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세인트 월 (181/200)

 # 181

세인트 월

제국 북부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이교도로부터 델리아 신성제국을 지켜온 최강의 방패.

세인트 월.

일반 사다리로는 대는 것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는 고대의 성벽이다. 처음 이 벽과 마주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떠올리는 생각은 하나다. 정말로 이 성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할까? 일반적인 성벽의 5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높이다. 유일한 입구는 성문. 벽을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벽 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망루가 있었으며, 경계를 서는 보초들은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마법사 전력은 어떠한가.

마도병단에서 파견을 나온 마법사들은 공격 마법에 능했다. 단순한 교전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교도가 공성 병기를 끌고 온다 한들, 까마득한 성벽 위에서 떨어지는 공격 마법을 막을 길은 없다. 힘들게 끌고 온 장비를 써보지도 못하고 요격당한다. 일방적인 전투다. 이교도는 성벽에 접근하기도 전에 죽어 나갔다. 백절불굴의 병사가 있어도 전의가 생겨날 길은 없었다.

그 탓에 세인트 월을 공략하기 위해 이교도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은 몇 되지 않았다.

희생을 각오한 채 이미 방비가 끝난 성문으로 돌격하거나, 죽든 살든 말도 안 되는 높이의 성벽을 오르거나. 적의 뒤를 치기 위해 땅굴을 파는 악책을 꾀하든지 말이다. 물론 셋 모두 지금까지 전과를 가져온 전력은 없었다.

성문으로 돌격. 마법과 화살 비 아래에서 수많은 이교도가 피를 뿌렸다.

성벽 등반. 벽을 반절 이상 오른 이가 없다. 끓는 기름을 부을 필요도 없다. 북부의 추위와 맞물린 물은 순식간에 이교도를 얼어붙게 했다.

땅굴. 얼어있는 이 북부의 대지를 파헤치는 건 중노동에 가깝다. 고생 끝에 굴을 만들었다 해도, 탐지 마법이 상시 발동 중인 세인트 월로 들어올 방법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교도들은 매해 세인트 월을 향해 내려왔다.

그건 올해도 다를 것이 없겠지. 자살 특공대와 같은 진격은 멈추지 않는다. 신을 울부짖는 그들은 그야말로 광신도다. 벽 너머는 새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변한 것이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로나메프는 하얀 입김을 토해냈다.

그가 세인트 월에서 병역의 의무를 진지도 어언 5년 차.

나름 짬밥이 생겨서 그런지, 이제는 망루 위에서 이교도를 관찰하는 것도 꽤 능숙해졌다.

“일어나라, 핀.”

“그, 근무 중 이상 무!”

선잠을 자고 있던 후임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핀은 자신을 바라보는 로나메프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괜찮다. 이해한다. 내가 없으면 모를까. 근데 여기서 자면 죽는다.”

다른 후임이었다면 경계 태만으로 며칠이고 갈궜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로부터 성난 불곰이라고 불리우는 로나메프도 핀에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세인트 월에 도착한 지 이제 한 달.

15살밖에 먹지 않은 소년 가장 핀은, 집에 있는 동생들을 위해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잃었다.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며 식당에서 돈을 벌어 온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소년은 스스로 세인트 월의 문을 두드렸다.

적어도 동생들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길.

병에 걸린 어머니가 제때 약을 드시길 바라면서.

병역을 대가로 돌아오는 보상금을 모두 집으로 보내고 있었다.

서자 출신으로 집안에서 도망치듯이 세인트 월로 온 자신과는 동기부터가 다른 아이다.

오들오들 몸을 떠는 핀에게 그는 달군 돌을 건넸다. 근무에 나오기 전 화로에 넣어뒀던 돌이다. 보급품으로 나오는 털옷만으로는 북부의 한기를 막을 수 없다. 짬이 좀 찬 병사들은 하나 같이 근무에 나오기 전 달군 돌을 옷 안에 넣어서 나왔다. 물론 신병인 이 아이가 그 사실을 알 리 없다.

“속주머니에 바로 넣지 말고, 외투 주머니에 넣어둬라. 화상 입으니까.”

군대는 어디까지나 눈칫밥이다.

뭐든지 일일이 가르쳐주는 선임은 없다. 이 난로 같은 돌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같이 근무를 나가는 선임들은 왜 이 추위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걸까. 처음에는 한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로나메프는 자그마치 1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어째서 화로에 장작이 아닌 돌이 그렇게 많은지.

