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지하수로(2) (173/200)

 # 173

지하수로(2)

이곳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모란다 역시 블러드 트리 출신이었다.

신석의 빛이 드리워진 황도 내에서도 그 온기를 나눠 받지 못하는 장소다. 그나마 불빛이 있는 장소는 환락가.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연스레 발걸음은 빛을 찾아간다. 그건 불꽃에 이끌리는 불나방과 같다. 살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유흥가의 문을 두들길 수밖에 없다.

모란다도 마찬가지다.

그와 함께 환락가에 들어온 동기들은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다. 조직의 돈을 건드렸다가 노예로 팔려나간 한스. 조직 간의 항쟁에 말려들어 다리를 잃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그대로 죽어버린 카루.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살아남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란다에게는 뛰어난 손재주가 있었다. 소매치기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간다. 황도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은 그 손길을 피할 방법이 없다. 목표로 한 것은 반드시 훔친다. 그러나 그것도 길지 않았다. 결국, 모란다는 현장에서 체포당했고, 조직은 그를 버렸다.

재판의 결과는 물을 것도 없었다.

차가운 감옥 한구석에서 죽을 날을 기다린다. 남의 것을 훔치며 살아왔으니까, 언젠가는 이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정말로 자신이었을까. 블러드 트리 출신인 그는 이런 식으로밖에 살 수 없었다.

훔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다.

빼앗는 것 말고는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

창부였던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게 된 날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런 죽음을 맞이하는 걸까.

싫다. 그런 건 싫다.

절망은 이윽고 분노로 바뀌었다. 기어 다니는 벌레와 쥐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탈출해서 반드시 복수하겠다. 잘못된 것은 그가 아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은, 이 세상 쪽이야말로 잘못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루미에르 교의 가르침은 거짓말이다. 정의와 사랑을 관장하는 다프네 여신 같은 건 없다.

한스도.

카루도.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동기들도. 만약 여신이 있었다면 그런 죽음은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은 손과 만난 건 바로 그 시기였다.

“내가 대장에게 받은 이름은 템페스트! 기억해라. 네 목숨을 가져갈 사내의 이름이다!”

일격이면 충분하다.

비수가 무방비한 집사의 목을 노렸다.

검로를 읽은 녀석이 고개를 뒤로 뺐지만, 이미 늦었다. 보고 반응한다면 따라갈 수 없다.

그림자 칼날.

비수 중에서도 상위로 꼽히는 영악한 마검이다. 이 검이 진정 무서운 점은 날카로운 예기가 아니다. 칼끝의 홈에서 흘러나오는 극소량의 맹독이야말로 공포의 주범이다. 닿는 것만으로도 마비를 불러오는 맹독이다. 녀석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던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에 당한 이상 이 승부는 이미 결과가 나와 있었다.

겁도 없이 이곳에 들어온 놈의 목을 받아간다!

퉁, 하고 그림자 칼날이 지면에 떨어졌다.

“뭐?”

모란다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칼날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반대로 꺾여있었다.

사고가 따라가질 못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몇 번이고 수련을 반복한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거리를 벌리고 상황을 수습할 시간을 번다. 하지만 그것도 사치다. 시계가 무너진다. 반쯤 꺾인 발목을 시야에 담기 무섭게 그는 차가운 지면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고생했네. 이제 그만하지.”

“…….”

독조차 통하지 않는 걸까. 집사의 목소리는 태연자약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곁으로 은발의 여자가 다가왔다. 그 인상착의를 모란다는 기억하고 있었다. 은빛의 인형사. 공화국에서 오연을 죽인 그 여자다.

“저항은 끝났나 보네. 좋아. 그럼 이제 궁금한 걸 물어볼까.”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

판단을 마친다.

모란다는 어금니 사이에 숨겨놓은 루미너스 일루젼을 깨물었다.

“?”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목소리 자체가 나오질 않는다. 목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 덜렁거리는 느낌. 이것은…….

