게 손도 대지 못하는 수비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격에 악마의 숨통을 끊고, 길을 만든다. 많아야 이격. 자세를 무너뜨리고 놈을 마무리 짓는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과 달리 란랑의 미간은 좁혀 있었다.

란 답지 않다.

너무 서두르고 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초조하게 만드는 걸까.

쑥대밭이 된 황도 때문인가? 란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상점가는 불길에 삼켜있었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난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악마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악마로부터 영향을 받은 마물까지 출현하고 있다. 일방적인 살육이 행해지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곳도 많다. 거리 요소마다 만들어진 벽이 침략자의 발을 묶고 시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혼란에 빠진 것은 처음뿐이다.

제국의 주 전력들이 움직인다면 희생이 크더라도 사태를 수습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사고를 끊는다.

란랑은 곁에 있던 아리시엘을 쌍둥이 자매 쪽으로 밀었다.

“아?”

아리시엘이 있던 자리에서 검은 발톱이 솟구쳤다.

란랑은 소매에서 은침을 꺼냈다. 이 일행 중에서 실질적인 전력은 그녀와 란. 둘이 전부다. 은침에 선명한 검기가 잡혔다. 발톱과 은침이 부딪친다. 생각보다 충격이 크다. 지면으로 전부 흘려보낼 수 없다. 몸을 무른다. 추적은 없었다. 발톱이 내려앉자 란랑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기묘한 형태의 악마였다.

지면에 들러붙은 그것은 마치 미끈거리는 점액처럼 보였다. 며칠 전 하수구에서 봤던 슬라임이 이러할까. 생리적인 혐오감에 란랑은 몸을 떨었다. 검은빛의 액체에서 눈이 떠올랐다. 붉은 외눈 속에 그녀의 모습이 담겼다.

「……?」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점액이 요동친다. 끓어오르는 기포가 형태를 취했다. 롤처럼 말린 액체는 창이 되었다. 창으로 솟아난 악마는 지면을 타고 미끄러졌다. 란랑은 은침을 투척했다. 일순간 창의 형태가 사라진다. 꾸물거리는 점액으로 변한 악마는 은침을 집어삼켰다. 움직임이 멎는 기미는 없었다. 소용없다. 판단을 마친 란랑은 지면에서 떨어졌다. 흐르듯이 그녀를 쫓아오던 악마가 뛰어올랐다.

지면에서 떨어진 놈은 그림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은 외눈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검은색이다. 란랑은 따라오는 녀석을 향해 은침을 던졌다. 창의 형태가 흐릿해진다. 다시 점액으로 변한 놈은 은침을 먹어치웠다.

“칫.”

란랑은 무심코 혀를 찼다.

역시 익숙지 않은 무기는 다루는 게 아니다.

신체에 내공이 깃든다. 악마의 추적은 계속된다. 바라던 바다. 란랑은 놈과 마주했다.

주먹을 내리꽂는다. 타격감은 없다. 물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것 같다. 충격을 그대로 흡수한다. 그림자는 출렁거릴 뿐이다.

란랑은 멈추지 않았다.

작은 주먹 위로 붉은빛이 떠 올랐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녀석을 내리친다. 내리치고 내리친다. 다른 수는 쓰지 않는다. 그저 내리치는 행위를 반복한다. 다른 형체를 취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묵묵히 란랑의 주먹을 받아들이던 놈이었지만, 이내 한계에 봉착했다.

검은 몸이 선혈과도 같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

악마가 형태를 취한다.

고집하고 있던 그림자 같은 모습을 벗어 던지고, 창과 같은 뿔이 솟아난 기괴한 형태를 취한다. 외피의 단단함이 달라진다. 란랑의 주먹이 멈춘다. 아마도 뚫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그 머뭇거림을 악마는 놓치지 않는다. 단숨에 솟아난 창이 그녀의 몸을 노렸다.

쿵!

악마의 이빨은 란랑에게 닿지 않았다.