진작 깨달았다면 그의 왼쪽 새끼손가락은 멀쩡히 붙어있었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꾸벅 고개를 숙인 핀은 양손으로 돌을 감싸 쥐었다.

“너 말이다. 왜 세인트 월로 온 거냐?”

“네? 음, 그야…. 돈 때문입니다.”

“아니, 돈만 놓고 본다면 루드비히 공작령도 있다. 거기에 너는 남쪽 출신이잖아. 굳이 여기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을 텐데.”

제국에서는 세 살배기 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세인트 월이냐. 루드비히 공작령이냐.

직업 병사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는 갈림길이다.

실제로 로나메프도 두 곳 중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했었다.

돈과 근무 여건을 생각하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좋다. 일단 공작령이 따뜻한 제국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도 컸다. 적어도 추위로 고생할 일은 없으니까. 나오는 급여도 루드비히 쪽이 좀 더 세다. 세인트 월에서는 이교도를 죽이면 수급에 따라서 추가 수당이 더 나오긴 했지만, 이는 안정적인 수입과는 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로나메프도 처음에는 루드비히 공작령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들어갈 수 있는 세인트 월과는 다르다. 공작령의 모병은 경쟁률도 높은 편에 속했다.

핀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지원은 해봤는데…. 그게, 떨어졌습니다. 저 같은 아이가 신병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경쟁률이 너무 세더라고요.”

“지금도 그러냐? 내 때도 난리긴 했다만.”

이유는 단순했다.

루드비히 공작령의 병사는 부상자가 극도로 적었다.

비는 자리가 없으니, 병사의 자원을 받을 이유도 없다. 모병해도 그 수는 소수다. 본래 일반 병사는 소모품으로 쓰이는 법이다. 화살받이로 쓰이는 건 기본이고, 사지로 향해지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팔다리 중 어느 한 군데가 불구가 되어서 은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때문에 회전율도 빨랐다. 그러나 공작령에서만큼은 그 법칙이 통용되지 않았다.

마족이 출현한다는 금지된 숲으로 들어가는 건 제국 최고의 기사가 모였다는 사자기사단의 일원뿐. 병사들은 숲 바깥에서 후방을 지원했다. 간혹 몇 안 되는 실력자만이 별동대로 움직이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병사들의 질이 올라가게 되었다.

마족과 대처했을 때,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는 실력자들을 원한다.

“거기에 모험가들이 모여서 만든 도시가 생겨서. 간혹 생기는 자리도 모험가를 쓰더라고요.”

“라베린 도시 말이군. 현상금 사냥꾼 란돌이 정착했다고 들었는데.”

“네. 소문에 의하면 아클레이 모험단과 붉은 꽃의 리안나도 그곳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모양이에요. 덕분에 신입 모험가들이 엄청나게 모이고 있어요.”

“그거 대단하군.”

아클레이라면 마검 중 하나인 섀도우 소드를 다룬다는 모험가다.

모험가임에도 불구하고, 오러를 다룬다는 말이 있는 실력자다. 평민 사이에서는 여러모로 유명한 모험가다. 공화국에서 기사단장으로 초빙했다가 거절당했다든가. 무사 수행이라는 명목 아래 각 기사단의 기사들과 검을 겨뤘다든지. 은퇴한 은둔 기사로부터 검을 배웠다든지.

그 소문은 제국 북부 끝에 자리한 세인트 월까지도 닿아 있었다.

“하지만 신입 모험가들이 모인다고 해도. 제대로 된 돈벌이가 없지 않나? 요 몇백 년간은 마족과 제대로 된 전쟁도 없었을 텐데.”

“맞아요. 그래도 금지된 숲 안에는 마족의 유산이 많이 남아있다는 모양이에요. 운 좋게 유산 하나만 제대로 낚으면 일확천금도 꿈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몇 년 전에 어떤 모험단이 마족의 유산을 찾아서 인생이 완전히 바꿨다는 모양이에요.”

“날고 긴다 하는 모험가는 전부 모였겠군.”

북부는 하루가 멀다고 이교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역시 남부는 상황이 다르다.

