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홀리 나이트(1) (179/200)

 # 179

홀리 나이트(1)

일찍이 다프네 여신은 혼돈밖에 없는 세상을 정화하는 데 5일이 걸렸다고 한다.

정화한 세상 속에서 빛으로 세상을 빚어내는 데 다시 5일이. 총 10일에 걸쳐 세상을 새로 창조한 여신은 그 이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으니, 이가 바로 오늘날의 홀리 나이트다.

홀리 나이트가 다가오면 루미에르 교의 신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고, 제국 곳곳에서는 작고 큰 행사가 열렸다. 그 대부분은 이 신성한 날을 기리기 위해 조용히 진행되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렇지도 않았다.

홀리 나이트 이브.

아리시엘은 알베르트가 받아온 소책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종이의 질은 그리 좋지 않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책자는 뻣뻣하고 인쇄된 글자도 부자연스럽다. 미미하게 마나가 어려있는 것을 봤을 때 마탑에서 나온 물건이다. 고위 귀족들에게만 나눠줬다는 이번 홀리 나이트 기간의 축제 스케줄이다.

어느 거리에는 무슨 축제가 있고.

어느 시간대에는 특별 행사가 있고.

그곳에서 볼만한 것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가게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 단조로운 글씨가 소책자에는 빼곡하게 차 있었다.

과연 루미에르 교의 총본산이 있는 황도라 할만하다.

기념일을 간소하게 치르는 공작령과는 달랐다. 눈으로 좇고 좇아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행사의 수가 많았다. 소책자를 쭉 살펴본 아리시엘의 눈이 반짝였다.

모처럼 마탑에서 받은 휴일이다.

즐기지 않으면 그녀만 손해겠지.

“알.”

“네, 아가씨.”

소파에 누운 채 아리시엘은 손을 들었다.

알베르트는 통 안에서 마카롱을 꺼내 쥐여줬다.

“알.”

“네, 아가씨.”

이번에는 스콘이다.

혹시 목에 걸리지는 않을까 불안한 점이 있지만, 바삭한 것보다 부드러움을 중시한 스콘이다.

입안에서 부서지는 달콤함에 아리시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늘어져 있는 거야.”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유피는 한심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소파 바깥쪽으로 머리를 내린 아리시엘은 유피를 봤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 속에서 못마땅한 그녀의 시선이 보였다.

“부러워?”

“누가 부럽다는 거야.”

“여자의 질투는 추하네.”

“……. ”

상대하는 것도 지친다는 듯 유피는 자리에 앉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건 그녀만이 아니다. 란랑과 소피아도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린과 루인이 손님 대접을 위해 발을 옮긴다. 알베르트는 유피 몫의 잔을 채웠다.

“자, 유피.”

“스콘은?”

“응?”

“그거. 내놓으라고.”

유피는 아가씨가 먹고 있던 스콘을 가리켰다.

“이건 아가씨 거야.”

“아, 그래? 아가씨는 되고 난 안 된다는 거지?”

“…….”

유피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살짝 화가 났다는 듯 눈꼬리가 올라가 있다. 알베르트는 곤란하다는 듯 아가씨를 보았다. 스콘을 입에 문 채 우물거리던 그녀는 말했다.

“줘도 좋아. 대신 맨 입으로는 안 돼.”

“좋아. 이번에는 내가 양보할게.”

유피는 스콘을 쥔 알베르트에게 다가갔다. 앙, 하고 스콘을 입으로 받은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낸 유피는 입을 열었다.

“맛있네. 네가 만든 거지?”“눈썰미가 좋다니까.”

“이럴 때는 미각을 칭찬해줘.”

눈웃음이 아름답다. 그녀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뭔가 들어온 이야기는 없어?”

“아쉽게도. 아직은 기다려야 될 것 같아.”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유피가 바라는 정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상황은 생각한 것보다 전전이 없었다.

오늘 아가씨에게 휴일을 준 대마법사 카라스는 교황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교황이 있는 곳은 다프네 신전이다. 홀리 나이트를 준비하기 위해서 대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성녀는 교황의 움직임이 불온하다고 했으나, 사실 그것도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교황의 행적을 추적하되, 성녀 또한 경계해야 한다.