재차 뻗은 소녀의 주먹이 두꺼운 외피에 꽂혀있었다. 외피는 부서지지 않았다.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놈은 움직일 수 없다. 다음 순간 악마가 액체로 변했다. 녹아내리듯이 녀석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발경의 묘리가 담긴 주먹이다.

이 자리에서 그 수를 알아본 것은 알베르트밖에 없겠지.

“겉을 부술 수 없다면 내부를 노리는 게 맞지.”

“그래요, 란. 이 정도는 가뿐하게 다뤄야죠.”

앞이 정리됐는지 다가온 란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야 쉽지. 그런 기예가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될 거로 생각해?”

“글쎄요. 그래도 란은 가능하잖아요? 제가 따로 말해줄 필요도 없다고 보는데요.”

“…….”

월아를 갈무리한 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란랑이 꺼낸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린 탓이다.

“움직임이 많이 달라졌네요. 누구에게 배운 거예요?”

루드비히 공작령의 도둑 길드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란의 몸놀림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때 그의 동작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읽어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란이 구사하는 무공은 그녀가 익힌 무공이 아니었다.

“시대를 주고 간 사람으로부터.”

“시대를?”

“짐을 하나 더 받았을 뿐이야.”

“뭔가 엄청 무거운 짐인가 보네요.”

“괜찮아. 처음부터 지고 있었던 짐이었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란랑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란은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아가씨가 괜찮은지, 발걸음을 돌리는 그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이상한 남자라니까.”

*&*

리하델 총장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그러짐을 믿을 수 없었다.

마정석의 비호 아래 있는 황도가. 마탑이 있는 이곳이 외적인 존재의 침공을 허락하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다. 수치심에 주먹이 떨린다. 굳게 다문 입 밖으로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각 지구에서 펼쳐놓은 마법진이 적신호로 물든다.

방호진이 깨지고, 제어에서 벗어난 마법진을 다른 존재가 이용한다. 공간이 찢긴다. 차원 너머에서 정체불명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도로 더러운 발을 내민 놈들은 본 적 없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도의 마법진이 역으로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제어권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각 지구 이미 연락이 끊겼습니다. 생존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숨이 붙어 있다면 안정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것 같지만…. 마정석마저 폭주하고 있는 터라, 제어권을 찾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이미 마탑의 전력은 전투태세에 들어서 있었다.

탑 내부를 보호하던 전시용 골렘이 바깥으로 나와서 전선을 유지한다. 각양각색의 패밀리어가 마법사의 곁을 지키고 있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결계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적은 지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을 나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문을 두들겼다. 문어와 새를 반쯤 섞어놓은 그 존재는 창백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일단 통신부터 복구하게. 결계는 얼마나 버틸 것 같은가?”

“복구반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길어야 10분입니다. 총장님. 놈들은 평범한 마물이 아닙니다. 저런 기괴한 형태를 한 마물이 있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저건 마치….”

“루미에르 교단이 말하는 악마와 흡사하지.”

“…….”

말문이 막힌 제자, 티렐의 모습에 리하델 총장은 알베르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우리의 적은 지옥에서 뛰쳐나온 악마입니다. 총장님.」

설마 그 터무니없는 말이 현실로 나타날 거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카라스 님은 어디에 계시지?”

“오늘도 외출이십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황도가 이 모양인데, 대체 뭘 하는 건지.”

검의 영애와 만난 이후로 카라스는 칩거를 깼다.

대마법사가 공방에서 나온 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마탑의 관리자인 리하델과 달리 마탑의 정신적인 지주는 명실상부 카라스였으니까. 그가 나왔다는 소식에 마탑을 방문하는 이들이 늘었지만, 실상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 카라스는 공방에서 나왔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건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주변 마석에서 들어오는 마나는 회수했는가?”

“4병단이 손은 쓰고 있지만, 실패했습니다. 역으로 저희가 다루는 마나까지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전부 차원을 가르는 데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황도를 지키기 위한 수비책이, 오히려 황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말인가.”

