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홀리 나이트(2) (180/200)

 # 180

홀리 나이트(2)

황도 호메르 박물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제국 내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불렸다. 이름 있는 명화와 유물. 조각상을 비롯한 온갖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를 보관하는 아트홀은 반나절을 꼬박 써도 전부 관람하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원래는 31대 여제였던 엘리자베스의 별궁을 개조해서 만든 장소다. 과거에는 황족에게만 공개되었던 별궁이었으나, 지금은 고위 귀족만 출입을 허가하고 있었다.

아트홀은 고요했다.

발소리는 거의 울리지 않고, 오가는 목소리는 조용하다. 소장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관람객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명화를 둘러보던 유피는, 한 조각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우는 것 같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한 여신상.

로휠드의 여신상이다.

“예쁘지?”

“확실히.”

여신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유피를 보며 아리시엘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피의 성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모아놓은 조각상이 많았다.

루미에르 교의 여신상을 포함해서 다른 예술품들도 마찬가지다. 보는 눈만 놓고 본다면 아가씨보다 더 윗선에 있을지도 모른다.

유피는 마조명 아래에서 돋보이는 여신상을 살펴보았다.

조각상은 몸의 굴곡을 비롯해 여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과 모성애를 강조한 가슴. 다산을 상징하는 엉덩이와 유연한 팔목.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여성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여신상의 얼굴은 무결점과 거리가 있었다.

흑요석으로 다듬어진 왼쪽 얼굴은 경건했지만, 오른쪽 얼굴은 소녀와 같이 앳된 느낌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로휠드는 말이지. 천 년에 걸친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예술가야. 그가 말년에 만든 이 조각상은 그의 이름을 따 로휠드의 여신상이라고 불러. 로휠드가 평소 마음속에 그렸던 다프네 여신을 조각한 작품인데. 조각상이 완성되어갈수록 당시의 여제였던 엘리자베스 님의 모습을 닮아갔다는 모양이야.”

“처음부터 여제의 조각상을 남기려고 했던 거 아니야?”

유피의 반문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도 않아. 로휠드에게 조각상의 의뢰를 맡긴 건 루미에르 교단이었으니까.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조각상을 고치려고 했어. 여신에 어울리는 모습을 위해 몸을 깎고, 팔을 다듬고. 머리카락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지.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어. 조각상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여제의 모습을 닮아갔고, 이에 로휠드는 결단을 내리게 돼.”

“여신과 여제의 모습을 같이 담은 거구나.”

“그래. 절충안을 내놓은 거야. 그렇게 만들어진 로휠드의 여신상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최초의 여신상이 되었어. 완벽한 여신의 모습이 아닌, 불완전한 여신의 모습으로. 세기의 천재였던 그도 결국 사랑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거지.”

로휠드의 여신상은 공식적인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어떤 작품도 만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실망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작품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황도를 떠난 그는 죽을 때까지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제국이 낳은 세기의 천재는 그렇게 사라졌다.

지금은 아름답게 보관 중인 여신상만이 로휠드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제국은 정말 마법으로 가득 차 있구나.”

몇백 년이 지났음에도 여신상은 흠집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 시절 그대로의 손길이 아직도 살아있다. 비단 이 여신상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호메르 박물관의 각종 명화와 소장품들은, 보관 상태가 훌륭하기 짝이 없다. 훼손되다 못해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은 동포의 유적과는 다르다.

몇 겹이나 되는 보호 마법과 보존 마법은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을 정도다.

유피도 뛰어난 마법사다. 대충 원리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속해서 마나를 유지하기 위해 마석을 달고, 술식을 고정화한다. 반영구적인 마도구라 보는 게 맞겠지.

서클 마법.

자연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술사의 의지를 실현하는 마법. 일그러짐을 수복하는 억지력을 재차 막아 마법을 유지한다. 불협화음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술식은 부서지지 않는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의도한 현상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자매들이 입을 모아 파괴하는 것 외에는 무용지물이라는 마법이, 이렇게 쓰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도 제국의 저력이라는 거겠지.

여신상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유피는 다른 명화를 향해 나아갔다.

*&*

“진짜 축제 분위기구나.”

가도를 둘러보는 것도 지쳤다.

한 가게로 들어온 세 사람은 과일음료를 들고 있었다. 달달한 사과음료를 입으로 가져간 아리시엘은 반대쪽 테이블에 앉은 사용인들을 보았다. 처음에는 꽤 거리를 두고 잇던 네 사람이었는데, 지금 보니 즐겁게 회화를 나누고 있다.

테이블을 확인해 보니, 이쪽보다 더 먹을 것이 많다.

“우리 아가씨가 훨씬 귀엽거든요!”

“귀엽다, 귀엽다 하는데. 별로 대단한 것도 없네요. 그 정도라면 우리 황녀 전하도….”

이쪽 테이블까지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리시엘이 입을 열었다.

“어째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아?”

아가씨는 어쩐지 심통이 난 듯 싶다.

볼을 부풀리는 아리시엘의 모습에 알베르트가 물었다.

“이곳으로 부를까요?”

“음. 그러면 두 사람에게 미안한데.”

두 사람?

네 사람이 아니라?

“응. 너희 둘.”

“…….”

“…….”

알베르트는 유피와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웃고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의외로 귀엽구나, 너.”

“아닙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뭔가 엄청나게 무시당하는 기분인데.”

아리시엘은 얼굴을 확 찡그렸다.

손이 많이 가는 동생을 보는 듯 유피의 표정이 부드럽다. 아가씨는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둘만 있을 때 알은 어떤 느낌이야?”

