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접촉(3) (171/200)

 # 171

접촉(3)

프랑소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다.

단순히 이쪽의 반응이 보고 싶은 거겠지.

성녀가 침묵하자 데미안은 창가에서 눈을 돌렸다.

“크로만 가의 이단아가 왔다 갔다고 들었습니다.”

“셀렌느 후작은 생각외로 독실한 신자더군요.”

눈웃음은 보이지 않았다.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 이단아를 계속 만나신다면 제가 성녀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데미안 단장?”

“그럴 리가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당신에게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그저 충고하는 겁니다. 홀리 나이트도 가까울뿐더러. 교황 성하가 보이지 않는 지금 황도의 균형은 위태롭기 짝이 없으니까요.”

“그건 굳이 말씀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단장이 말하지 않아도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아무도 성녀님에게 도개교 역할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연이네요. 저도 단장의 조언은 필요하지 않아요.”

프랑소와는 꿋꿋하게 대답한다.

의중을 읽고 싶은 듯 데미안은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군요. 진심으로 말하면 통한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성녀님은 예외인 모양입니다.”

돌아가면 허튼소리를 한 부단장에게 벌을 내려야겠군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압둘레이 공화국의 모하메드 의장이 루드비히 공작령을 방문했다죠.”

“교역 루트를 유지할 시기니까요. 아마 차기 후계자인 검의 영애를 보러 온 거로 생각합니다. 모하메드 의장이 직접 움직인 건 의외였지만 말이죠.”

“검의 영애. 아리시엘 루드비히 말이군요. 공녀가 황도로 들어온 것은 알고 있습니까?”

“루드비히 가의 후계자가 황도에?”

“소수의 사용인만을 대동한 채 상경했더군요. 귀족파는 영애의 철없는 수도 탐방기라 여기는 것 같지만, 과연 그럴까요? 블러드 트리에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지금. 검의 영애가 수도에 온 것은 어떤 연유에 의해서일까요. 성녀님은 짐작 가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렇군요. 단장은 저희가 검의 영애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착각입니다.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성녀의 대답에 데미안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신전기사단도 마찬가지입니까?”

“기사단의 의중은 저도 모릅니다. 미카엘라 단장을 찾아가 보세요.”

“그 친구는 황도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지 꽤 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가요? 또 술맛 좋은 주점에 갔나 보군요.”

데미안은 들었던 잔을 내렸다.

루미에르 교의 기사들은 술을 하지 않는다. 루체리라는 술을 흉내 낸 음료를 마실뿐이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소드 마스터에 이른 그의 감각에도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무언가 마도구가 설치된 걸지도 모른다. 루미에르 교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다프네 신전. 그것도 권위자 중 한 명인 성녀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연기일까.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단장이 찾아가는 주점이라면 저도 흥미가 생기는군요.”

“그럴 줄 알고 사람을 보내 알아봤습니다. 나무 아래에 있는 주점입니다. 분명 루세 지구라고 했죠. 우리가 구호 활동을 벌이는 장소에서도 더 내려가야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화를 낸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성녀님.”

루세 지구.

블러드 트리에 있는 슬럼가 중 한 곳이다. 이미 조사가 끝난 지역이다. 눈에 띌만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은 나가기 직전 덧붙이듯이 말했다.

“검의 영애와 함께 들어온 일행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한 번 확인해보시는 것도 재밌을 겁니다.”

“그런가요? 무료할 때 사람을 보내보도록 하죠.”

홀로 남은 프랑소와는 밀크티를 들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차는 따뜻했다. 입안에서 감도는 달콤한 맛은 그녀가 즐기던 밀크티였다.

잔을 비운 그녀는 톡톡, 하고 테이블을 두들겼다.

문이 열리며 사제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릎 꿇은 두 사람을 보며 프랑소와는 말했다.

“인형사를 황실이 알아차린 모양입니다. 그쪽보다 먼저 접촉하세요. 바라는 건 최대한 협조하되, 이쪽의 정보는 가려서 주세요. 판단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레이첼.”

