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황도(1) (166/200)

 # 166

황도(1)

신성 델리아 제국, 황도 블러드 로열.

대륙 내에서도 강대국으로 꼽히는 제국의 수도는 역사적인 고도(古都)였다. 천 년이 넘게 이어진 제국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적의 침입을 허락한 것은 손에 꼽는다. 그 막강한 마족도 블러드 로열에만큼은 손댈 수 없다. 제국 신민들이라면 세 살배기 아이들도 알고 있다. 황도를 비추는 고귀한 빛이 있는 이상, 그들의 수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루미에르 교의 총본산.

다프네 신전에는 한때 블러드 캐슬 최상층에서 보관 중이던 마정석이 있었다. 마정석에서 흘러나온 마나는 마탑의 마석들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황도 전역으로 퍼지는 마법진을 형성했다. 실처럼 엉키고 설킨 마나는 신성력과 엮여 다시는 없을 기적을 가져왔다.

제국을 침입하는 외적에게는 심판의 빛을.

제국을 수호하는 성자에게는 축복의 빛을.

샹들리에 밑에서 부유하는 마정석을 바라보던 프랑소와 성녀는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너머에는 잔을 흔드는 기분 나쁜 남자가 있었다. 한쪽 눈을 장식한 모노클의 디자인이 저번과는 다르다. 테를 따라 이어진 알에 박힌 문양은 오망성이다. 카라스 공방에서 만든 마도구다. 성녀의 시선을 느낀 셀렌느 후작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얼굴 좀 피시지요. 모처럼 예쁜 얼굴이 망가지십니다.”

“능청스러운 연기는 그만두세요. 제 심기를 어지럽히는 건 바로 당신이지 않습니까.”

“불쾌하셨습니까?”

“네, 무척이나요.”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모습을 드러내겠죠. 마도병단이 움직이고 있는 이상 꼬리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쫓기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그러니 더욱 신중하게 움직여야죠. 쓰레기를 분류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답니다.”

스푼 위의 설탕이 잔 속으로 떨어졌다. 설탕은 사르르 녹아들었다.

“루드비히 공작령에서의 일은 정말로 그게 전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군요.”

“보고드린 대로입니다. 물건은 이미 운반되었고, 그곳에 남아있던 것은 찌꺼기뿐이었습니다.”

“여신님의 앞에서 진실을 고하세요, 셀렌느 후작. 클레멘트에는 루미너스 일루젼이 있었습니다.”

“여신님의 앞에서 맹세합니다. 완성품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다.

압둘레이 공화국에서 넘어온 루미너스 일루젼은 루드비히 공작령으로 향했다. 그 경로를 읽지 못했다면 모를까. 크로만 가는 처음부터 물건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루미너스 일루젼은 구했지만 넘겨줄 수 없다. 루미에르 교에 넘기고 싶지 않다. 자신들이 연구하겠다는 말이다.

웃는 얼굴과 달리 속은 시커멓기 짝이 없는 남자다.

이러니까 마법사들은…. 프랑소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엇보다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아침에 있던 신탁 때문이었다.

기다리던 것과 마주하리라.

자신이 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프랑소와 성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야, 정말로 간발의 차이지 않았습니까. 하루만 일찍 도착했어도 물건을 전부 회수했을 텐데 말입니다. 여신님이 조금만 더 빨리 말씀해주셨어도, 이렇게 암계 전체를 들쑤시고 다니는 개고생은 피했을 겁니다.”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군요. 불경한 소리를 자아내는 것은 그 입인가요?”

은빛이 눈부시게 빛난다.

성녀의 의지에 신성력이 답했다. 신전 내부가 경건한 힘으로 차올랐다. 닭살이 돋는 느낌에 셀렌느 후작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장난이 과했다. 스스로도 지나쳤던 것을 인정한다. 외골수 같은 성녀를 앞에 두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장난기가 차오른다고 할까. 지금이라면 하얀 백지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 예술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시길. 작금의 상황이 답답해서 나온 말입니다. 여신님을 모욕하는 뜻은 없었습니다.”

“또 거짓을 고하는군요. 저번에도 같은 변명을 한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랬던가요? 이것 참. 너무 예전 일이라서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원래 피의자는 떠올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길. 이 사태가 끝나고 나면 제가 친히 그대를 재판장으로 인도할 겁니다. 무엇이 옳고, 글렀는지는 여신님이 결정하시겠죠.”

