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접촉(2)
폴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여유롭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루센 지구 4번지를 지킬 것. 이름을 담기조차 황송한 대장이 내려준 임무다. 이곳의 열매를 만드는 비밀의 화원. 수확은 끝났다. 남은 건 양분으로 쓴 재료를 정리하는 사후처리. 혹여라도 있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경계의 끈도 놓치지 않았다.
실제로 몇 번이나 이곳을 염탐하러 온 벌레들은 누구 하나 돌아가지 못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다.
겁도 없이 이곳에 발을 들인 벌레를 짓밟아 터뜨린다. 적의 정체는 알고 있다. 분명 우리의 뒤를 밟고 있는 독수리다. 마탑 내에서도 흔하지 않은 5서클 마법사. 황실기사단에 버금가는 검술 실력을 갖춘 기사. 조직 내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는 남자다.
그런 사내가 자신의 지구로 찾아왔다.
반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혹여 놈이 생각보다 강하더라도 상관없다. 이쪽은 비장의 수도 있다. 그러나 배틀 글러브(Battle Glove)를 끼고 밖으로 나온 그를 맞이한 것은 세 명의 불청객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
잡히지 않는다.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 여자가 그의 권격을 받아낸다. 파이어 피스트. 전력을 다하면 마나를 불태우며 나아가는 그의 주먹은 필살이다. 이 염격(炎擊)을 정면에서 받아낼 수 있는 이는 손가락에 꼽을 터.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여자가 받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부정한다.
여자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기묘하다. 바닥에 완전히 엎드리는가 하면, 일순간 시야에서 벗어난다. 또다. 목 지척에 검이 들어온 착각. 몸 전체가 발하는 경고에 따른다. 거리를 벌리고 손을 앞으로 뻗는다.
흑백이 섞인 머리카락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여자는 폴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폴라는 역량의 차이를 인정했다. 믿을 수 없지만, 이 여아의 실력은 이미 자신을 뛰어넘고 있다. 거기에 남은 두 명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지원은 기대할 수 없다. 지구에 쳐들어온 건 셋이 전부가 아니다. 이쪽은 아마 별동대. 독수리와 함께 다니는 그림자가 모든 걸 무너뜨리고 있을 터다.
불청객의 정체는 아무래도 좋다. 시간이 없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최소한 4번지에 남은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대장을 볼 면목이 없다.
다행히 여자가 달려들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여유를 찾은 폴라는 어금니에 끼워둔 열매를 깨물었다.
팍, 하고 입안에서 검은 물이 터져 나왔다.
처음 느낀 감각은 뜨거웠다.
입 전체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프더니, 이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임을 멈춘 폴라의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 몸이 변화를 시작했다. 평범했던 피부에 검은빛이 흐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검은색에 먹혀버린 놈은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폴라의 주먹에서 검은 불길이 일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계집.”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검은 권격을 본 여자는 주먹을 피했다.
두르고 있던 옷자락이 찢어졌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불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칫, 하고 그녀는 혀를 찼다.
생각보다 빠르다.
좀 더 속도를 올린다. 녀석이 힘을 끌어냈다면 그녀도 마찬가지다. 아직 여인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길이 방해다. 옷을 먹어치운 검은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좁아진다. 움직임에 망설임이 생긴다. 폴라의 주먹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쿵!
방패와 부딪친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폴라의 주먹은 여인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은빛 마법진이 검은 불꽃을 막고 있었다. 마법진 아래쪽에서 펼쳐진 은빛 실은 여인의 옷을 먹어치운 불꽃을 꺼뜨렸다.
“물러서, 소피아.”
마법을 펼친 건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불청객 중 한 명이다.
그녀의 부름에 소피아는 등을 보였다.
어리석은 짓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적을 앞에 두고 발을 돌리다니,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마법진 위로 권격이 쇄도한다. 고작 해봐야 실드. 이 연격을 막아낼 수 있을 만한 강도는 갖추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속단이었음을, 폴라는 금하나 생기지 않는 마법진을 보고 깨달았다.
“그런 말이 있지. 호수에 비친 달을 보고 들개는 울부짖는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상관없어. 들개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니까. 달이 하늘에 뜨는 건지조차 알지 못해. 그저 호수에 비친 달의 모습이 흐려지길 바라면서 짖어댈 뿐이야.”
의도적으로 흘리는 걸까. 새어 나온 은빛의 마나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몇 겹이나 되는 마법진이 생겨난다.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이다. 심상치 않은 마나를 느낀 폴라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나가 꿈틀거리고 있는 건 놈의 발치만이 아니다. 자신이 밟고 있는 땅조차, 이미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들개가 아무리 짖어도 달은 사라지지 않아. 이윽고 녀석은 달을 짓밟기 위해 그 안으로 발을 들이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자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말이야. 바보지? 조금만 더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인데. 그런 주변머리조차 없다니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네 놈은.”
노려보는 폴라의 시선에 녀석은 손을 들었다.
폴라의 고개가 꺾였다. 팔과 다리가 묶인다. 몸이 고정된다.
자유를 빼앗긴 그의 시선은 지면을 향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갑작스러운 상황을 머릿속이 따라가지 못한다. 양 손목과 발목. 무언가에 잡혀있다. 흐릿하게 잡히는 시야 사이로 은빛 실이 보였다. 주변에서 일어난 마나다. 은빛의 마나를 다루는 녀석의 힘이 폴라를 고정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일어난 불길 때문일까, 지면에서는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네 주제를 알라는 말이다, 천한 것.”
