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마녀와 성녀(2)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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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성녀(2)

유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웃기지도 않는 여신 타령인가.

“그런 형편 좋은 말은 아무래도 좋아. 더 정확한 물증은 없는 거야?”

“여신님의 말씀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반대로 묻고 싶군요. 당신도 여신님의 은혜를 입고, 그 힘을 다루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물음을 던지는 거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군요.”

“…….”

안 되겠다. 그녀와 이야기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고방식이 다르다.

질렸다는 유피의 시선에 알베르트가 이야기를 받았다.

“성녀님. 그럼 소재를 알고 있는 다른 분은 없는 겁니까?”

“글쎄요.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셀렌느 후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남자도 헤매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황도에 캘러미티가 없는 걸지도 모르죠.”

“황실이나 다른 귀족분들은?”

“알고 있다 해도 대답해줄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애초에 황실은 이번 사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제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여주니, 방비라면 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황도의 수비대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블러드 로열을 수비하는 상비군은 적지 않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부대의 이름을 거론한다면 황실기사단. 마도병단. 루미에르 교의 성가대. 신전기사단. 지금 이곳에서 연 제국과 전면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몇 달은 버틸 수 있는 비축물자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병사가 많다 한들 황도는 그들 전원이 싸울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폭풍의 규모가 압도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겠지요. 저희의 힘만으로는 잠재울 수 없습니다.”

“악마라도 강림하나 보네.”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성녀의 대답은 침착했다. 밀크티를 입으로 가져간 유피는 말을 이었다.

“이곳에 지옥도가 재현된다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겠어.”

“연 제국에서 나타난 지옥도를 막은 게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나 혼자서 한 게 아니야. 만약 이곳에 지옥도가 펼쳐진다면 나 혼자서는 막을 수 없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유피에르 바토리.”

“뭐야, 설마 성녀인 네가 거들어줄 생각이야?”

“그렇습니다.”

“…….”

잠시 말문이 막혔던 마녀는, 이내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단순히 신성력을 보태는 것만으로는 지옥도를 막을 수 없어. 성녀는 지옥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다른 세상을 현세에 끌어온다는 개념이죠. 얕보지 말아 주세요, 마녀. 루미에르 교는 당신들의 생각보다 악마에 대해 훤합니다.”

“그래, 잘나신 루미에르 교는 우리를 악마로 취급했으니까 말이야.”

“과거에는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까? 마왕의 영향력에 노출된 마족은 진짜 악마에 가까웠습니다.”

“애초에 그 원인을 준 게 누구라고 생각해?”

적의 어린 시선이 성녀를 향했다.

“평화로운 우리 세상에서 신석을 훔쳐간 건 제국이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 물론. 그랬겠지. 신석이 주는 힘이 아니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다릅니다, 유피에르 바토리.”

바깥에서 들어오는 신석의 빛을 보며 프랑소와가 대답했다.

“마족들의 무분별한 사용 때문에 당시의 마정석은 이미 한계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와 성녀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당신들의 세상은 그대로 멸망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저희 제국마저 멸망의 길로 들어섰겠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소파에 앉아 있던 란랑이 귀를 쫑긋 세웠다.

“조금 전 지옥도에 관해 이야기했었죠. 그 모습 또한 마정석의 힘을 함부로 다룬 결과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사용법은 마정석으로 하여금 세상의 균열을 무너뜨리게 하죠. 공간의 틈이 갈라지고, 차원이 무너지면서 불완전한 공간을 만드는 겁니다. 시공간의 균형이 무너진 장소. 죽음의 바다 너머에 있는 안개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끝.”

“당신들은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군요. 만약 마정석을 그대로 방치해뒀다면 연 제국은 전부 세상의 끝으로 변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이윽고 대륙 전체로 퍼졌겠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당신들이 갖고 있던 두 번째 마정석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 끝에 무엇이 강림했는지 저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부작용을 완화해서 만든 것이 현자의 돌이죠.”

“…….”

