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접촉(1)
거리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커다란 건물 위에서 세 남녀는 구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빛 사이로 하얀 옷을 걸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채소와 고기다. 얼핏 보기에도 몇백인 분은 되어 보이는 재료다. 변변찮은 스튜가 완성되고, 몇 조각 안 되는 고기와 딱딱한 빵이 준비된다. 곧 식욕을 돋우는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매일 정시마다 행해지는 루미에르 교의 구호 활동이다.
구호소 앞에는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모두 배식을 받으러 나온 이들이다.
“봐, 모란다. 밥을 준다니까 빼곡하게 모여있는 저 벌레들을. 다들 입을 한데 모아서 루미에르 교를 욕할 때는 언제고 정작 앞에 나서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토할 것 같아.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세상에 더 보탬이 될 텐데.”
“말이 심하다, 하로. 저것 외에는 선택할 길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야.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수 없고. 밖에 나가면 손가락질만 받는다. 알고 있지 않나?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블러드 트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이야.”
“알아. 알고 있다고. 그냥 답답해서 말한 것뿐이라고. 진짜 벌레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놈들이라는 것도.”
하로라 불린 소녀는 멀리 보이는 순백의 신전을 가리켰다.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불태우는 데 5일이 걸려고. 빛이 가득 찬 세상을 만드는 데 5일이 걸렸다. 그 밤을 홀리 나이트라고 부르니. 신도들에게 축복이 있으랴. 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여신님이 정말로 있다면 이런 세상, 다 태워버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피도 안 튀기고 좋을 텐데, 하고 하로는 킥킥거렸다.
천지 난만하게 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떠올랐다. 요사스럽다고 해도 좋다. 사이한 미소를 지은 하로는 들고 있던 열매를 던졌다. 어둠 속에서도 검은 광택을 발하는 열매는, 루미너스 일루젼이다.
“저 녀석들을 전부 쥐어짜면 열매 한 개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독수리가 냄새를 맡고 있다.”
“그래 봤자 시체에서 찌꺼기를 찾아가는 녀석이잖아.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하지. 꼭 병에 걸린 늙은이 같다니까. 정작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요란스럽게 소란만 떨지.”
“독수리를 얕보지 말아라. 그래도 제국 최강의 마검사라 불리는 사내다.”
“최강의 마검사?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네. 놈은 도망쳤을 뿐이야. 하나의 극의에 이를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런 도망자에게 마검사라는 호칭을 달아준 게 대체 어디의 어떤 놈이야?”
“시끄럽다. 땍땍거릴 거면 당장 내려가도록.”
“누가 땍땍거렸다는 거야, 갤메크?”
하로는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거한을 노려보았다.
서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노려보는 둘 사이로 모란다가 끼어들었다.
“싸움은 나중에 해라. 루미에르 교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저 바보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버려. 연막용으로 쳐둔 더미조차 발견하지 못했는걸.”
“그건 독수리가 물었다.”
“또 그 도망자야?”
누가 그런 놈 아니랄까 봐. 투덜거리는 소녀를 바라보던 갤메크는 말했다.
“팬텀 소드가 도착하지 않았다.”
“약을 보낸 후 올라온다고 했어. 현물은 문제없이 도착했잖아. 올라오다가 잠시 딴 길로 빠진 모양이야.”
“또 그놈의 악취미가 발동한 거 아냐? 지가 마족도 아니고. 모처럼 대장이 직접 내린 명령인데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면 이상한 취미가 발동하는 놈이다.
분명 수도로 올라오는 도중 환락가라도 들린 거겠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다 큰 남자가 엄마를 찾으면서 울먹이는 놀이라니. 그런 변태도 없을 거야.”
“너무 그러지 말아라. 녀석이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여기 모인 사람 중에서 사정없는 놈은 없다.
팬텀 소드도 마찬가지다. 유년기 시절 그 남자는 눈앞에서 어머니가 겁탈당하는 걸 지켜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혈육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당시의 그 일이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술만 들어가면 녀석은 울면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알고 있어. 불쌍한 녀석이라는 것 정도는. 그러니까 올라오면 혼내줘야지. 엄마의 훈육이라는 걸 알게 해줄 거야.”
“그건……. 어려울 것 같군.”
“어딜 보면서 말한 거야?”
“아무것도.”
“…….”
“데지마랑 벨라는?”
“두 사람은 팬텀 소드를 보좌하고 있다. 따로 올라올 수는 없겠지.”
“상관을 잘못 만나면 고생한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그 짝이네.”
건물 아래에서 이어지는 구호 활동을 바라보던 모란다가 말했다.
“공화국에서 오연을 죽인 놈. 기억하고 있어?”
