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집사와 마녀(2)
알베르트는 유피와 함께 저택의 별장으로 돌아왔다.
오전까지만 해도 교류단으로 발 디딜 틈이 없던 곳이다. 그러나 교류단이 돌아간 지금, 소란스러움이 가시지 않던 복도는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손님들이 빠진 방은 휑하기 짝이 없다. 복도를 나아간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별장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방이었다.
노크는 필요하지 않았다.
유피는 거리낌 없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쪽에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꼬박꼬박 졸고 있는 것은 소피아다. 잠든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등받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던 란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온 유피와 알베르트를 보더니 늦었네요, 하고 책을 덮었다.
“일어나, 소피아. 출발할 시간이야.”
“음냐. 벌써 밥 먹을 시간이야?”
“밥이 아니라 출발할 시간이라고.”
란랑은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소피아의 볼을 잡았다. 그 손을 유피가 막았다.
“예정이 바꿨어. 조금만 더 머무를 거야.”
“란 때문인가요? 이야기가 잘 안 풀린 모양이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굳이 말할 것 없이 란만 만나서 가자고. 인족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라니까요. 그랬으면 이런 웃기지도 않은 연극은 안 해도 됐는데.”
“난 마음에 들었는데? 란랑의 연기. 솔직히 괜찮았어.”
“그런 소감은 제가 없는 데서 말해요.”
말과는 달리 썩 싫은 건 아닌지, 란랑은 얼굴을 붉혔다.
일어나지 않는 소피아를 대신해 그녀는 안쪽에서 찻잔을 꺼내왔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식거리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목을 축이기 위한 싸구려 홍차만이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찻잎이라도 좀 얻어올 걸 그랬다.
입으로 잔을 가져간 알베르트는 떫은맛에 입을 찌푸렸다.
예전의 유피라면 그대로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맛이다.
“잘도 참고 마셨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적응되면 나름 마실만 해.”
떫은 홍차를 마신 란랑이 말했다.
“뭐부터 이야기하실 거에요? 역시 북부 전선에서 일어난 일부터 말씀하실 건가요? 제국에서는 알 수 없는 정보잖아요. 제가 설명할까요, 아니면 황녀 전하가 설명하실래요?”
“머리, 잘라버렸네.”
“거추장스러워서.”
“잘 어울려.”
“어머, 짧은 머리도 취향인가 봐?”
“유피니까.”
“…….”
유피는 말없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봄을 맞이한 저택의 정원은 푸르게 물들고 있었다. 뛰어난 정원사가 있는 덕일까. 틈틈이 보이는 울긋불긋한 색조는 예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언니가 세계수의 정상에 올랐어.”
“에르체베트에게 들었어.”
“그래? 그 아이랑 만난 모양이네. 정말 철이 없다니까, 그 애도.”
“세실리아 님은 웃으면서 가셨어?”
“너무 웃어서 문제였지. 사실 웃다가 죽은 게 아닌가 싶어.”
“그 사람답네.”
바보 같아, 하고 유피는 중얼거렸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그리움이었다.
알베르트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남은 차를 전부 입안에 털어냈다. 술은 아니지만, 세실리아 님을 보내는 고별주다.
“저기…….”
분위기를 읽고 있던 란랑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이야기 안 할 거면 저, 약 좀 만들러 가도 될까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 알이 떠나고 난 뒤 우리는 마녀의 산으로 향했어.”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
“원래는 혼자 갈 생각이었지만, 보다시피 짐이 두 명이나 따라붙었어.”
“짐이라고요? 짐? 확실히 소피아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행길이 심심하지는 않았겠네.”
유피는 잠꼬대 중인 소피아와 퉁명스러운 표정의 란랑을 보았다.
“그렇네. 나 혼자였으면 재미없었을지도 몰라. 거기에 란랑에게는 조금 신세를 졌거든.”
“어쩐 일이래요. 황녀 전하가 이리 솔직하게 말씀하시고. 괜히 무섭네요.”
“유피.”
“무슨 문제라도 있어?”
되려 뻔뻔하다. 이런 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건가.