“성녀님의 명을 받듭니다.”

*&*

해가 떨어진다.

황도에 어둠이 드리워지자 알베르트는 여관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블러드 트리다. 마탑의 총장 리 하델이 준 정보다. 만약 황도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생겼다고 하면, 슬럼가인 그곳을 제외하고는 짚이는 바가 없다.

「하지만 이상하군. 만약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교단이 그 움직임을 모를 리 없어. 아무리 은밀하더라도 말이야. 황도는 루미에르 교의 총본산이니까. 이곳에서 발현된 마기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성녀는 바보가 아니네. 그런가. 보고도 모른 척했다. 혹은 숨길 필요가 있었다. 둘 중 하나로밖에 여겨지지 않는군.」

“늦어, 알.”

“미안. 쌍둥이 자매의 억지를 들어주다 보니 조금 늦었어.”

나무처럼 엮인 슬럼가의 지붕에는 세 사람이 알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피는 썩 유쾌한 표정이 아니다.

소피아는 꾸벅 고개를 숙였고, 란랑은 입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좀 나온 건 있어?”

“아무것도. 시시한 꼬리만 밟았을 뿐이야.”

“벌써 3일째네요.”

“차라리 일이 터지고 난 뒤 수습하는 쪽이 좋지 않겠어요?”

짜증 섞인 란랑의 목소리에 소피아가 옆구리를 찔렀다.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다.

“알고 있어. 답답해서 한 말이야.”

조사에 진척은 없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다.

유피는 슬럼가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블러드 트리는 빛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등잔은 사치다. 간신히 방을 밝힐 수 있는 초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환락가가 조성된 곳은 기분 나쁜 빛이 아른거리고 있을 뿐이다.

반면 황도 쪽은 다르다.

신석에서 시작된 화려한 빛이 가득하다. 가로에는 마조명이 반짝이고, 산보를 나온 이들이 웃으면서 돌아다니고 있다. 여기도 똑같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걸까. 아니, 이곳은 낙양보다 더하다. 두 거리를 비교하던 그녀의 눈이 멈췄다.

알베르트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노점상 밖에서 두 손님이 야식을 먹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나 보네.”

“미행이지?”

“그래, 지긋지긋한 신성력으로 봤을 때, 아마도 루미에르 교에서 붙인 거겠지.”

알베르트의 눈에도 익숙한 사람들이다.

황도에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계속 붙어 있던 미행이다. 사람이 바뀌지도 않고, 장소조차도 매번 같다. 이쯤 되면 미행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드러내고 따라붙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접촉은 없다. 굽히고 싶지 않았지만, 이래서야 어쩔 수 없나.

“알. 부탁해도 될까?”

“자리는 여기에 만들게.”

“고마워.”

알베르트의 초대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했다.

유피가 있는 지붕으로 올라온다. 어느새 소피아가 준비해놓은 건지,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유피는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그들은 무릎을 꿇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프랑소와 성녀님의 전속 사제인 레이첼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녀님의 전속 사제인 제라드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숨길 생각조차 없다. 두 사람의 인사를 받은 유피는 말을 이었다.

“일어나서 앉아. 너희한테 이런 예를 받을 이유가 없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각이 없으시다고 해도, 당신은 여신님의 대변자시니까요.”

“뭐라는 거야. 내가 마족의 황녀라는 걸 알면서도 하는 소리야?”

“하지만 동시에 성녀님이기도 하시니까요.”

“…….”

풋, 하고 그녀는 마시던 차를 토해냈다.

알베르트가 손수건을 건넸다. 입가를 닦은 그녀는 콜록거렸다.

“성녀님?”

소름이 돋는다는 듯 유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습니다. 아르웬 성녀님의 힘을 이으셨으니까요.”

“그것참 위대한 혈통이네. 어머니가 아주 기뻐하시겠어.”

