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아리시엘은 마녀가 싫다
“잊은 것은 없죠? 고양이 베개는 제가 챙겨 넣긴 했는데. 그게 없으면 못 주무시잖아요.”
“그만해.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끊임없이 날아오는 짐에 아리시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계속 가져다주는 것은 유모인 노아다. 이미 알베르트가 필요한 물건을 전부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혹시 모른다면서 물건을 챙겨오고 있었다.
“아가씨가 몰라서 그래요. 수도에는 말이죠. 무서운 사람들이 한가득이랍니다. 클레멘트와는 달라요. 가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노아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아리시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듯이 알베르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집사는 아가씨의 곁에 있지 않았다. 별무리 지는 은빛이 반짝인다. 마음에 안 드는 인형사와 함께 선 집사는 에일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선녀님에게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미안해. 편히 쉬고 있는 네 손까지 빌리게 될 줄은 몰랐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신설교는 황녀 전하께 올린 약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천지신명을 따르는 종은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전하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자매들에게는 내가 따로 연락해둘게. 도움을 청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산의 마녀님은 세계수에 오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마녀의 밤이 열렸거든. 후임자가 금방 정해질 거야.”
호수의 마녀만 투표하면 끝나거든. 그래봤자 강의 마녀가 되겠지만. 하고 유피에르가 덧붙였다. 예를 갖춘 에일린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입이 댓발처럼 뛰어나온 아리시엘은 혀를 찼다.
“영 저기압이네요, 아가씨.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실까요. 모처럼 황도로 향하는 데 말이죠.”
“말조심해, 마린.”
노아 대신 수행원으로 뽑힌 쌍둥이 시녀는 이 상황이 즐거운 모양이다.
아가씨의 시선을 확인한 마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뺏기셨나요? 알베르트 님도 너무하시네.”
“루인.”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따끔하게 말해놓겠습니다.”
“마린이랑 함께 다음 마을까지 짐칸에 타 있어.”
“아가씨!?”
“알겠습니다.”
반론은 허락하지 않는다.
“자, 잠깐만요. 농담이에요! 아가씨. 아가씨이이이!?”
루인의 손에 잡힌 마린은 마차로 질질 끌려갔다.
그사이 이야기를 마친 에일린이 아리시엘에게 다가왔다.
“정말 가는 거야?”
“서운해하실 필요 없어요. 아가씨는 천지신명의 사랑을 받고 계신 분이니까요. 분명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답니다. 훌륭하게 성장하신 아가씨의 모습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에일린은 마주 모은 아리시엘의 두 손을 감싸 안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본 아리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다시 만나자. 약속이야.”
“물론이죠.”
아가씨의 곁으로 돌아가는 알베르트를 향해 노아가 다가왔다.
“알.”
“네, 누님.”
“아가씨를 부탁해.”
“새삼스러운 말이네요.”
노아는 알베르트를 안았다.
어느새 자신보다 커진 소년은 든든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다시 볼 때는 남편분도 있으면 좋겠군요.”
“네가 안 말해도 좋은 남자를 데리고 있을 거야.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이 노아의 얼굴에 떠올랐다.
*&*
마차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창밖에서 흘러가는 광경은 무료하다. 몇 번이고 본 것 같은 도로가 이어지고, 신기하던 동식물의 모습도 질렸다. 아직 마을까지 도착하려면 3시간은 넘게 남았다. 아리시엘은 엉덩이로 두 손을 넣었다. 솜이 잔뜩 들어간 쿠션은 잔걱정이 많은 노아가 챙겨준 것이다. 잠시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던 그녀는 동승한 인형사를 바라보았다.
별무리 지는 것 같은 은빛이 흘러내린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고 싶지 않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리시엘은 찻잔을 들었다.
”…….”
“…….”
묘한 신경전이 이어진다.
두 사람을 중재할 알베르트도. 다른 사용인들도 지금은 이 자리에 없다. 사용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마차를 경호하고 있었다. 역시 노아라도 데려오는 편이 좋았던 게 아닐까. 좀이 쑤신다는 듯 아리시엘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고 보니 당신, 마족이라고 했잖아?”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아리시엘이었다.
두꺼운 고서를 읽던 유피에르가 시선을 올렸다. 인형사의 관심을 끈 소녀는 말을 이었다.
“마족은 사람을 먹는다고 들었어. 사실이야?”