“은빛의 인형사 말이네. 출신 불명. 나이 불명. 대륙 방방곡곡을 떠돌며 인형극을 하고 있다더군. 수상한 점이 많은 놈이야. 그전까지는 뭘 하고 다녔는지 알 수가 없거든. 정보가 너무 없어.”
“오늘 우리 쥐가 그러더라고. 인형사로 보이는 놈이 황도로 들어왔다고.”
순간 대기가 요동쳤다.
하로와 모란다는 얼굴을 찌푸렸다. 거한이 뿜어내는 기운이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정해. 이 싸움광. 이러다가 우리 위치를 들키겠어.”
“끓어오르지 않는가? 우리 중 가장 약자라고 해도 그 오연을 죽인 실력자다. 놈은 꼭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싶군.”
“그래그래. 찢어 죽이든, 발라 죽이든. 마음대로 해. 난 관심 없으니까.”
싸움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흥미조차 일지 않는다.
“열매의 생산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대부분 수확했다. 이제 뿌린 씨를 거두는 일만이 남았지.”
“대장은?”
“열매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계신다.”
“진짜야? 그럼 이제 거의 끝나가나 보네?”
“그건 알 수 없지.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을 보고 계시니.”
하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빨리 회수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구호소에서 배식 중인 루미에르 교의 사제들을 보며 모란다는 말했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빈민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간다.
이쪽 지구에 모인 사람들만 해도 이만한 수다. 주에 3번 있는 구호 활동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넉넉히 준비해왔을 배식도 부족했는지, 식사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블러드 트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그들은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정말로 검은 냄새를 맡지 못한 걸까?”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검은 이미 녹슬었다. 약이 도착한 것만 봐도 짐작이 가지 않나? 차라리 독수리 쪽이 낫다. 녀석은 늦긴 해도 천천히 우리 뒤를 밟아오고 있으니까 말이다.”
“팬텀 소드가 그랬어. 검의 날파리가 붙은 것 같다고.”
“붙었을 뿐이겠지. 우리 실체를 파악한 건 아니다. 정말 그것이 제대로 된 검이었다면 열매가 이곳까지 도착하는 일은 없었겠지.”
“그렇다고 해도 검은 무시할 만한 존재가 아니야. 거기에는 제국의 수호신이 있잖아.”
“라시엘 공작이라고 해도 우리 보스에게는 대적할 수 없다. 이 빠진 호랑이다. 놈이 직접 황도까지 올라온다 해도 대처할 수 있어.”
“단순히 손에 쥔 힘을 말하는 게 아니야. 검이 쌓은 명성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어. 검의 이름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어. 녀석들이 입을 열면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움직일 세력이 썩어난다.”
“광신도가 따로 없네.”
“수호신이라는 이름은 가볍게 쌓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 검의 영애가 오늘 낮, 황도에 도착했다.”
하로와 모란다는 갤메크를 바라보았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모란다와 달리 하로는 살짝 입꼬리를 찡그렸다.
“데뷔탕트를 치르러 온 거 아니야? 아니면 아카데미에 다닐 나이가 되었다든지. 귀족들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아직 영애의 나이는 13살이다. 2년이나 되는 시간이 남았는데. 어째서 이 시기에 올라왔을까? 무언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챘다는 거야?”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꿍꿍이가 있는 건 틀림없다.”
“과연 아예 바보는 아니라는 거네.”
그런 거라면 조금 흥미가 인다.
검의 숨겨진 의도를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조금 알아볼까?”
“반대한다.”
“좋은 생각은 아니군.”
“뭐야, 언제는 이상하다면서.”
남은 두 사람이 입을 한데 모아 반대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하로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네가 나서면 영애는 죽을 테니까. 거사를 앞에 두고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사건은 피하고 싶다.”
“살벌한 소리를 하고 있네. 누가 죽인다는 거야. 그저 조금만 갖고 놀 거야. 조금만.”
“대부분의 사람은 너의 조금을 견디지 못한다. 검의 아가씨라도 마찬가지다. 성인식도 맞이하지 못한 꼬마다. 변변찮은 무력을 지니고 있을 리 만무하다.”
“요컨대 벌레와 동급이라는 거네? 재미없어.”
기대감이 갖기 무섭게 사라졌다. 다시 따분해졌다. 소녀는 건물 위에서 축 늘어졌다.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 밤하늘이 보인다. 별과 함께 마정석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호수에 비친 달처럼 마정석의 빛은 바로 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러나 잡히지 않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똑같다. 신기루를 앞에 둔 것 같다. 소리 없이 한 남자가 반전된 시야 속에 들어왔다. 무릎을 꿇은 녀석은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독수리가 움직였습니다. 루세 지구에 뿌린 꼬리가 발각되었습니다.”
