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대마법사 - 카리스(1) (176/200)

 # 176

대마법사 - 카리스(1)

대마법사 카라스.

마도를 탐구하는 자 중에서 그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는 없다. 미지를 나아가는 자. 마도의 끝을 보는 자. 마탑에서 배출한 세기의 천재. 제국이 자랑하는 굴지의 마법사인 그는 혼자서도 수십의 군단을 대신한다는 실력자다.

“하지만 진짜 은둔자야. 방구석 폐인이라니까.”

“공방에서 마도를 연구하는 건 어떤 마법사라도 마찬가지야. 몇 년 동안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건 욕을 할 게 아니라 감탄해야 할 일이야. 생각해 봐. 그 좁은 곳에서 마도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는 거야.”

“같은 마법사라고 편을 드나 보네. 이러니 마법사들의 평판이 안 좋지.”

“그 마법사를 목표로 하는 아가씨가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네.”

유피의 대답에 아가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불만 가득한 시선이 알베르트를 향했다. 왜 그녀를 마탑까지 데려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휴게실에는 세 사람 외에도 삼삼오오 모인 마법사들이 많았다. 가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날아왔지만,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카라스 님을 만날 생각입니다.”

“카라스 님을? 약속이라도 잡은 거야?”

“지금부터 잡으러 갈 생각이야.”

“불가능해.”

아리시엘은 단언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카라스 님은 저 위에서 안 나온다니까. 얼굴 한 번 비추질 않아.”

“그래서 내가 온 거야. 이런 미끼는 대마법사도 처음일 테니까.”

유피에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도를 탐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신비를 향한 욕심. 미지를 탐구하는 학구열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대단한 자신감이네.”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나 봐? 하지만 곧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네가 마도를 알게 되면 말이야.”

무슨 소리냐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아가씨의 눈에 유피는 말했다.

“카라스의 공방은 최상층이라고 했지? 따라와. 너도 같이 가자.”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는데.”

“빼지 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만나보겠어?”

“그야 아쉬운 사람이 만나러 오겠지. 가자, 알.”

자리에서 일어난 아가씨는 집사를 불렀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같이 가 볼 생각입니다. 유피를 혼자 보내기에는 불안해서 말입니다.”

“핑계도 가지가지네. 그냥 함께 가고 싶은 거잖아.”

알베르트의 뒤쪽에서 유피가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찻잔을 드는 모습이 우아하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이 완벽한 집사가 반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모셔야 할 아가씨와 연인이 같이 있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는 전자다. 알베르트는 집사니까. 적어도 아리시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은 나랑 유피랑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 구해야 한다면 누굴 구할 거야?”

“두 사람 다 구하겠습니다.”

“재미없는 대답을 하고 있어.”

아가씨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가씨가 저한테 하신 질문은 아버지랑 어머니 중 누가 더 좋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도 있는 법이죠.”

“재치 있는 대답이네, 알. 꼬맹이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야.”

“누가 꼬맹이라는 거야? 다 큰 레이디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은 당신뿐이야, 유피에르.”

“누가 레이디라는 건지. 나가서 사교회에 데뷔부터 하고 와. 그럼 인정해줄게.”

“알. 넌 정말로 이런 성격 나쁜 여자가 좋은 거야?”

“귀엽지 않습니까?”

“…….”

알베르트의 대답에 아리시엘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대화 어디에 귀여운 구석이 있다는 말인가? 그냥 사람을 괴롭히고 있을 뿐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진 유피도 유피다.

믿을 수가 없어.

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이리 변해버린 걸까. 잠시 유피를 노려보던 아리시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가자. 가.”

알이 더 망가지기 전에 내가 지켜야겠다.

완전히 풀려버린 집사의 얼굴을 지켜보던 아가씨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

마탑 최상층 바로 아래에는 대마법사 카라스의 공방이 있었다.

하늘과 가장 가깝다고 거론되는 그곳에 세 사람은 서 있었다. 총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물론 만날 수 있는가, 만날 수 없는가는 카라스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검은 색조가 감도는 문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정공법으로 가 볼까.

알베르트는 문에 노크를 넣었다.

똑똑.

“카라스 님. 루드비히 가의 집사인 알베르트라고 합니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듣지 못한 건 아닐까. 알베르트는 한 번 더 노크를 넣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봐. 그렇다니까. 총장님이 불러도 그대로라고 했어.”