“턱은 빼두었네. 그건 우리 쪽에서 확인해야 할 물건이니까.”

입이 억지로 벌려진다. 집사는 어금니 사이에 숨겨둔 루미너스 일루젼을 뺐다.

침으로 범벅이 된 그걸 인형사는 받지 않는다.

손수건으로 깔끔하게 닦고 난 뒤에야 그녀는 루미너스 일루젼을 받았다.

“살펴봐야 알겠지만, 거의 완제품이야.”

유피는 불길한 빛으로 빛나는 환을 살펴보았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혼탁한 마기다. 란랑에게 루미너스 일루젼을 넘긴 그녀는 모란다에게 물었다.

“얼마나 있는 거야, 이게?”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모란다의 턱을 다시 맞췄다.

“내가 대답할 거로 생각하나?”

“대답하기 싫다면 안 말해도 돼.”

“뭐?”

모란다의 반문에 유피는 말을 이었다.

“너 말고도 대답할 사람은 많으니까. 알.”

“두 명이야. 여기서 이 녀석만 한 마나를 가진 놈은.”

“어딘지 알겠어?”

“당연한 걸 묻네.”

“5분이면 충분하지? 전부 데려와.”

“알았어.”

알베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나아간다.

하지만 그 모습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마치 땅이 저절로 좁혔다가 펴지는 것 같은 환각. “설마 축지(縮地)까지…….” 하고, 란랑이 중얼거렸다.

“너희는 안 따라가는 거냐?”

“알 혼자서도 충분해.”

모란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남은 두 녀석은 나와 다르다. 저 남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길 수 없어.”

특히 갤메크는 버서커(Berserker)라고 불리는 남자다.

놈의 완력을 저 남자가 이겨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황실 기사단장인 소드 마스터 데미안이라도 오지 않는 한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5분 후.

모란다는 유피의 앞으로 끌려온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

두 다리가 부러진 갤메크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하로는 덜덜 떨고 있었다.

모란다와 시선이 마주친 소녀는 이내 다 포기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알베르트는 유피에게 루미너스 일루젼을 건넸다.

“미안. 하나는 회수하지 못했어.”

“저 남자인 모양이네. 뭐, 괜찮아. 현물은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거든.”

갤메크는 약을 먹었음에도 패배한 모양이다. 그런데 집사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로가 겁에 질린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갤메크가 손도 쓰지 못하고 졌다면, 이곳에서 저 남자를 이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여기를 전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완전히 전의를 잃은 모란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물었다.

“네 놈……. 정체가 뭐냐? 설마 라시엘 공작의 수제자냐?”

“평범한 집사다.”

“…….”

솔직하게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거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아. 아는 대로 대답해주길 바라.”

“빌어먹을. 좋다. 그 전에 하나만 약속해라. 이곳에 손을 대지 않겠다고.”

“이곳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피에게 알베르트가 말했다.

“지저와 마찬가지야. 이 안에는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

“일반인이야?”

“섞여 있는 거로 보여.”

고민하듯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그녀는 대답했다.

“좋아. 협조해준다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손대지 않겠어.”

“알겠다. 최대한 협조하지. 뭐가 알고 싶은 거냐.”

*&*

모란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다.

조직의 간부인 그들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대장인 검은 손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주는 쪽은 검은 손. 하달받은 명령을 수족이 되어 처리하는 것이 다섯 명의 간부다. 그중 둘은 이미 목숨을 잃었으니, 남은 건 이곳에 있는 세 명이 전부다.

황도에 도착한 루미너스 일루젼은 이미 검은 손에게 넘어간 뒤다.

약속한 장소로 배달했기 때문에 녀석들도 약의 소재는 모른다는 모양이다.

블러드 트리에는 눈속임용으로 만든 농원이 더러 있지만, 루미너스 일루젼만을 재배하는 게 아니다. 약 종류는 물론이고, 암시장도 관리하고 있었다. 이 지하에 있는 것은 저 거목이 전부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섞인 이곳은 그들은 집이었다.