“음, 그러네. 그냥 바보지?”

“유피.”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얼마나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유가 느껴지는 유피의 모습에 아가씨는 과일음료를 입으로 가져갔다. 두 발이 허공을 휘젓는다. 성인용으로 만들어진 의자다. 다리를 쭉 뻗어도 그녀의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가게 안쪽에 비치된 수정구 안에서는 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홀리 나이트의 공식 행사가 가깝다. 아직 성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곧 자리에 나오겠지.

광장에 모인 사람들도 별다를 바 없다. 성녀 프랑소와의 모습이 수정구에 비쳤다.

「홀리 나이트를 맞아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성녀 프랑소와입니다.」

성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굉음과 함께 관중이 날아갔다.

“어?”

아리시엘이 바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시야 한 편에서 검은빛의 불길이 보였다. 순식간에 커진 화마는 가게를 무너뜨렸다. 지붕이 떨어져내렸다. 검은 연미복이 시선을 가렸다. 아가씨, 하고 누군가가 소리친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누가 낸 것인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폭발과도 같은 충격에 휩싸인 아리시엘의 의식은 그대로 끊겼다.

*&*

삐- 삐-

거슬리는 이명이 들렸다.

귀가 아프다. 두통 때문에 머릿속이 쿡쿡 쑤셨다.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

“……!”

잡음 사이로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반사적으로 아리시엘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야는 회복되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눈은 검은 인형을 잡을 뿐이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을까. 시계보다 먼저 귀가 본래의 기능을 되찾았다.

“괜--- 신지요, 아가---.”

응,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패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손의 힘을 빌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아갔던 시야가 회복되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다. 알베르트다. 그녀의 집사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가씨?”

“머리가 조금 울리긴 하지만, 괜찮아.”

시야가 어둡다.

잡음처럼 들렸던 소리는 비명이다.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절규와 통증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흙과 재로 범벅이 된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분명 홀리 나이트를 맞이하기 위해 광장에 모여 있었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이런 상황이다. 주변이 온통 불로 뒤덮여 있다. 황도를 감싸던 따스한 빛은 보이지 않는다. 하늘 높이 치솟은 검은 화마가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마린과 루인의 모습이 보인다.

두 사람 다 이 난리통에 휩쓸렸던 건지, 몸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시녀복 사이로 붉은 상처가 나 있다. 상흔을 보고 있는 것은 란랑이라는 의녀다. 소피아는 그런 그녀를 지키듯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공격당했습니다.”

“누구에게?”

“놈들이야.”

유피는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불타는 거리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프네 신전이 자리 잡은 곳이다.

황도를 뒤덮은 검은빛은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신석의 따스한 빛이 아니다. 이 불쾌한 냄새를 자아내는 것은 마기다.

“몽환기를 다룬 게 아니야. 신석을 이용했어. 지옥도를 불러오는 매개체로 신석을 고른 거야.”

양양에서 일어났던 지옥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황도 전체를 먹어치운 불길도 그렇지만, 곳곳에서 차원의 틈이 열리고 있다. 불안정한 마나 탓이다. 서클 마법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던 황도는, 지옥도를 불러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공간이 비명을 지른다. 차원의 문을 찢고,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세상을 침범한다.

이형의 악마가 군중 위로 떨어졌다.

녀석의 체중을 견디지 못한 지면이 박살 났다. 창백한 발아래로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짓밟혔다. 과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붉은 핏방울이 흩날렸다. 낭자한 피가 발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균형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은 망연히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입이 있다.

창백한 입이 찢어진다. 놈은 멍하니 선 사람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수십 명은 될 것 같은 군중이 악마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우드득.

뿌드득.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미처 다 먹지 못한 육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리시엘은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그 파편을 보았다. 로사리오다. 붉은 핏자국으로 물든 로사리오를 꼭 쥔 작은 손이 그곳에 있었다.

“…….”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을 수 없다.

그녀가 헛구역질을 시작한 순간, 알베르트의 신형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몸을 움직인 집사는 악마의 앞에 나타났다. 언제 꺼낸 것인지 그 손에는 서릿발이 흩날리는 얇은 도검이 잡혀있었다. 입이 열린다. 피가 흥건한 그 안에는 붉은빛으로 물든 눈이 있었다.

외눈이 알베르트의 모습을 놓쳤다.

녀석이 입을 돌리기 무섭게 어깻죽지가 날아갔다.

「---!」

일섬.

검은 피가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얼어붙었다.

월아의 한기가 내부를 파고든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놈을 알베르트는 용서하지 않는다. 발작적으로 휘둘러지는 손을 피한 그는 두 다리를 베어 넘겼다. 육중한 몸이 무너진다. 지면과 그대로 충돌한 녀석의 뒤를 잡는다. 울퉁불퉁한 등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났다. 가시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것 같다. 순간적으로 적대자의 위치를 파악한 가시가 일제히 사출됐다.

화살 비와 같은 그 가시를, 알베르트는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떨쳐냈다.

무명검법

격(擊)

검기가 남는다.

악마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내용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월아의 한기에 먹혀버린 악마의 시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놈의 움직임이 멎은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검을 갈무리했다.

“아가씨.”

“우, 우으….”

알베르트가 건네는 손수건을 잡을 정신도 없다.

위액이 역류한 목이 아프다. 따끔거리는 통증에 아리시엘은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아가씨의 등을 쓰다듬으며 알베르트는 주변을 확인했다. 몸을 수습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악마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 육신을 빌어 강림하고 있다.

검게 물든 하늘이 찢어졌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악마가 황도로 ᄄᅠᆯ어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황도에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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