폴라가 들은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차가운 어조. 당장이라도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늦었다.
폴라의 목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지면으로 떨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향해 소녀는 걸어갔다.
목이 떨어진 육신은 여전히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가 솟구쳐야 할 절단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연기를 통에 담았다.
“얼마나 진행된 것 같아, 란랑?”
“거의 최종 단계에요. 이런 걸 양산하고 있다면 막을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상황은 최악.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거네.”
란랑이 일어나자 폴라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어둠이 땅바닥으로 스며든다. 마치 검은 불길이 그곳에 남은 것 같다. 일렁거리는 기운을 지켜보던 유피에르는 손을 움직였다. 은빛이 그림자를 집어삼켰다. 불길을 꺼뜨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상황이 이 모양인데 제국은 뭘 하는 걸까요? 자체 조사도 설렁설렁하는 느낌이고. 이 사태를 수습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거의 방관하는 수준에 가깝잖아요.”
“제국은 우리랑 상황이 달라, 소피아. 공화국에서도 그랬지만, 여기는 알다시피 루미에르 교가 있잖아. 거기에 황제가 있고, 그 아래로 두 공작이. 또다시 그 아래로는 수많은 귀족이 있어. 특히나 제국의 잘나신 귀족님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놈들이야.”
“그런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잖아. 루미너스 일루젼은 자신들의 동포를 양분으로 삼는 열매잖아. 이 물건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용한다는 거야? 그것도 루미에르 교의 신도라는 인족들이?”
“그러니까 제국이 무서운 거야. 신의 이름을 빌려서 무슨 짓이든 저지르니까. 요 며칠간 충분히 느꼈잖아. 녀석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귀족과 평민. 신분 차이를 주는 것도 모자라서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놈들이야. 노예가 된 이들은 물건과도 같은 취급. 즉 물건이 죽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거지. 그저 갖고 있던 재물이 살짝 줄어든 정도니까. 생각해봐. 여기는 빈민가잖아. 슬럼가에서 사는 사람 따위 동족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야. 죽든 말든, 그거야말로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
“…….”
소피아는 말문이 막혔다.
연 제국 내에서도 순혈과 혼혈을 차별하는 일은 많다. 낙양에서 있었던 이신설교의 사건 이후 혼혈의 대우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차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우가 나쁘다고 해도 동포를 물건으로 취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녀석들은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아무래도 좋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루미너스 일루젼을 만들 수 있으니 맨땅에서 황금을 만드는…….”
“란랑.”
소녀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는 것을 느낀 유피에르가 입을 열었다.
란랑은 입가를 찡그렸다. 자신도 모르게 열중해버렸다. 소피아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평소보다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사과할 사람이 잘못됐어.”
“미안해, 소피아.”
“아니야.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유피에르는 폴라가 나온 지부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제국의 특수 부대로 보이는 병사들이 밭을 태우고 있다. 나무를 집어삼킨 불길은 끝없이 타올랐다.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가 벌레처럼 터져나갔다.
하지만 위안은 되지 않는다.
유피에르는 느끼고 있었다. 루미너스 일루젼은 이미 황도라는 나무에 기생해버렸다. 나무가 다치지 않고 끝낼 방법은 없다. 남은 선택은 상처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 정도겠지.
*&*
프랑소와 성녀는 몇 번째일지 모를 잔을 들었다.
평소에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주는 밀크티도 지금은 소용없었다. 당연하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상황이면 모를까,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의미가 없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무도회에서 레이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바로 그 미소다. 확실히 어울리긴 한다. 속은 어떨지 모르더라도 이 남자의 용모는 멋있으니까. 실제로 프랑소와에게도 두근거림은 있었다. 하지만 이 두근거림은 달콤한 감정에서 오는 떨림이 아니다.
흡사 포식자를 눈앞에 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감각이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다.
고심 끝에 프랑소와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는 어언 일이신가요, 데미안 단장.”
“별일 아닙니다. 성녀님과 차를 한잔 들고 싶어서 찾아왔을 뿐입니다.”
거짓말이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데미안 단장은 지금 기사단의 수련을 봐주고 있어야 했다. 휴가를 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지금 무단으로 스케줄에 펑크를 내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모르겠다.
셀렌느 후작과는 또 다른 남자다. 셀렌느 후작이 능청스러운 원숭이라 하면, 이 남자는 뱀에 가까웠다. 준수한 용모와는 달리 무슨 꿍꿍이를 가진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신전의 허드렛일을 맡을 시종들은 그런 모습이 미스테리하다며 좋다고 했지만, 프랑소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 단장은 창가로 다가갔다.
“황도만큼 아름다운 도시도 보기 힘들죠. 특히 성녀님의 방에서 보는 중앙대로의 풍경은 정말 특별합니다.”
“데미안 단장은 이 광경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군요.”
“물론입니다. 성녀님과 제가 지키는 황도니까요.”
프랑소와의 눈썹이 떨렸다.
올라오는 혐오감을 억누른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죠. 데미안 단장의 우선순위는 폐하지 않습니까. 저희 루미에르 교가 우선하는 건 여신님을 따르는 가련한 양들입니다.”
“신민을 지키는 건 모든 기사들의 의무랍니다, 프랑소와 성녀님.”
“황실기사단만큼은 예외죠.”
“그랬던가요? 그럼 돌아가서 제가 고쳐야겠군요. 일단은 단장이니 말입니다.”
제국이 보유한 4명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인 황실기사단장 데미안 류재스터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