“비켜봐.”

앞으로 나온 유피가 문 위로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빛 마나가 반짝였다. 문의 잠금을 해제하기 위해 술식이 펼쳐지는 순간, 문 위에서 갈색빛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퉁!

유피의 손이 튕겨졌다. 손가락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렸다.

“과연 대마법사라는 말은 허명이 아닌가 보네.”

문 위에 떠 오른 마법진을 본 그녀는 감탄사를 발했다.

겹쳐진 마법진의 숫자는 세 개. 마나를 넣은 순간 반응한 술식은 다섯 개다. 만약 눈에 보이는 술식만 해제하고, 문을 연다면 남은 두 술식이 침입자를 용서치 않겠지.

“억지로 들어갈까?”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다.”

유피와 아리시엘의 목소리가 겹쳤다.

은빛 마나가 춤을 춘다. 짜아 올려진 실이 손의 형태를 취했다. 문 위로 드리워진 은빛의 손은 마법진을 만지기 시작했다. 최상단의 마법진. 잠금 마법이다. 해제. 최하단의 마법진. 경고 마법이다. 해제. 정중앙의 마법진. 다른 술식의 강화다. 역시 해제.

문제는 남은 두 마법진이다.

아마도 카라스 본인이 심혈을 기울인 술식. 천천히 탐색한다. 아무리 유피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서클 마법은 그녀가 다루는 마법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손을 잘못 댄다면 역으로 위험할지도 모른다.

갈색빛의 마법진이 은빛으로 물든다.

바깥쪽부터 천천히 퍼져나가는 빛이 아름답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시엘이 말했다.

“바로 해제하지 않는 거야?”

“단계를 차례대로 밟아가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야. 술식이 폭주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앞의 세 건은? 단계를 밟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보는 것만으로도 분석할 수 있었으니까.”

“이것도 간단하잖아? 문은 더미고, 진짜는 저기 있잖아.”

“뭐?”

유피가 반문했다.

저기, 하고 아리시엘은 위를 가리켰다. 마탑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어 보인다. 비정상적으로 마나가 많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특수한 마도구가 달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또 날 놀리는 거야? 샹들리에 근처만 찢어지는 비명이 나잖아.”

“소리? 어떤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너도 안 들려? 거짓말하지 마. 저렇게 시끄러운데. 안 들리는 게 이상하잖아.”

“…….”

넌지시 아리시엘을 바라보던 유피는 마나를 거두었다.

문에서 떨어진 은빛 손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샹들리에를 향해 솟구쳤다.

충돌한다.

샹들리에는 깨지지 않았다. 바로 그 직전, 천장 아래에서 커다란 눈이 나타났다.

깜박, 깜박하고 눈이 징그럽게 움직였다.

「제법이군. 꽤 쓸만해. 설마 문의 기믹을 내 제자도 아닌 술사가 깰 줄은 몰랐네.」

“네가 카라스인가? 당신에게 볼일이 있는데. 문 좀 열어줄 수 있을까?”

「특이하군. 서클 마법이 아니야. 술사의 의지로 자연을 꺾은 게 아니라 술사의 마나를 그사이에 끼워 넣다니. 흥미로워. 레이디는 혹시 엘프인가?」

“이야기는 안쪽에서 나누고 싶은데.”

「좋다. 문의 술식을 깬 보상이다. 들어와라.」

술식이 해제된다.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세 사람은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카라스의 공방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개방된 창 한쪽이 바깥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방이 밝은 이유는 신석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탓이다. 마법사의 공방이 이런 형태인 건 처음 본다.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리시엘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서들이 꽂혀 있는 책장과 시약병. 책상 위에 쌓인 마법서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소파 쪽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새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마주쳤다. 장식과도 같던 그 눈이 갑자기 깜박였다.

“손님이다! 손님이다!”

새의 부리가 열리며 목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아리시엘이 알베르트의 소매를 잡았다.

“까, 깜짝이야.”

“까마귀…….”

유피는 복잡한 시선으로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세실리아가 떠오른 탓이겠지. 그녀의 언니가 쓰던 사역마도 까마귀였으니까.

