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집사와 마녀
“건강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안심했어.”
“역시 그 인형극은…….”
“제법 재밌었지? 란랑은 하기 싫다고 난리를 쳤지만 말이야.”
막상 시키면 최선을 다하는 게 또 귀엽지.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알베르트는 간식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유피를 응시했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가 여전히 예쁘다. 헤어지기 전보다 조금 키가 큰 걸까. 눈 위치가 약간 달라진 느낌이다. 성장한 것은 키만이 아니다. 봉긋 솟은 가슴도 이전보다 존재감이 강해졌다. 호선을 그리는 몸은 예전보다 더 여성스러워진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머리카락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별무리가, 지금은 어깨선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를 잘랐다.
무언가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알베르트는 에르체베트의 말을 떠올렸다.
세실리아 님이 세계수의 정상에 올랐다. 그녀에게는 가족과도 같던 사람이다. 머리를 자른 건 언니와도 같은 그 사람을 잃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놀랐어? 놀랐지!?”
“놀랐습니다, 아가씨.”
신이 난 아가씨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정신을 차렸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테이블 위로 팬 케이크와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아가씨의 잔을 채우고 유피의 잔을 채운다. 유피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달아, 하고 그녀는 눈가를 찌푸렸다.
“유피의 말이 맞았네. 알이 엄청나게 놀랄 거라고 그랬어.”
팬 케이크로 포크를 옮긴 아리시엘은 활짝 웃었다.
버터와 딸기가 올라간 팬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가씨는 연신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딸기를 피해 팬 케이크를 잘라 먹는다. 소녀의 입이 귀엽게 오물거렸다.
“있지, 알. 어제 그 인형극 말이야. 유피가 했던 거래. 소문이 자자한 은빛의 인형사가 유피였던 거 있지? 그래서 이렇게 초대했어. 그럼 나 때문에 알게 된 거네? 어때? 유피를 만나서 기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래. 잘 말했어. 열심히 하는 알을 위해서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솔직한 알베르트의 말에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아리시엘의 웃음이 짙어졌다.
“유피도 대단했어. 정말 재밌었어! 그런 인형극이라면 몇 번이고 더 보고 싶어!”
“칭찬해줘서 고마워, 아리시엘.”
“응응! 알은 울기까지 했다니까.”
“흐응.”
아가씨의 뒤에 선 알베르트를 보는 유피의 얼굴에 기분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오기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걸까.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그 유피니까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
알베르트가 없는 사이 그녀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일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알베르트는 아가씨의 오른쪽 뒤로 걸음을…….
“그래서 두 사람은 어디서 알게 된 거야?”
“듣고 싶어? 뭐,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니지. 알이 내 성으로…….”
옮기지 못했다.
“엘프의 마을에서 신세 지고 있을 때 봤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인형극을 하고 있었거든요.”
느닷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황급히 유피의 말을 가로막는다. 갑자기 이야기에 끼어든 집사의 목소리에 아리시엘은 눈을 깜박였다. 항상 자신의 선을 지키는 집사다. 아가씨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끼어들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선을 넘은 행위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냐, 괜찮아. 음. 그래서 인형극의 내용을 알고 있었구나?”
“네, 그래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유피는 숲 안까지 교류하고 있었던 거네?”
알베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한낱 인형사가 금지된 숲의 안쪽을 오가고 있던 것도 모자라 엘프와 교류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나이는 어려도 머리가 비상한 아가씨다. 에일린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유피와 말을 맞춰뒀으면 모를까. 급조한 변명으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알베르트는 유피를 바라보았다.
그녀라면 자신의 눈을 보고 의사를 읽을 수 있겠지. 그래,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인형사에게는 국경이란 게 없어. 금지된 숲이든. 마족의 땅이든. 설령 캘러미티가 사는 북부라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진짜야?”
“난 거짓말을 싫어해. 전부 다녀온 곳만 말하고 있는 거야.”
“인형사. 대단해!”
당당한 유피의 태도에 아리시엘이 두 손을 마주쳤다.
“마계도 갔다 온 거야? 마족을 실제로 본 거야?”
“마족 말이네. 아리시엘은 본 적이 없나 봐?”
“으, 으음. 조각상이라면 나도 봤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어.”
“그럼 이제 괜찮겠네. 마족이라면 지금 네 앞에 있으니까.”
“응?”
그 기대가 순식간에 부서졌다.
“유피!”
