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다시 찾은 고성 (163/200)

 # 163

다시 찾은 고성

이튿날. 알베르트는 금지된 숲을 거닐고 있었다.

저택은 아가씨의 채비로 바쁘기 짝이 없었다. 본래라면 알베르트도 그중 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이렇게 유피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와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숲을 나아가고 있는 건, 수도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스레 뒤를 돌아보는 알베르트를 보고 소피아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베르트 오빠. 다들 저와는 달리 실력이 대단하시던데요.”

“안심하기에는 일러. 특히 노아 누님은 말이지…….”

형편 좋은 말을 하기는 힘들다고 할까.

분명 쌍을 이루는 물건이 한쪽만 준비된 경우가 다반사였다. 장갑이나 양말은 그렇다고 쳐도, 속옷의 종류마저 착각하는 건 문제가 있었다. 쌍둥이 자매가 손을 빌려주고 있었지만,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피아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백이 대조를 이루는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낙양의 빈민가에서 만났던 남장 소녀가 이렇게 컸을 줄은 몰랐다.

소녀에서 벗어나지 못한 란랑과 달리 그녀는 훌륭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유피 왈. 아직 시녀로 써먹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는 모양이지만, 그건 차후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겠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소피아가 진심으로 유피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유피도 그녀를 옆에 두고 기용하고 있는 거겠지.

“그럼 네가 남아서 도와주지 그랬어?”

“내가 왜? 우리 아가씨는 아니잖아.”

“너 그런 점은 똑 부러지네.”

란랑이 질렸다는 목소리를 냈다.

평소에는 멍한 주제에 선은 제대로 긋고 있다. 바보는 아니라는 거겠지.

“유피. 수호자가 전부 쓰러졌다는 게 사실이야?”

“사실이야. 그러지 않고서는 아저씨가 날 부를 이유가 없어. 난 영락없이 네가 다 쓰러뜨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봐?”

“암독제를 쓰러뜨린 건 최근의 일이야. 하지만 천살귀는…….”

만나지 못했다.

애초에 무덤에서 에르체베트가 끌어낸 것은 암독제였다. 천살귀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혹은 그녀가 알아채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생각해보자. 무덤에서 두 수호자가 나왔지만, 그녀가 손을 뻗은 것은 암독제만이다. 천살귀는 본래 살수라고 들었다. 은잠술에 능한 무덤 수호자는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곳이라는 건……. 높은 확률로 사부님이 계신 고성일 확률이 높겠지.

무덤 수호자들은 하나 같이 천마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시대의 끝을 보고자 했던 녹림왕.

자신의 감정에 답해주길 바랐던 사희.

그 곁을 보필하고자 했던 암독제.

그렇다면 천살귀 또한 주군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겠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네가 가도 아저씨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지? 그럼 아저씨는 천살귀와 마주하고 교전을 벌인 걸 수도 있어. 바보 오빠도 그렇지만, 무인들은 말보다 주먹을 더 좋아하니까.”

“나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봐. 하지만 천살귀를 쓰러뜨렸다면 왜 문을 열어주지 않은 거지?”

“열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연 게 아닐까? 아저씨의 몸에 어떤 이상이 일어났을지도 몰라. 잊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상태는 망자야. 그것도 마지막 남은 사념이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아.”

“에르체베트가 모르고 있었던 건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암독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어.”

깊은 한숨 소리가 났다.

유피는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한 일이니까. 충분히 가능해.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쓴 거겠지.”

“…….”

알베르트의 생각보다 에르체베트의 점수는 낮은 모양이다.

상상 이상으로 어설프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유피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그래서 란은 용의 무덤에서 누구와 만난 거예요?”

물음을 던진 것은 란랑이었다. 유피도 궁금하다는 듯 알베르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찬란한 금빛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다.

아가씨의 모습이 떠오른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만났어.”

“유령과 만난 거예요?”

“딸아이 같은 사람이야.”