정곡을 찔린 걸까. 말문이 막힌 유피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이 사실을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죠. 그래도 짚고 가야 할 건 짚고 가야겠죠. 제국을 대신해 성녀 프랑소와가 사과드립니다, 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

“…….”

성녀는 마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고개를 드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사과를 받아들여 줄 때까지 성녀는 얼굴을 숙일 생각인 것 같다.

그저 말뿐만인 사과다.

현 황제가 하는 사과도 아니고, 교황도 아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성녀가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사과는 말이 아닌 방향성이야. 그런 말 몇 마디로 그간의 원한이 사라질 거로 생각해?”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을 들여 연 제국이 저희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침착한 성녀의 대답에 쯧, 하고 유피는 혀를 찼다.

“여기서는 아무 소용 없어. 사과를 하고 싶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해.”

“물론입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유피를 대신하듯이 란랑이 물었다.

“잠깐만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처음부터 밝히지 않고 훔치러……. 아니, 그런 희생을 내면서 가져간 거죠?”

그녀의 일족인 치우는 한때 신석을 보호했던 이들이다.

납득할 수 없다는 소녀의 물음에 성녀가 대답했다.

“접촉이라면 이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정석을 보호하는 일족은 대화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전승이 맞다면 악을 베어내는 성검이 있으니, 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당시의 마정석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우리의 선조는 강경책을 택하게 되었고, 이후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대로입니다.”

“확실히 수상한 서역인이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현재 황도를 보호하는 마정석은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끌어왔지만,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거겠죠. 걱정하지 마시길. 문제가 되기 전에 확실하게 처분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서 폐하와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정석이 없으면 혼란이 생겨나겠지만, 지금의 제국이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프랑소와는 밀크티를 입으로 가져갔다.

마른 입술을 적신 그녀는 유피를 응시했다. 생각의 정리가 끝난 건지 마녀는 입을 열었다.

“신석의 비호가 없다면 제국은 우리와 싸우기 벅차겠네.”

“그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희도 예전과는 다릅니다. 마정석의 힘이 없다 해도, 당신들과 싸울 전력은 충분합니다.”

“이길 거로 생각해?”

“적어도 지지는 않겠죠.”

프랑소와의 대답은 자신만만했다. 성녀를 바라보던 유피는 그런가,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북부의 화근거리를 먼저 제거해야겠네.”

“우리의 싸움에 악마를 불러올 이유는 없으니까요.”

“좋아. 일시적인 휴전이야.”

“영구적인 평화로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그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또한 사실이죠.”

“교황의 뜻은 어떤데?”

성녀의 뜻을 제국의 의향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애초에 교단의 뜻을 대변하는 것도 교황이다.

“비오 교황 말인가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마정석을 처분하는 일이 지금까지 밀려난 것은 그 남자 탓입니다.”

“그 남자?”

무심코 알베르트가 반문했다. 성녀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감히 여신님의 목소리를 더럽히고, 교단을 그릇된 길로 이끌어간 것은 교황들입니다. 신성한 사명을 외면하고, 교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른 그 남자를, 저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추적해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최근 교황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런가, 교황은 부재중이라. 그 남자가 캘러미티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접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셀렌느 후작에게 의뢰해뒀지만, 보다시피 일손이 부족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마탑에 추적을 요구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그곳에는 카라스 님이 계시니까요.”

“제국의 대마법사 카라스. 그는 공방에서 안 나온다고 들었는데.”

“마녀인 당신이 간다면 칩거를 깨겠죠. 그대가 다루는 마법은 분명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마법사라면 그 유혹을 거절할 수 없다.

마도의 탐구. 그곳에 이르는 길은 헤아릴 수 없다.

“꽤 괴팍한가 보네.”

“마법사란 그런 족속들이니까요. 당신도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어머, 난 꽤 정상인데?”

“원래 정상이 아닌 사람은 그렇게 말하는 법이죠.”

“…….”

“…….”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어떡하지. 난 널 좋아하긴 힘들 것 같아, 성녀.”

“우연이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녀.”