리하델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이 사태가 어떤 형태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와 관계없이 그는 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터다.

“교수들에게 알려라. 마석을 일제히 폭주시키라고.”

“네?”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을 들었다. 티렐은 리하델 총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 자신의 행동이 실례라는 걸 깨달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석을 폭주시키라고 했다.”

“스승님.”

제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제국을 수호하는 시스템을, 우리의 손으로 부순다는 말씀입니까? 부디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천 년의 역사 동안 제국을 보호했던 결계입니다. 현재 이 괴물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지만, 결계가 해제되면 더 큰 위험이….”

“아둔한 놈. 아직도 상황을 모르겠느냐? 뒤를 생각하고 싶다면 황도가 있어야 한다. 황도가 함락당하면 제국이 끝나버린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신호를 올려라!”

“아, 알겠습니다!”

리하델의 노성에 티렐은 황급히 발을 떼었다.

일단 통신부터 복구하는 게 우선이다. 황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마석을 폭주시키려면 다프네 신전과 긴밀한 협조가 필요했다. 여차하면 마정석을 파괴해야 할지도 몰랐다.

쿵쿵!

결계의 흔들림이 커진다.

마탑의 문을 두들기는 것은 머리에 붉은 뿔이 난 커다란 악마다. 3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덩치를 가진 놈이다. 불타오르는 주먹이 결계와 부딪칠 때마다 금이 생겨난다. 마나를 불어넣던 마법사들의 안색이 파리해진다. 리하델은 악마가 두드리던 결계를 해제했다.

앞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자 악마는 마탑 부지로 들어왔다.

물러나는 마법사들과는 반대로 리하델은 녀석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곁에서 한기를 머금은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스 스피어.

영창은 필요하지 않다. 6서클 마법사인 그에게 2서클 마법은 무영창으로도 충분하다. 순식간에 공정된 술식은 현실을 침식했다. 리하델의 뒤에서 떠오른 얼음 창이 악마를 향해 쏟아졌다. 악마는 귀찮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팔과 부딪친 얼음 창은 맥없이 떨어졌다. 1서클 매직 미사일에서 조금 발전한 공격 마법. 타격을 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악마는 손을 풀 수 없었다. 팔 너머를 두들기는 얼음 창은 끝나지 않는다.

결계를 보강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리하델을 응시했다.

총장의 뒤에서 떠오른 얼음 창은 몇 되지 않는다. 동시에 응용하는 수는 열 개 남짓. 그러나 공정부터 발현까지.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할 터인데. 리하델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쏘아지는 것과 동시에 얼음 창이 만들어진다. 충돌한 손 위로 얼음 창은 끊이지 않고 떨어진다. 압도적인 얼음 창의 숫자 앞에서 악마의 팔이 얼어붙었다.

윈드 커터.

얼음 창을 잇듯이 바람의 칼날이 날아갔다. 한기 어린 악마의 몸이 부서진다. 두 팔을 잃고, 그 위로 전열을 가다듬은 마법사들의 마법이 떨어졌다. 자비 없는 포격에 악마는 곧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인사는 차후에. 결계를 열어라. 악마를 안쪽으로 들이겠다.”

“문을 열라는 말씀입니까?”

마법사의 말에 리하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으로 녀석들을 유도해라. 이곳에 모인 두 병단이 요격에 나선다.”

“알겠습니다. 3병단과 5병단은 어떻게 할까요? 현재 동문과 서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리를 고수하라고 전해라. 결계가 한계에 가까워지면 그쪽도 열어야 할 것이다.”

현재 마탑을 지키는 마도 병단의 수는 총 넷.

현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어도 현상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한 병단이다. 일단 놈들이 쏟아지는 공간을 막는 것이 우선이다. 후속 병력을 막을 수 있다면 변수를 창출 할 수 있다.

입구를 향해 다가오는 악마들을 보며 리하델은 지팡이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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