“이야기로 돌아올게. 마녀의 산으로 간 건 월편의 조사가 어떻게 진척되는지 알고 싶었거든.”
“견본을 산으로 보냈다고 했었지.”
“그래. 기억하고 있나 보네.”
성찬식을 통해 얻은 월편은 아니다.
특별한 시기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불로불사의 월편은 얻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선녀가 내주었던 것은 평상시에 만들 수 있는 월편이었다. 신성력과 마기의 융합. 성마력을 바탕으로 제작된 월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자매들도 그렇지만, 언니가 많이 힘써줬어. 산을 떠날 때쯤이면 거의 조사가 끝났거든. 월편의 이점이라고 한다면 알도 알다시피, 우리 종족의 망자화를 막을 수 있다는 거야. 저주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대량으로 생산이 가능해지면 치료하는 것은 가능하겠지. 실제로 저기서 자고 있는 소피아는 마족이라기보다는 인족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
“지아는 원래 혼혈이었잖아. 순혈도 상관이 없다는 거야?”
“저도 마찬가지예요, 란. 봐요. 지금은 성수에 닿아도 멀쩡해요. 신성력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제국을 돌아다닐 수 있겠어요?”
품에서 성수를 꺼낸 란랑은 뚜껑을 열었다. 흘러나온 성수가 손을 적셨지만, 그녀의 손은 타들어 가지도. 상처가 생기는 일도 없이 멀쩡했다. 란랑은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마족은 신성력을 극복했다.
“문제는 해악이었지. 알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월편을 악용한 월중 장로의 최후가 어땠는지.”
“악마를 불러왔지.”
“맞아. 그리고 제국에서 떠돌고 있는 이 루미너스 일루젼이라는 약은, 월편의 레플리카에 가까워.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악마의 힘을 불러오는 게 가능해. 나는 이 불길한 열매를 북부와 공화국에서 발견했어.”
알베르트는 모하메드 의장이 가져왔던 루미너스 일루젼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악마화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공화국에서는 운이 좋았어. 아직 루미너스 일루젼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거든.”
“의장들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암계에서 허가받지 않은 약이 떠돌기 무섭게 확인에 나섰거든요. 덕분에 일이 커지기 전에 해결할 수 있었어요.”
다행이었다니까요, 하고 란랑은 잔을 들었다.
“공화국에서의 일을 끝마친 저희는 제국으로 향했어요. 공화국에서 약이 퍼지는 것은 막았지만, 약의 흐름은 주류 장사와 함께 제국으로 향하고 있었거든요. 유통 루트를 숨기고 싶었던 건지, 이런 외곽까지 이용해서 말이죠.”
“알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이 루미너스 일루젼은 사람을 양분으로 삼아. 일반인을 먹잇감으로 삼아 자라난 루미너스 일루젼은 중독성 강한 마약에서 끝나지만, 특정 사람을 재료로 삼았을 경우 귀기 어린 힘을 안겨줘.”
알베르트는 도둑 길드에서 얻은 루미너스 일루젼을 꺼냈다.
조각상의 여물지 않은 이 열매가 마약이라는 말이다.
“일반적인 물건은 아니야. 마도구.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의 손길이 닿아 있어.”
“특정 사람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거야?”
“제국의 신민.”
“신민?”
“루미에르 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제국의 인족들은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지니고 있어. 개화할 만큼 큰가, 작은가의 차이가 있을 뿐. 즉 루미너스 일루젼이 신성력을 지닌 이를 양분으로 삼았을 경우 완벽한 열매가 맺히는 거야.”
“…….”
세 사람이 루드비히 영지까지 오게 된 것은 그런 연유였다.
“이곳에 있던 루미너스 일루젼은 수도로 향했어.”
“루드비히 영지에는 루미에르 교의 신전이 없으니까. 목적을 이루려면 교단의 총본산이 있는 블러드 로열로 향하는 게 맞아. 척박한 땅보다 풍요로운 대지를 노리는 게 좋잖아? 그래야 신선한 물건이 완성될 터이니.”