“…….”

이제 그 시절의 아가씨와는 만날 수 없다.

마음속의 매듭은 지었지만, 기분이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가씨는 이제 쉬겠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셨다는 말이겠지. 그러나 정말 그걸로 괜찮았던 걸까. 사실은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을 가정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것은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아가씨기 때문이리라.

“란은 유부남이었나요?”

“아니.”

“근데 무슨 딸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의붓딸 같은 거예요?”

“그만, 란랑.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말이잖아.”

이야기에 들어온 것은 유피였다.

알베르트의 목소리에 어린 그리움을 읽어낸 것인지 그녀는 차분히 물었다.

“납득은 한 거야?”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부탁을 받았고. 마지막 명을 받았다.

그렇다면 알베르트는 걸어갈 뿐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어.”

“그래. 누구나 마찬가지지.”

“그래도 그들의 마음은 우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 알고 있잖아, 알?”

“…….”

세실리아 님을 보낸 유피가 하는 말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산 사람은 자신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가씨는 이곳에 있으니까.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뛰어온 삶이다.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고마워, 유피.”

“뭘 새삼스레.”

머뭇거리지 말자. 망설임을 버리고 걸어가자.

이 길을 걷는 건 혼자가 아니니까.

유피는 걸음을 멈췄다.

결계에 도착한 것인지, 그녀의 손에서 은빛 마법진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일그러진다. 뭉개진 광경 속에서 나타난 것은 고성이었다. 언제나 사부가 지키고 있던 문이 네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낡았지만, 상처 하나 없던 문이 지금은 반쪽으로 쪼개져 있었다. 사부님이 지키고 있던 바로 그 정문이다. 불안한 예감이 든다.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친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아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공간 속으로 손을 넣은 유피는 붉디붉은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꺼냈다.

“소피아랑 란랑은 여기서 대기. 들어가는 건 알과 나만.”

“유피도 여기에 있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런 배려는 필요 없어.”

내공을 활성화한 알베르트는 주변을 경계하며 안쪽에 들어섰다.

몇 년 만에 방문한 고성의 정원은 숲처럼 변해 있었다. 상처 입은 나무와 정리되지 않은 풀.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들이 시야를 가린다. 듬성듬성 박살 난 지면이 눈에 들어왔다.

“성의 결계를 뚫고 들어온 게 아니야.”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게 사부님이 열어줬다는 말이야?”

“결계가 부서지는 걸 피한 것 같아.”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해제한 것은 그녀의 힘이다. 그 이후에도 결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걸 봤을 때, 아직 사부님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성 곳곳에 남은 흔적을 살펴보며 걷는다.

무언가 큰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 남은 무공은 분명 사부님의 것이다.

그럼 다른 한 명은 누구의 것일까.

성 곳곳에 남은 흔적은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다.

이것은 천살귀가 남긴 흔적이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유피. 사부님은 어째서 이 성에 남아 있는 거야?”

“글쎄. 어머니와 나눈 약속 때문이지 않을까? 그 이전에는 왜 남아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아르웬 성녀와? 혹시 알려줄 수 있겠어?”

알베르트의 물음에 유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말했었지? 사념이 전부 사라지면 마지막 남은 사념은 의지를 갖게 된다고. 그리고 생전 집착했던 장소에 머무르게 되지. 그런 의미에서 아저씨는 정말 특별해. 처음 아저씨를 관리하고 있던 것은 할아범이었어. 당시에만 해도 아저씨는 건드릴 수 없는 괴물이나 다름없었어.”

사슬에 묶이지 않은 악마.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다가오는 모든 것을 부술 뿐이다고 들었어.

유피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위험한 건 알지만 밖으로 나갈 기미는 보이지 않아. 그러나 가진바 힘은 강력하니 그냥 둘 수도 없고. 그래서 할아범이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이곳에 모인 이성 없는 망자들을 관리하면서 말이지. 그게 달라진 것은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 이 성에 오게 되고 난 이후야.”