“물론이야. 특히나 당신처럼 어린 소녀의 고기를 최고로 쳐.”
“…….”
“거짓말이야.”
하얗게 질린 아리시엘의 얼굴을 본 유피에르가 말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다음 행동에 들어서 있었다.
“들었어? 들었지, 알? 유피에르가 날 잡아먹는다고 했어!”
마차 문을 연 아리시엘이 다짜고짜 소리쳤다.
이 무슨 몰상식한…….
유피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은 알베르트가 마차를 돌아보았다.
“농담이겠죠.”
“농담이라도 알은 내가 그런 말을 들어도 좋다는 거야?”
“유피. 너무 아가씨를 괴롭히지 말아줘.”
“여자들의 대화야. 눈치 없게 남자가 끼어들지 마.”
“거짓말이야!”
“벌써 사이가 좋아지셨군요. 역시 아가씨입니다.”
“아니라니까!”
태연한 알베르트의 대답에 아리시엘은 얼굴을 구겼다.
마차가 흔들렸다. 덜컹, 하고 소녀의 몸이 앞으로 무너진다. 유피에르의 발치에서 은빛 실이 흘러나왔다. 문을 잡은 마나는 바깥으로 떨어지는 소녀를 받아냈다.
“으겍.”
문과 그대로 부딪친 아리시엘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구나, 너. 저택에서 말괄량이 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데?”
“다, 당신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소녀는 자리로 돌아왔다.
덮었던 고서를 편 유피에르는 다시 독서로 돌아갔다. 딱히 흥미가 일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아리시엘은 코끝을 문질렀다. 찌르르한 통증이 남아 있을 뿐, 붉은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마족이 우리 수도에는 무슨 볼일이야?”
“이야기라면 가주와 충분히 나눴다고 봐. 굳이 너한테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네.”
“나는 루드비히의 아리시엘이니까. 알 자격이라면 충분해.”
자신만만한 소녀의 대답에 유피에르는 실소를 흘렸다.
“그건 자격이 아니라 억지라고 하는 거야.”
“어, 억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말해줄게. 이 몸은 네 가신이 아니야. 어리광은 집에서나 부려, 아리시엘 루드비히.”
“…….”
차갑게 흘러나온 대답에 아리시엘이 두 눈을 깜박였다.
곧 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말 다 했어!?”
“자리에 앉아, 아리시엘. 레이디는 언제라도 고고하게 있어야 하는 법이야. 설령 면전에서 모욕을 당했더라도 그것만 지킨다면 반절은 갈 수 있어. 레이디의 마음가짐조차 모르다니, 대체 알에게서 뭘 배운거래.”
유피에르는 시종일관 여유를 머금고 있다.
유유자적하게 고서에서 눈을 뗀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리시엘을 볼 수 있었다.
“응?”
작은 손이 그녀의 머리로 뻗어졌다.
설마, 하는 유피에르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났다.
“자, 잠깐!”
“시끄러워. 당신, 진짜 싫어!”
아리시엘은 별무리가 지는 은발을 붙잡고 쥐어뜯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을! 꺅! 지금 날 문 거야? 너, 공녀라는 아가씨가……!”
“뭘 내려다보는 거야. 똑같은 레이디면서!”
“어떤 레이디가 이런 짓을 해?”
“내가 해!”
마차가 흔들렸다.
바깥에서의 충격 때문이 아니다. 뒤엉켜 쓰러진 두 여자의 육탄전 탓이다. 두 손은 유피에르의 머리를, 입으로는 그녀의 손을 깨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싸움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노아가 말했다.
여자들의 싸움은 기가 죽는 순간 끝나는 법이라고. 만약 여의치 못한 상황에 빠져 승기를 점할 수 없다면, 필승법을 취하라고 했다.
「어떤 여자라도 머리를 쥐어뜯기는 순간 바보가 되는 법이에요.」
“너, 너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노아의 말이 맞았다.
넘어진 유피에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조금 전 반응했던 은빛 실은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그녀는 똑같이 손을 들어 아리시엘의 머리를 붙잡았다.
“놓아!”
“사과할 때까지 안 놓을 거야!”