이런 의견이 맞아봤자 별로 기쁘지 않다. 프랑소와는 손을 들었다.

뒤에서 대기 중이던 레이첼이 함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카라스 님을 찾아가면 이 물건을 보여주세요. 성녀인 제가 감정을 의뢰했다고 말하면 귀찮아하면서도 챙겨줄 겁니다.”

“어떤 물건인지 봐도 될까?”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첼은 함을 열었다.

함 안에는 낡은 그릇이 있었다. 그 그릇을 본 유피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몽환기?”

양양에서 지옥도를 불러왔던 마도구가 그 안에 있었다.

*&*

“어떻게 생각해, 알?”

다프네 신전에서 나온 유피가 물었다.

그녀는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로 교황이랑 사이가 틀어진 걸까?”

“루미에르 교단의 성녀와 교황이 반목하는 건 몇몇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건 믿어도 괜찮아. 본래 교황 측의 세력이 훨씬 커서 성녀는 억눌리는 쪽이었는데, 이번 대는 다른 것 같아.”

“그런 내부 사정을 외부인인 우리에게 밝힌다고? 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유피는 외부인이 아니잖아.”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엄연히 성녀의 것이다. 그들로서는 유피의 존재가 곤란하기 짝이 없으리라. 만약 오늘 자리에 나온 것이 프랑소와가 아니라 비오 교황이었다면, 이야기가 이렇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끌어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뱉어낼 수도 없는 사람이 바로 그녀겠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적어도 저쪽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여신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이야. 선녀님도 그러셨잖아.”

이신설교의 선녀였던 한소망을 거론하자 유피는 얼굴을 찌푸렸다.

“선녀랑 성녀를 같은 선상에 두고 싶지 않은데. 나는 저 여자가 고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처음 선녀를 봤을 때도 그랬잖아. 성녀도 그렇다는 건 차차 보며 알게 될 거야.”

“속 편한 말이네.”

대로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소피아를 본 유피는 입을 닫았다.

예를 표하는 시녀를 향해 그녀는 물었다.

“답신은?”

“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시더 황자도 같이 있어서 이야기가 빠르게 끝났습니다.”

“바보 오빠도? 마물 요리 같은 걸 특산품이라고 준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피엘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알은 오빠를 너무 높게 쳐준다니까.”

유피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전해야 할 말이 남은 걸까. 소피아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언이라도 있었어?”

“네. 두 분이 보내신 전서입니다.”

붉은 전서와 푸른 전서.

전자는 시더 황자의 것이고, 후자는 아벨 황자가 보낸 것으로 보인다. 두 편지를 바라보는 유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보기 곤란한 거면 숙소로 가서 봐.”

“그런 건 아닌데.”

“혼날까 봐 그러는 거예요.”

앞서 걸어 나가던 란랑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혼이 나?”

유피의 노려보는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녀는 홍조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제국에서 몰래 빠져나온 거예요. 원래 여기 오기로 한 건 라피엘이었거든요. 그렇잖아요? 시더 황자님의 최측근이기도 하고, 그녀가 움직이면 다니엘과 콜린도 같이 가니까요.”

“란랑.”

“왜요? 사실이잖아요. 뭐 숨길 필요 있다고.”

란랑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루드비히 저택으로 가서 먼저 확인하면 끝날 일인데. 막상 갈 용기가 안나니, 대륙을 빙 돌아서 공화국을 갔다가 그제야…….”

“란랑!”

유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녀는 란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거지만, 넌 조금 예의를 배워와야 할 것 같아.”

“전 무식한지라 그런 건 모르네요. 시골 아낙네인걸요.”

“몇 번을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 다 그만 해요. 거리 한복판이에요.”

소피아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중재했다.

딱히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광경이 무척이나 익숙한 모양이다.

“정말 사이가 좋아졌구나.”

“뭐? 이게 어디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황녀 전하의 첫 친구는 저일걸요.”

“…….”

전서를 품으로 챙긴 유피는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돌아가면 보자.”

“하나도 안 무섭네요.”

베에, 하고 란랑은 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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