황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성녀의 말과 달리 황실기사단은 블러드 트리를 들락거리고 있었다. 루센 지구와 지하를 수색하는 걸 봤을 때 그들 나름대로 조사에 진척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녀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물론 성녀도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겠지.

서로 보여주는 것은 한정적이다.

그 한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서로를 이용할뿐이다.

“또 일 이야기야? 내일이 바로 홀리 나이트잖아. 그러지 말고 어디로 놀러 갈지나 정하자. 조금 있다가 로휠드의 여신상에서 유랑극단이 공연을 시작한다는 모양이야. 지금 준비해서 나가면 시간에도 여유가 있으니까. 적당한 카페에서 핫케이크랑 차를 들면서 기다리는 거야.”

“철 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 홀리 나이트는 너희 제국에게는 특별한 기념일이라면서. 적이 움직이기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무언가 있다고 하면 그건 오늘, 혹은 내일일 가능성이 크겠지.

불꽃을 쏘아올릴 날로는 안성맞춤이다.

“그러면 뭐해. 성녀님이 그러셨다면서. 어차피 폭풍이 오는 건 막을 수 없다고.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폭풍을 저지할 수 없다면, 폭풍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는 게 맞잖아.”

“마음 편해서 좋겠네, 넌.”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그래. 오기 싫으면 말아.”

소책자를 쥔 아리시엘은 몸을 일으켰다.

누워있던 자리가 불편했는지, 목 뒤쪽을 부드럽게 만진 아가씨가 말했다.

“외출 준비해, 알. 홀리 나이트 탐방이야!”

“알겠습니다, 아가씨.”

알베르트는 짐을 챙겼다.

여기서 전전긍긍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가씨의 제안대로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괜찮겠지. 무엇보다 황도로 올라온 이후 유피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피는 석연찮은 듯 표정을 찌푸렸다.

“알.”

“가자, 유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니까. 캘러미티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데, 관광이나 하고 있겠다는 거야?”

“이전에 낙양에서 했던 말 기억해? 조금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같이 둘러보고 싶은데.”

“…….”

무슨 말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황도를 소개해주겠다는 알베르트의 말을 떠올렸다.

“치사하구나, 너.”“너에게만 그래.”

“별로 안 기쁘거든.”

살짝 얼굴이 붉어진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거리로 나갈 거야. 준비해. 란랑, 소피아.”

*&*

홀리 나이트 이브를 맞이한 황도는 축제 분위기에 들어서 있었다.

가도를 오가는 인파 사이로 아리시엘이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뒤에서 따라가던 유피였지만, 이내 그녀의 옆에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말없이 알베르트가 따르고 있었다.

란랑과 소피아는 앞에서 걸어가는 세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소피아는 홀리 나이트를 맞아 화려하게 꾸며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로수는 물론이고, 상점가도 아름다운 장식이 가득했다. 문 앞에는 홀리 나이트의 기념품들이 나와 있고, 점원들이 호객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꽃을 파는 소녀들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성가가 거리 곳곳에서 울리고, 시종을 데리고 나온 귀부인들이 그사이를 우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공화국이 실용적인 느낌이라면, 제국은 화려한 느낌이네. 뭔가 반짝거리는 것투성이야.”

“그만큼 사치를 좋아한다는 거겠지. 신석이 비호하고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어. 이게 우리로부터 뺏어간 거짓된 영화지.”

“나도 제국을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란랑은 정도가 심하네.”

“네가 이상한 거야, 소피아.”

“알베르트 오빠는 좋아하면서.”

“그 남자는 예외야.”

연 제국의 신민이라면 델리아 제국을 좋아할 수 없다.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란랑은 제국의 일에 이렇게 나서는 황녀 전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가 잘 되어서 휴전을 맺는 쪽으로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그 적개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성녀로부터 신석의 진실을 들었음에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뚱한 친구의 모습에 소피아는 볼을 긁적였다.

“네 마음도 이해해. 그렇지만 다 지나간 이야기잖아. 그 이후로 우리는 계속해서 제국과 싸워왔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죽이고 목숨을 빼앗았어. 얼마나 많은 피를 봤다고 생각해? 그 피가 또 다시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불러왔어.”