빛이 잘 드는 위층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

다듬어지지 않은 긴 갈색빛의 머리.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잠에 겨운 눈을 하고 있었다. 졸린다는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카라스 크로만이다. 이 비좁은 곳에 숙녀가 두 분이나 방문할 줄이야. 빈자리에 적당히 앉게나. 손님을 맞이한 적이 없어서 자리가 있을련지 모르겠군.”

공방은 잡다한 마도구가 가득했지만, 다행히 소파에 앉을 자리는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이 앉는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뒤로 가 자리를 잡았다.

“유피에르 바토리야.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네, 대마법사 카라스.”

“바토리, 바토리인가……. 미안하군. 레이디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군.”

말과는 달리 미안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마법서를 한쪽으로 치운 그는 책상 너머에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특이한 술식을 구사했지. 그건 서클 마법이 아니야. 정령 마법의 일종인가?”

“멋대가리 없는 사람이네. 레이디가 둘이나 왔는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다니. 차라도 한 잔 대접해주면 안 될까?”

“귀찮군. 피차 그런 건 중요치 않을 텐데. 적당히 거기에 있는 걸 마셔라.”

알베르트는 주전자를 확인했다.

뚜껑이 덮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불쾌한 냄새가 올라왔다. 곁에 있던 아가씨도 그 냄새를 맡은 건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내용물은 썩어 있었다.

알베르트는 주전자의 물을 비웠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새로 타겠습니다.”

“그래 주면야 고맙지.”

잠시 후 공방 안에는 홍차 향이 올라왔다.

아가씨의 차에는 각설탕을 다섯 개. 유피의 차에는 각설탕이 세 개. 카라스에게도 권했지만, 그는 마시지 않겠다는 듯 손을 저었다.

“제국 출신이 아닌 모양이군.”

“왜 그렇게 생각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 나는 자네와 같은 인종을 잘 알지. 과정의 설명은 이해가 부족한 이들에게나 필요한 거야. 자네와 나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지.”

“마치 당신이 천재라는 것처럼 말하네.”

“범인들에 비하면 뛰어나지. 그건 부정할 수 없어. 그렇지만 천재는 아니야. 그것들은 이해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어. 정말로 불합리한 존재지.”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카라스의 어깨에 앉은 녀석은 발로 부리를 매만졌다.

“스승님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위나 바토리. 세실리아 아그리파.”

“역시나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되는군. 아직도 내가 모르는 은둔자가 이 대륙에는 남아 있는 모양이야. 세상은 넓군. 정말로 넓어.”

“당연한 걸 말하네. 우리는 모두 마도의 끝을 보는 것이 목적인 족속이야. 속세의 위명에 연연하는 사람은 없어.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그저 곁에 있는 이들이 알아봤을 뿐이지.”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 레이디. 그래. 주변이 알아봤을 뿐이야. 나는. 아니, 우리는 마도를 탐구하는 것 외에는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망가진 족속들이니까.”

유피는 잔을 입으로 옮겼다.

메마른 입술을 적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가 다루는 술식은 세계수의 지혜를 빌리는 마법이야.”

“세계수? 성역에 있다는 전설의 나무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피의 손에서 은빛 마나가 흘러나왔다.

10개의 원.

세계수를 닮은 마법진이 그녀의 앞에 떠올랐다.

“그래. 서클 마법과는 다르지. 제국이 구사하는 마법은 기본적으로 술사의 의지를 구현화 하는 마법이니까. 반면, 우리는 달라. 세계수는 무엇보다 세상의 조화를 우선시하니까. 구축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아. 그 질서의 구조를…….”

“파악해서 역으로 술사가 바라는 바로 이끈다는 거군. 놀랍군. 그런 일이 가능하다니.”

피곤해 보이던 눈에 활력이 돌아왔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본 어린애처럼 그 눈이 반짝였다. 카라스는 원을 따라 이어지는 마나의 선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는지, 손끝에서 갈색빛의 마나가 흘러나온다. 그 모습을 본 유피는 마법진을 거뒀다.

“보여주는 건 여기까지. 당신 정도의 마법사라면 충분했겠지?”

“감사의 말을 표하겠네, 레이디.”

카라스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마법진을 머릿속에 그려 넣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했다. 남은 건 이 마법진의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해나가면 된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마법사로서의 나는 레이디를 환영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자유로운 신분과는 거리가 있어서 말이지. 이제 말해주겠나? 마족이 이 몸에 무슨 볼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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