대놓고 비꼬는 유피의 말에도 레이첼의 얼굴은 태연했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는 헛기침을 터뜨렸다.

“너희가 찬양하는 성녀님은 혈연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 텐데.”

“물론입니다. 하지만 성녀님이 사용하시는 신성력은 우리가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기. 미안한데, 그 성녀라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될까? 생리적으로 힘들거든.”

“그럼 어떤 호칭이 좋으신가요?”

“그러네, 마녀라고 불러.”

숲의 마녀. 발푸르기스의 자매. 유피에르 바토리. 성녀와는 정반대에 있는 칭호다.

그녀의 대답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피에르 마녀님.”

“따르겠습니다, 유피에르 마녀님.”

“…….”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더 질이 나빠.”

이러니까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너희는 날 부정해야 하지 않아?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루미에르 교는 크게 3개의 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마녀님을 부정하는 파는 교황 성하 측입니다. 성녀님을 받드는 저희와 신전기사단은 다릅니다.”

“교황은 부정하고, 성녀가 날 인정한다는 말이야? 무슨 질 나쁜 농담이래, 그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유피의 몸에 흐르는 피는 마족과 인족의 것이다. 있어서는 안 될 혈통이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마족의 황녀라는 신분이다. 루미에르 교. 더 나아가 제국의 성녀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교황 성하님은 더는 예전의 그분이 아니시니까요.”

“뭐, 아무래도 좋아. 너희가 뭘 획책하든 난 관심 없으니까. 이야기로 돌아오자. 내가 뭘 추적하고 있는지는 알지? 알고 있는 걸 말해봐. 물론 맨입으로 요구하는 건 아니야. 너희가 꺼리는 건 내 정체잖아. 정보를 받으면 나도 밝힐 생각은 없으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저희를 직접 부른다면, 그때는 협조를 아끼지 말라고 말입니다.”

“…….”

너무 형편 좋은 이야기다.

레이첼과 제라드를 말없이 응시하던 유피가 물었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고? 마족의 황녀인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너희는 그런 명령을 납득한 거야?”

“저희의 의사는 중요치 않습니다. 성녀님은 여신님의 뜻을 대변하시는 분. 그녀의 말씀은 곧 여신님의 말씀입니다. 여신님의 종인 저희는 위대한 그 뜻을 따라갈 따름입니다.”

“너희 정말 기분 나쁜 녀석들이구나.”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광신. 혹은 맹신인가.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잡담을 나누고 싶지 않다. 필요한 정보만 받고 빠르게 대화를 마치자.

“말해봐. 놈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블러드 트리 전역에는 루미너스 일루젼의 농원이 있습니다. 각 지구에는 관리자가 있고, 그중에서도 검은 손이 직접 관리하는 다섯 명의 대장이 있었습니다.”

“있었다?”

“마녀님이 쓰러뜨리신 쉐도우송(Shadow Song) 오연과 루드비히 공작령에서 쓰러진 팬텀 소드. 두 자리가 현재는 공석입니다.”

“지금 남은 건 세 사람이라는 거네.”

“그렇습니다.”

“그래. 녀석들이 있는 곳이 본거지겠네. 어디야?”

“앞서 말씀드린 농원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본거지입니다. 황실과 저희 교단을 속이기 위한 눈속임. 녀석들의 본거지는 그보다 더 밑에 있습니다.”

“더 밑? 슬럼가 밑에 무슨 마을이라도 있나 보지.”

순간 알베르트는 낙양 빈민가 밑에 있던 지저를 떠올렸다.

더 떨어질 곳이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밑바닥에는 더 깊은 지하가 있었다. 하지만 이 황도의 지하에는 마을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다. 애초에 그곳에는…….

“설마.”

“집사분께서 짚이는 바가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황도의 밑에는 지하수로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곳을 조사해보시면 의문이 해결되실 겁니다. 다만, 성녀님께서 말씀하시길. 폭풍이 다가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오니, 하고 레이첼은 말을 이었다.

“그때가 오면 힘을 빌려달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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