“일이 끝나는 대로 공화국으로 망명해야겠군요.”

“누가 보내준다고 했습니까?”

“성녀님. 프러포즈는 가능하다면 다른 장소에서 부탁드립니다.”

“시답잖은 소리로 신전을 더럽히지 말아줬으면 좋겠군요.”

“제 보고는 그렇다고 치고. 성녀님은 어떻습니까? 뭔가 발견한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회심의 농담을 듣고도 성녀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는다. 셀렌느 후작은 화제를 전환했다.

노골적인 말 돌리기에 성녀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도 최악에 가까운 인종입니다.”

“다행입니다. 가깝다는 건 최악은 아니라는 말이군요.”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입니다.”

후작이나 되는 분이 왜 그리 경박한지, 하고 프랑소와는 잔을 들었다.

노기를 달래듯이 차로 입가를 적신 그녀는 준비해둔 물건을 테이블에 올렸다.

“그 남자의 방에서 발견한 물건입니다.”

“이건 또…. 꽤 진귀한 물건이군요.”

성녀가 올린 물건은 낡은 그릇이다.

셀렌느는 그릇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묘한 마력이 느껴진다. 조심스럽게 그릇을 살펴보던 그는 손끝에 마나를 흘렸다. 찌릿, 하고 마나가 튕겨 나왔다.

“유물에 가까운 마도구입니다. 최소 몇백 년은 됐을 것 같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거기에 마나만 어린 게 아닙니다. 그 물건에는 사악한 마기마저 깃들어 있습니다. 신성력도 소용없습니다. 마치 이 물건이 마기를 만드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그대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마족의 물건이라는 말입니까?”

“그걸 확인해줬으면 합니다. 크로만 가는 대마법사 카라스 님과 연이 닿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라인하르트 각하가 나서준다면 대답을 듣는 건 어렵지 않겠죠.”

마탑이 배출한 제국 최강의 마법사.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는 6서클 대마법사, 카라스 크로만. 교단과 마탑의 사이는 좋지 않지만, 중간에 다리를 놓는 것이 크로만 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성녀의 요청은 사전에 약속한 것처럼 받아들여 지겠지.

하지만 셀렌느 후작의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녀님.”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연락?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카라스 님은 마탑에 있지 않습니까? 근 몇 년 동안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죠. 마탑에 있는 건 맞습니다.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죠. 꼭대기에 있는 공방에 처박힌 지 10년이 넘어가니 말입니다.”

“또 거짓을 고하는 건 아니겠죠?”

“한때는 제 스승님이었던 분입니다.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한 농담 중에서 가장 재밌는 농담이군요. 이번 건 제법 웃겼습니다.”

“성녀님이 평소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말씀이군요. 이제는 아닙니다. 저는 스승님의 마도를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요.”

스승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사라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어딘가 망가진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스승님은 그 정도가 지나친 사람이었다. 공방 안에서 어떤 연구가 행해지는지, 스승님이 평소 사람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제자였던 그는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스승님은 괴물이 되었을 터다.

“스승님에게 이 마도구를 보인다는 건 포기하는 게 좋습니다. 차라리 저희 가문으로 가져가겠습니다. 형님이라면 제가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할지도 모르죠.”

“마도병단장 하렌드 말이군요. 그의 특기는 공격마법이지. 감정과는 거리가 있을 텐데요.”

“마탑에 의뢰할 수는 없습니다.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있죠.”

“그건 당신의 이름을 팔아주세요. 이미 눈 밖에 난 당신은 무슨 짓을 해도 수상하지 않으니까요.”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말입니다. 성녀님은 절 너무 막 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착각입니다.”

“하여튼, 전 이것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셀렌느 후작은 수상쩍은 마도구를 다시 성녀 쪽으로 밀었다.

별수 없나, 하고 한숨을 쉰 프랑소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당을 장악한 신성력이 문 앞에 모인 이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야기에 너무 열중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성녀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 마도구는 제 쪽에서 확인해보죠. 비장의 수가 있으니까요. 가세요, 셀렌느 크로만 후작. 이번에는 실패하지 마세요. 홀리 나이트가 가깝습니다. 그 전에 그 남자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 오세요.”