꺅꺅거리는 비명이 커진다. 두 사람의 손에 은빛과 금빛을 머금은 실이 차오른다. 얼마나 세게 쥐어뜯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존심 싸움에 가깝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라붙는 두 여인의 싸움이 멈춘 건, 질렸다는 표정으로 문을 연 알베르트를 보고 난 뒤였다.
한껏 단장한 얼굴이 볼품없이 망가져 있다.
서로 뒤엉켜 쓰러진 두 사람을 보며 알베르트는 말했다.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어딜 봐서!?””
두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
저녁때가 되어서야 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여관에서 짐을 풀었다. 건물 곳곳에는 빛나는 검 문양이 보였다. 반나절을 꼬박 달렸지만, 아직도 공작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근처에서는 나름 유명한 맛집이라는군요.”
“기대해도 되는 거야?”
“네, 특히 애플 미트파이가 맛있다고 하더군요. 차와도 잘 어울리고요.”
“나는 그거 별론데.”
“한 번 드셔보고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다시 주문하셔도 괜찮습니다.”
“음, 알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아가씨는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유피 차례다. 아직도 아리시엘이 쥐어뜯은 부분이 아픈지, 그녀는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유피는 어떻게 할래?”
“파이에 고기가 섞인 거잖아? 나도 썩 내키지는 않네.”
“황녀 전하는 입맛이 까다로우니까요.”
옆에서 란랑이 덧붙였다.
그 표정이 썩 부드럽지 않은 것은 분명 그만한 고생을 했기 때문이리라. 한쪽에서 동의한다는 듯 소피아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알이 추천하는 거지? 그렇다면 한 번 먹어볼게.”
잠시 후, 주문한 애플 미트파이가 테이블 위로 나왔다.
아리시엘과 유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파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 그릇으로 가져온다. 사과향이 진하다. 파이를 살펴보던 두 아가씨는 입으로 포크를 가져갔다.
“제법 괜찮네. 식감이 부드러워.”
“고기 상태가 좋은 것도 있지만, 향신료로 잘 살린 게 더 크네.”
“그런가요? 이 크림이 살린 거 아니에요?”
소피아의 물음에 유피는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크림은 냄새를 잡기 위해 쓴 거야.”
“하지만 그 크림의 맛이 또 절묘한 게 좋네.”
마음에 든다는 듯 아리시엘이 파이로 손을 옮겼다.
“제법이네, 당신.”
“인정할게. 혀는 꽤 고급스럽네.”
황홀한 표정으로 맛을 즐기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파이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아리시엘도 그렇지만 유피가 먹는 양은 적지 않다. 생각하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다. 파이가 난도질당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술은 안 마시는 거야?”
“술?”
과일 음료를 마시는 유피를 보며 아리시엘이 물었다.
“응. 레이디라면 술에 취하지 않고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들었어.”
“당연한 걸 말하네. 그냥 마시고 싶은 술이 없어서 들지 않는 것뿐이야.”
알이 묘한 표정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유피는 술을…….
“그런가요. 그럼 제가 몰래 챙겨온 비장의 버터 맥주를…….”
“그러지 마세요.”
자리를 비우려던 마린을 소피아가 붙잡았다.
한쪽에서 루인이 언제 그걸 빼돌린 거야, 하고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허세 부리시는 거예요.”
“…….”
작은 속삭임에 알베르트를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누가 애고, 누가 레이디인지.
알베르트가 없는 사이 유피가 조금 유치해진 느낌이다.
“알. 홍차 좀 부탁해도 될까?”
“나도 부탁할게.”
“알은 당신의 집사가 아니거든?”
“알고 있어. 식후 정도는 상관없잖아?”
찻잔을 든다.
디저트로 나온 마카롱과 홍차를 마시며 유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알의 차는 좋네.”
“같은 생각이야.”
“아, 그 마카롱. 마지막에 먹으려고 남겨놓은 건데.”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너 말이야.”
티격태격하면서 간식을 드는 두 사람을 보며 알베르트는 지나가듯이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꼭 자매 같네.”
“뭐?”
“자매?”
유피와 아리시엘은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소녀와 여인은 입을 열었다.
“누가 이런 기분 나쁜 여자를…….”
“그러네. 이런 동생이라면 조금 괜찮을지도.”
“…….”
아리시엘과 달리 유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가씨는 입을 벙긋거렸다. 따스하게 바라보는 알베르트의 시선을 느끼고, 유피를 바라본 그녀는 소리쳤다.
“뭐,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