“그건 제국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안 죽었을 것 같아? 애초에 제국이 시작하지 않았으면, 이런 상황까지 올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끊어야 한다는 거야. 누군가 그 사슬을 끊지 않으면 제국과 우리는 계속해서 반목할 거야. 그 끝에 뭐가 있을 것 같아? 누가 이겨도 미래는 없어. 결국, 공멸할 뿐이지. 네가 자주 이야기해줬잖아. 아무리 대국(大國)이라도 전쟁을 지속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전부 멸망한다고. 지금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지만, 우리가 제국과 얼마나 싸워왔다고 생각해? 무려 천 년이야. 땅은 피폐해졌고, 나처럼 빈민가 출신의 동포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어.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도 이제 한계에 가까워.”

“알았어. 그만해. 나도 이게 그냥 고집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투정 정도는 부려도 되잖아? 왜 우리가 피의자에게 직접 손을 뻗고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 건데?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잖아.”

“그게 세상이라는 거잖아. 불합리하더라도 전부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녀의 대답에 란랑은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철 없는 친구라고 생각했더니, 이제 보니 철이 없던 것은 자신이었다.

“근데 참 이상하네. 이 시기면 이신설교의 성례식(聖禮式)과도 겹치는 기간이야.”

“성례식? 그 이상한 행사 기간 말이야?”

“이상하다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성례식은 달토끼님이 하계로 내려온 성일(聖日)이야. 10일에 걸쳐 천지신명을 일깨우고, 세상을 조화롭게 이끈 특별한 날이야. 루미에르 교도 비슷한 기념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소피아는 소녀가 안겨준 꽃을 가슴팍에 달았다.

꽃 옆에는 로사리오와 꼭 닮은 호패가 흔들리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신기하네.”

“정말로 우연일까? 있지. 너희 생각은 어때?”

란랑은 곁에서 걷고 있던 두 시녀를 보았다. 쌍둥이 자매, 마린과 루인이다.

“그쪽도 비슷한 기념일이 있어? 음, 애초에 너희가 종교도 있던 거야?”

“물론이에요. 이신설교라고 해서 달토끼님과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마린. 죄송합니다. 아가씨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이야기라면 일이 끝난 후에 나눴으면 좋겠군요.”

이야기를 끊은 루인은 동생의 손을 잡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한기가 날리는 그 태도에 란랑은 얼굴을 찌푸렸다.

선두에서 걷는 아가씨와 거리를 둬야하기 때문일까, 금방 두 사람을 따라잡은 란랑이 말했다.

“같은 사용인끼리 그럴 거야?”

“맞아. 같은 사용인끼리 이럴 거야, 언니?”

“조용히 하렴, 마린. 우리는 루드비히 가문을 대변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황도에서 우리를 보는 눈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아야 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기분 가는대로 여행을 나온 그쪽 아가씨와는 달라.”

“그쪽 아가씨? 설마 황녀 전하를 말한 거야?”

황당하다는 듯 란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로 조심성이 없네요. 탁 트인 장소에서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사용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용인이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조언해줘서 고마워요?”

“너 바보야? 지금 우릴 무시한 거잖아.”

소피아는 에이, 하고 털털하게 웃었다.

“란랑은 매사에 딱딱하다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자, 그러지 말고. 두 사람 다 이리로 와요. 아가씨들도 먹기 시작했는데, 우리도 고기 꼬치나 사먹게요.”

“소피아.”

속도 좋다.

친구의 목소리에도 소피아는 꼬치 가게로 향했다. 황녀 전하에게 받은 돈도 있겠다. 조금 사치를 부려도 괜찮겠지.

“일하는 중입니다. 사양하겠습니다.”

“맛있게 먹을게!”

“마린!”

언니의 손에서 벗어난 마린은 소피아를 따라 꼬치 가게로 갔다.

가게 앞에 선 두 사람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 같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꼬치를 고르던 마린과 소피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란랑과 루인은 한숨을 쉬었다.

“잠시 쉬었다 가자.”

“어쩔 수 없군요.”

네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긴 것은, 각자 꼬치를 3개씩 먹은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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