“암계의 관리자라고 들었는데, 식솔이 상당히 많네요. 검은 손도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길가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며 란랑이 중얼거렸다.

지하라는 것만 빼면 평화로운 마을로 보일 정도다.

“대장은 너희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다. 악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우리가 아니야. 우리의 눈에는, 정의를 표방하는 너희 루미에르 교야말로 악이다.”

“정의든, 악이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너희가 저지르려고 하는 짓이 위험한 일이니 막을 뿐이야.”

“이미 불꽃놀이의 준비는 끝났다. 다음 불꽃이 쏘아 올려진다면 상황이 움직일 거다.”

“그러네. 이런 현물이 많이 풀려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생각해, 알?”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면 모를까. 이미 방비가 된 상태야. 갤메크와 같은 수준의 무력을 지닌 이들이 수천에 이르면 모를까.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아.”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제국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루미에르 교는 물론이고, 마탑까지도 이미 움직이고 있다.

적의 본거지는 점거했고, 이 상태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져도 무난하게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시시한 결말이다, 정말로.

“모두가 당신처럼 강한 건 아니야.”

“수를 논하는 거라면 더 힘들지 않겠어? 뭐, 준비한 게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

탐색은 이만하면 됐다. 유피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뱀의 추종자는 어디에 있지?”

“뱀의 추종자?”

“그래, 캘러미티 말이야. 여기에 있는 것 같진 않고.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캘러미티라면 북부의 야만인을 말하는 거 아닌가? 왜 기분 나쁜 그 녀석들을 여기서 찾는 거냐?”

“몰라서 묻는 거야?”

“?”

모란다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유피의 시선이 기절한 갤메크를 지나 하로를 향했다.

“모, 몰라요. 그런 야만인들 따위 알고 싶지도 않다고요.”

“우리가 받은 명령은 이게 전부다. 캘러미티는 알지 못해.”

“정말 그럴까?”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아무리 대장과의 인연이 중요해도, 이곳에 있는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대견하네. 검은 손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모란다는 단언했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 목숨이 중요하다고 말해준 건 대장이니까.”

“…….”

흐응, 하고 유피는 콧소리를 냈다.

검은 손이라는 작자는, 직속 부하와 아래 부하를 대하는 게 조금 다른 모양이다.

“결국, 건진 건 여기 있는 루미너스 일루젼 정도네요.”

“적어도 수가 더 늘지는 않겠어. 여기는 어떻게 할까? 일단 루미에르 교에 말하는 게 나을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이건 손을 쓸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손을 쓰지 않은 거야.”

아무래도 루미에르 교는 이곳에 캘러미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냥 그 자리에서 말로 했으면 됐지. 굳이 이곳까지 보낸 이유가 뭘까?

두 눈으로 확인해주길 바란 건가. 이 광경을?

“그런가. 기분은 나쁘지만, 조금만 어울려 볼까. 올라가는 건 미루자. 모란다. 여길 좀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잠깐만요, 황녀님. 여기 더 있을 생각인가요?”

“싫어?”

“싫은 게 당연하죠.”

란랑은 얼굴을 구겼다.

“저 먼저 따로 올라가면 안 될까요?”

“또 왜 그래, 란랑. 그러지 말고 같이 쭉 돌아보자.”

“그래? 잘됐네요. 제 역할은 소피아가 대신하겠다네요. 나가는 길은 어디야?”

“반대쪽으로 가면 슬라임이 막고 있는 통로가 있습니다. 조금 끈적이긴 하지만 그곳을 통과…….”

“저도 같이 어울릴게요.”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했다.

“…….”

“…….”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니, 별로.”

뭔가 란랑이 알기 쉽게 변한 느낌이다.

유피와 다니면서 부드럽게 변한 것 같다고 할까.

“란은 웃지 마요. 재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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