“성녀의 힘이 영향을 미쳤나 보네.”

신성력에 반응한 걸까? 알베르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힘에 반응한 아저씨는 이성을 되찾았다는 모양이야. 혹은 시기가 좋았던 건지도 몰라. 다른 곳에 있는 사념들이 전부 해결된 건지도 모르니까. 뭐, 진실이 어떤 쪽이든 간에 아저씨는 정신을 회복했고,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했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야?”

“그건 나도 알 수 없지. 아저씨 본인도 그 이유를 모르니까. 내가 아는 건 딱 하나야.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아저씨에게 날 부탁했고, 아저씨는 최대한 그 의사에 답해 이 성을 지키는 문지기를 자처했어.”

사부님이 성을 지키던 이유.

문에서 벗어나지 않던 것은 그런 이유다고 유피는 이야기를 마쳤다.

“슬픈 일이네.”

알베르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용의 무덤에서 검성과 만나 그는 사부님이 이곳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검성도 그곳에서 호적수가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망자로 변한 몸을 억지로 부여잡은 채, 오지 않을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망자가 되어버린 채 언젠가 찾아올 호적수를 기다린다. 서로의 무를 알아볼 수 있는 그 남자가 돌아오길 사부님은 기다리고 있었다.

“알.”

“알고 있어.”

정원의 고목.

죽어버린 나무 위에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삿갓을 쓴 스켈레톤은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흠집 하나 보이지 않던 그 백골 위에는 푸른 이끼가 자라나 있었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기어 다닌다. 꺼져버린 안광은 더는 빛나지 않는다. 늑골을 가르고 들어간 것은 날카로운 비수다.

움직이지 않는 그 스켈레톤은, 분명 사부님이었다.

“사부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베르트가 고성을 찾아도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은, 이미 이런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던 걸까. 신화의 시대를 풍미했던 무인의 끝이 이런 건가. 절대 웃을 수 없는 모습이다.

“천살귀를 쓰러뜨린 건 아저씨였나 보네.”

고운 모래 위에 쌓인 까마귀를 닮은 가면을 보며 유피가 중얼거렸다.

“아저씨.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사부님에게 다가가는 유피를 알베르트는 손으로 막았다.

“알?”

“물러나 있어, 유피.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이야.”

사부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안광이 돌아온다. 그 눈에 어린 감정은 적의다.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알베르트는 검을 들었다.

펼치는 무공은 사부님에게 배운 무공이 아니다. 호적수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렸던 무인의 마지막 망념에 답한다.

루드비히의 검술.

망자가 되어서까지 수련의 끈을 놓치지 않았던 검성의 마지막 검법을 펼친다.

“가겠습니다, 사부님.”

『---!』

마음 깊은 곳의 무언가가 찢겨나가는 절규가 울려 퍼졌다.

사람의 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단순한 이명. 말로 채 만들지 못한 비명이 정원을 채웠다.

피부가 찌릿찌릿 떨려온다.

사자후와는 다르다. 주체할 수 없는 내공을 주변에 퍼뜨리는 것과 같다. 살기라고 해야 할까. 투기라고 해야 할까. 주변을 찢어내는 듯한 기운이 알베르트를 노렸다. 유피가 자아낸 마법진이 떠오른다. 다가오는 위협을 잘라낸 그녀는 발을 뒤로 뺐다. 더는 간섭하지 않겠다. 은빛이 사라진다. 알베르트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두운 그림자가 피어오른다.

사부님의 백골이 어둠에 잠식되어간다. 해골의 몸을 타고 올라간 검은빛의 형체는 어떤 형태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육신을 흉내 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연기밖에 피어나지 않는다. 검은 손이 지팡이 검을 쥐었다.

붉은 안광이 알베르트의 모습을 담았다.

착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입가에 웃음이 떠오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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