“알겠습니다. 힘내보죠. 결과가 따라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홀을 나아가는 프랑소와의 뒤로 여사제들이 따라붙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이들은 각각 성물을 들고 있었다. 은촛대와 루비가 박힌 셉터. 백과 적이 섞인 화려한 교황관(敎皇冠). 별무리 지는 은빛에 화려한 장식물이 걸렸다. 히아신스 꽃잎이 성녀의 발자취를 따라 떨어졌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독실했었을 터인 비오 교황.

이제는 몸을 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그는 지금의 성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바깥으로 향하는 성녀의 뒷모습을 보며 셀렌느는 고개를 저었다.

“교황 성하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성녀님밖에 없을 겁니다.”

면사 위로 밝은 햇빛이 떨어졌다.

바깥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다프네 신전에서 나온 프랑소와 성녀는 붉은 카펫을 따라 나아갔다. 새하얀 설원을 걸어가는 것 같다. 맨발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족적을 남겼다. 붉은 셉터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중앙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로 나온 성녀는 손을 들었다.

“성녀님!”

“축복이 있기를!”

“여신님께서 굽어살피소서!”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신도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황도에 도착한 일행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다프네 신전이었다.

제국의 신도들이 반드시 들려야 하는 순례길이다. 황도의 중앙대로를 통과한 아가씨의 입은 닫힐 줄 모르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활력이 넘치고, 여신님의 이름을 읊는 신도가 가득하다. 수도를 비호하는 마정석의 빛이 그들 모두를 비추고 있었다.

“있지, 있지. 알! 성녀님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아가씨. 마탑에는 따로 연락해두겠습니다.”

알베르트가 직접 갈 필요도 없다. 사용인 중 발이 빠른 하인을 시켜 서신을 보낸다.

신이 나서 신전으로 향하는 아리시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 뒤를 사자기사단과 사용인이 따라붙었다.

“나는 여기서 갈라질게.”

일행에게서 떨어진 유피는 알베르트에게 말했다.

“마탑 쪽은 맡길게. 마족이 들어서는 걸 유쾌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암계를 돌아볼 생각이라면 사소한 정보라도 듣고 움직이는 편이 좋지 않겠어?”

“어머, 누가 누구에게 조언하는지. 걱정하지 마. 우리도 나름대로 묘수가 있으니까.”

황도의 어둠은 신전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중앙대로까지 나온 지금 헤어지는 편이 움직이기 좋으리라.

“혼자서 괜찮겠어?”

“혼자?”

유피는 소피아와 란랑을 돌아보았다.

소피아는 분수에서 반짝이는 빛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란랑은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앞에서 떨어지는 빛을 향해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알베르트와 유피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어흠, 하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뭔가 믿음이 안 가는데.”

“할 때는 하는 아이들이야.”

저렇게 보여도 말이야, 하고 마녀는 덧붙였다.

그녀는 주머니 안에서 한 물건을 꺼냈다. 유피는 은빛으로 빛나는 장신구를 알베르트의 옷깃에 달았다. 장신구의 정체는 까마귀 모양을 한 브로치였다.

“받아둬.”

“이건?”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마도구야. 원래는 낙양에서 줄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별로 여의치 않아서 건네주지 못했어.”

“낙양의 도공이 사용한 그 물건이랑 같은 건가 보네.”

“그래. 그때 그 아저씨들이 쓰던 마도구에서 영감을 얻었어.”

알베르트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게 기뻤는지,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럼 조금 이따가 봐.”

“아, 유피.”

“응?”

유피의 발걸음을 잡은 알베르트는 그녀를 안았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팔 안에 들어온 그녀는 알베르트를 거절하지 않았다. 유피는 두 손으로 알베르트를 꼭 마주 안았다.

“몸조심해.”

“알도.”

신전 반대편을 향해 유피는 걸어갔다.

알베르트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마탑은 이 다음에 가실 생각입니까? 그럼 유피에르와 합류하는 것은 늦어지겠군요.]

‘혹 모르지. 그녀가 먼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지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야 원, 자네에게는 무슨 말을 못 하겠구먼.’

가시 박힌 천칭의 대꾸는 익숙하다.

알베르트는 빨리 오라는 아가씨의 부름에 답했다. 저 멀리 다프네 신전의 장엄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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