“녀석들의 목적은?”
“지옥도의 재현이지 않을까.”
평탄하게 흘러나온 유피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양양에서 있었던 참사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 지옥도를 다시 블러드 로열에서?”
“그래, 황도 전체를 제물로 삼는 거지.”
그런 일이…… 가능할까?
다른 곳도 아니고 황도다. 황도 블러드 로열. 신석의 보호를 받는 수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전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루나 평원을 앞에 둔 황도는, 제국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텼다.
“얕은 생각은 버려, 알. 제국의 암계는 이미 녀석들의 손에 넘어갔어. 캘러미티가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어. 놈들은 꼬리를 드러낼 만큼 멍청하지 않아. 아무리 신석이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없어. 지옥도가 펼쳐지고 나면 모든 게 끝이야. 이번에는 나도 자신이 없어. 그때는 언니가 있었으니까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알고 있지? 나 혼자서는 막을 수 없어.”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래, 이제 좀 와닿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지금 우리끼리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왜 인형사로 이름을 높이면서 루드비히 저택을 찾아왔다고 생각해?”
“유피, 설마 정체를 밝힌 건…….”
“제국의 수호자라 불리는 루드비히 가의 힘을 빌리고 싶어. 너희 제국의 일은 너희가 해결하는 게 맞잖아. 안 그래?”
맞아요, 하고 란랑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
이야기를 들은 라시엘 공작은 고심 끝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사무용 책상을 앞에 둔 유피는 흐응, 하고 입술로 손을 옮겼다.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믿지 못하나 보군요.”
“아니, 그대는 홀몸으로 오랜 숙적인 우리 가문을 찾아왔지. 그 기개는 높이 사고 싶다. 은빛의 인형사, 유피에르 바토리. 그대가 공화국에서 보인 활약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 가문이 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네. 그렇다고 가신들을 이끌고 올라갈 수도 없는 일이지. 그 점은 자네도 이해하리라 믿네.”
“이해해요. 우리도 당신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금지된 숲에 형성된 국경선을 비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전에 보내왔던 화친을 수도에서 받아들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네. 정황만으로는 상황을 움직이게 만들 수 없는 법이야.”
라시엘 공작은 손을 들었다.
그림자처럼 서 있던 세바스찬 집사장이 책상 위로 작은 함을 올렸다. 달칵, 하고 열린 함 안에는 빛나는 검 장식이 있었다.
“찾아올 곳이 잘못됐다, 마족의 황녀여. 그대가 찾아가야 하는 가문은 우리가 아니다. 블러드 로열의 마탑으로 향해라. 크로만 가의 지원을 받는 마탑은 예전부터 암계에 손을 대고 있었지. 그대가 말한 상황이 사실이라면, 이를 막기 위해 손을 뻗고 있을 터다. 가서 우리 가문의 증표를 보여라. 마탑이 자네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크로만 가와 루드비히 가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죠. 차도살인(借刀殺人)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신뢰의 증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딸아이와 알베르트가 동행할 것이다.”
“네?”
유피의 반문에 라시엘 공작은 말했다.
“알베르트. 아리시엘도 이제 수도로 올라갈 시기가 되었지. 조금 이르지만, 그 아이를 마탑으로 데려가 주게. 이야기는 이미 끝나있으니 뒤는 내 오랜 친우가 도와줄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시녀장에게 말해두겠다. 들어두거라.”
“주인님의 명을 받듭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유피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미심쩍어하는 그녀의 분위기를 읽은 걸까. 라시엘 공작이 짧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말하는 걸 잊고 있었군. 알베르트와 쌍둥이 시녀를 살려줘서 고맙네, 유피에르 바토리. 그대가 없었다면 셋 모두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지.”
“…….”
책상 위에서 두 손이 포권처럼 겹쳐졌다.
라시엘 공작은 마족의 예를 표했다.
“아니, 그건……. 따, 딱히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닌데.”
천하의 유피라도 이건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세바스찬 집사장은 차를 달였다.
잠시 후, 사무실에서는 차분한 허브향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