황도만 해도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있다고 하니, 제국에서도 이 북부만 분위기가 다른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는 어떤 느낌이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핀의 대답에 로나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을뿐더러. 이교도와 실제 전투를 벌이지도 않았다.

“그래? 그럼 이번이 처음이겠군. 활을 준비해라.”

로나메프는 벽 아래에서 다가오는 검은 점을 가리켰다.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 특징적인 옷은 잘못 볼 수가 없었다.

북부의 이교도, 캘러미티다.

“핀. 사람을 죽인 경험은?”

“동물이라면 사냥해봤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교도는 괴물이라고 생각해.”

로나메프는 메고 있던 활을 핀에게 건넸다.

활을 받은 핀은 망설이듯이 화살을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먹고 활시위를 먹였다. 소년이 받아온 훈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핀은 떨리는 손으로 이교도를 겨누었다.

“할 수 있다면 한 방에 끝내라.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다.”

“…….”

쐐액.

날아간 화살은 이교도의 옆에 떨어졌다. 화살을 보고 놀란 점이 벽으로부터 달아난다. 도망치는 이교도의 모습에 핀은 재차 활시위를 먹였다. 그 손 위로 로나메프의 손이 올라왔다.

“됐다.”

“하지만 아직….”

“죽일 필요는 없다. 정찰을 나온 척후병일 수도 있지만, 캘러미티 중에는 길을 잃고 세인트 월까지 오는 부족민도 있지. 경고만으로도 충분해.”

민간인에게까지 손을 쓸 이유는 없다.

캘러미티가 잔악한 놈들이라 해도 우리까지 그래선 안 된다.

“잠깐만. 경고를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로나메프는 활을 내리려던 핀을 붙잡았다.

달아나던 이교도가 뭔가 당황한 것처럼 머뭇거렸다. 그 앞쪽에서 검은 점이 나타났다.

“어….”

“조금 많군.”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니다.

하얀 설원 위에 검은 자국이 생겨난다. 하나. 둘. 다섯. 열. 수십. 늘어난다. 검은 파도가 끝나지 않는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득 채워가는 이교도의 숫자에 로나메프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빌어먹을. 핀! 망루로 가라! 종을 울려라”

활을 등으로 돌린 핀이 망루로 달려갔다.

이교도의 침공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울리는 곳은 한 군데가 아니다.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가 세인트 월의 병사들을 깨운다. 가장 높이 솟은 망루에서 신비한 빛이 떠올랐다. 마법사들이 상황을 확인한 것 같다. 평소와 같으면 마법 몇 방으로 침공을 막을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런 기대가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숫자다.

세인트 월에서 5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진 그도 이렇게 몰려오는 이교도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미친놈들. 진짜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 건가?”

벽 위로 올라오는 동료들의 얼굴이 보인다.

5분도 안 돼서 준비를 마치고 온 놈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구겨져 있었다.

“뭐야. 대체 무슨 난리야, 이게?”

“설마 저거 다 이교도입니까?”

지금까지 중소규모의 공격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몰려오는 건 처음이다.

화살통에 남은 화살을 확인한다. 망루 위에서 빛이 반짝이고 마나가 한 데 모인다. 혹한의 설원에서 불덩이가 만들어진다. 파이어볼(FireBall). 공격 마법의 기초와도 같은 불덩이가 이교도를 향해 떨어졌다.

타오르는 녀석들의 모습을 가리듯이 벽 위로 소메르 기사가 올라왔다.

“아아, 들리냐. 녀석들아? 또 이교도가 내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수가 많군. 뭘. 놀랄 필요도 없지. 우리가 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다. 저 야만적인 이교도 새끼들이 이 땅을 밟지 못하게 하는 것. 다른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저 미친놈들의 피로 시원하게 목욕을 해보자고!”

“알겠습니다, 대장!”

오, 하고 검과 활을 드는 병사들을 보며 소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 곳곳에서 함성이 울린다. 이곳과 마찬가지로 동료 기사들이 사기를 올리고 있다. 이교도가 몇이 내려와도 이 세인트 월은 함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신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군.”

활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눈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마법사들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지만, 내려오는 이교도의 진격은 끝나지 않는다.

타오르는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녀석들은 계속해서 내려온다. 이교도가 두려운 이유. 그 광기의 편린이 보이는 것 같다.

소메르는 황도가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그 하늘이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자신의 뒤로 드리워진 검은 형체를 보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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