“질리지도 않나, 그 시체 청소부는.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듣는 거야? 그래. 루세 지구에는 지금 누가 있어? 녀석을 막을만한 전력이 있던가?”
“파이어 피스트(Fire Fist) 폴라가 있습니다.”
“폴라? 위험하네. 그 녀석, 약하잖아.”
분명 죽을걸, 하고 하로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루세 지구에는 열매의 재배지가 있어. 그냥 줄 수는 없어. 어떻게 할까. 누가 갈래?”
나는 가기 싫어. 둘 중에 한 사람이 가라는 어투에 모란다가 대답했다.
“갈 수 없다.”
“입 아프게 하네. 방금 내 말 못 들었어?”
“그곳에 있던 열매는 이미 수확했다. 남은 건 찌꺼기다.”
“폴라를 주는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재배지를 그냥 보여줄 생각이야? 대장이 화낼 텐데.”
“그 정도는 내줘야 의심을 사지 않는다. 어차피 폴라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녀석들도 죽이지는 않을 거야.”
“과연 그럴지 모르겠네.
결과가 보인다는 듯 하로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고집부리지 말고 살아남으면 좋을 텐데.”
“그건 녀석의 몫에 달렸지.”
여기까지 와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조금만 참아라. 대장이 그랬다. 불꽃놀이가 멀지 않았다고.”
“만드는 건 힘들어도, 부수는 건 쉽지.”
“크게 쏘아 올리면 좋겠다. 저 멀리 보이는 달까지 전부 불태워버릴 만큼 말이야.”
닿을 수 없다면 떨어뜨리면 될 뿐이다.
지상으로 추락한 달을 밟고 싶다.
오만하게 위에서 바라보는 것을 전부 무너뜨리고 싶다.
모란다의 눈은 달과 같은 빛을 머금고 있는 황도의 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
셀렌느 후작은 검은 묘목으로 가득한 밭을 둘러보고 있었다.
밭 곳곳에서 올라오는 불길이 거세다. 연기가 멈추지 않는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냄새는 호흡마저 흐리고 있었다. 화마는 끊임없이 밭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불로 루미너스 일루젼을 태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주변에 악영향을 미치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처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리라.
루세 지구 4번지.
슬럼가 중에서도 치안이 나쁜 장소다. 일반 빈민들은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는 지역이다. 그 지구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4번지는, 셀렌느 후작도 몇 번이고 찾아온 장소였다. 다만, 그때는 이런 재배지 따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보시나요, 도련님?”
“텅 비었다. 우리가 늦었어. 이래서야 녀석들이 내놓은 걸 엎드려 받은 셈이나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이들은 크로만 가의 사병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셀렌느 후작의 직속 부하들.
암계에서 활동하는 이 부대에 정식 이름은 없었다. 그림자는 어디까지나 그림자. 실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름이 없으면 지칭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임시이자 억지로 붙인 이름이 하나. 그들은 자신을 그림자단이라 불렀다.
“생포한 녀석들은?”
“말단입니다. 이 지구를 제외한 다른 지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잘라왔으니까. 이번에도 맹탕인 모양이다.”
또 시끄러운 성녀님에게 한 소리 듣겠군, 하고 셀렌느는 투덜거렸다.
“혹시 숨어 있는 녀석들이 있을지 모르니. 3번대와 4번대는 지하 쪽을 좀 더 조사해봐라. 올라가는 불길도 차단하고. 마정석의 빛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 거야.”
“이번에는 보는 눈이 많았죠. 어떻게 할까요? 입을 막을까요?”
“아서라.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 잘나신 가주님이 알아서 처리하고 있을 거야. 그렇게 큰 소란도 아니지 않나? 뭐, 우리보다 이 일이 알려지면 곤란해할 귀족분들이 많으니 어련히 처리하겠지.”
이곳에서 몇십이 죽었든, 몇백이 죽었든. 그런 건 어디에서도 회자되지 않는다.
달이 지고 해가 뜨면 없던 일로 취급될 게 뻔하다.
“정말로 썩어빠졌어.”
캘러미티와 국경을 대치하고 있는 세인트 월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마족과 검을 맞대고 있는 루드비히 령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지금의 황도는 가축들로 가득하다.
“가끔 지킬 필요가 있는지 궁금해진다니까.”
“도련님.”
“알고 있어. 그래도 지켜야지. 백성들이 무슨 잘못이야.”
결국, 죽어나는 건 항상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이니까.
수없이 많은 묘목의 뿌리는 말라비틀어진 시체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고 있었다.
끔찍한 모습이다. 과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입맛이 찝찝해진 셀렌느는 고개를 들었다.
기분 탓일까, 그곳에서는 연기가 아닌 다른 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