알베르트의 제지도 소용없다. 아리시엘은 그녀를 응시했다.
유피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든다. 반투명해진 얼굴 안에서 하얀 백골이 드러났다.
마족의 본신.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모습이 아리시엘의 앞에 나타났다.
“유피가 마족?”
“마족이야.”
“진짜?”
“진짜야.”
유피에게 몇 번이고 질문을 던진 아리시엘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알도 마족?”
“마족이야.”
“아닙니다.”
뭘 긍정하는 거야, 이 여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아가씨의 얼굴을 본 알베르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
잠시 후 설명을 마친 알베르트는 아리시엘의 앞에 서 있었다.
알베르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아가씨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유피가 황녀라는 건 밝히지 않았지만, 마족에 관한 이야기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거짓으로 지어낼 수는 없었다.
“엘프에게 배운 기술이 아니라, 마족에게 배운 기술이었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응. 아버님도 말은 안 하지,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고.”
“…….”
한쪽에서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차를 드는 유피의 모습이 얄밉다.
알베르트를 바라보는 그녀는 아직 멀었어? 지루하네.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왜 숨긴 거야?”
“마족은 제국의 적입니다. 제가 마족의 도움을 얻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루드비히 가에 짐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론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알.”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른 거로 화내는 게 아니야. 알은 가족에게 거짓말을 했어. 가족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면 안 돼.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배신해도, 가족만큼은 널 믿고 지켜주는 법이야. 아니면 알은 우리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던 거야?”
“아닙니다. 저는…….”
순간 목소리를 높이던 알베르트는 따스하게 바라보는 아가씨의 시선에 말을 삼켰다.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알은 이런 쪽은 영 바보구나? 우리가 알을 믿는 만큼, 알도 우리를 믿어줬으면 좋겠어. 분명 다들 이해할 테니까.”
“…….”
무심코 고개를 숙이고 만다.
뭔가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 같다. 머리 위로 작은 손이 올라왔다. 알베르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아리시엘은 고생했어, 고생했어. 하고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님에게는 내가 이야기할게. 하지만 모두에게 사과하는 건 알이 해야 해.”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래. 그럼 유피에르. 그렇게 되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이야기일까?”
조금 퉁명스러운 반문에 아가씨는 대답했다.
“알은 당신한테 주지 않아. 알은 우리 가족이니까.”
“딱히 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 남자가 멋대로 따라왔을 뿐이야.”
“…….”
자신과는 상관없다.
여전히 여유가 가득한 유피의 모습에 아리시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못 참고 여기까지 쫓아왔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뭐?”
“성격 나쁜 여자라고 말했어. 있지, 알. 알은 정말로 저런 여자가 좋은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좀 더 괜찮은 여자를 찾아줄게. 최소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여자로 말이야.”
“아가씨.”
쿵, 하고 잔과 테이블이 부딪쳤다.
잔을 내린 유피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디서 꼬맹이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난 나이만 어릴 뿐이지. 속까지 어리지는 않아.”
“그런 속 보이는 도발에 넘어갈 거로 생각하는 거니? 하여튼 애들이란.”
“그 애랑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건 누구인지 모르겠네.”
“…….”
“…….”
날카로운 번개가 튀는 것 같다. 유피와 아리시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뭔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만남이다.
분명 마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하하호호 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던 것 같은데. 이전과는 달리 자매 같은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만 걸까. 일단 두 사람을 중재해보자.
알베르트는 유피에게 물었다.
“란랑이랑 소피아는 어디에 있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교류단과는 따로 움직인 거구나. 그렇지 않다면…….”
“저기, 알.”
마녀는 집사의 말을 끊었다.
“나는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나 있어. 그러니까 입 좀 다물어.”
“…….”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흘러나온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무섭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과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 그녀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좋아. 아리시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알베르트 란을 나한테 넘겨.”
“싫어. 알은 내 거야.”
아리시엘은 단칼에 거절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뭔데 알을 달라고 해?”
“내 집사니까.”
“웃기는 사람이네! 누가 누구의 집사라고? 알은 내 집사야.”
난장판이다.
갑자기 두통이 이는 느낌에 알베르트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알. 이 꼬맹이는 네 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아가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유피.”
“…….”
아무리 유피라고 해도 아가씨에 대한 무례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유피의 얼굴이 흔들렸다. 반면 아리시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알. 이 여자는 네가 좋아할 필요가 없어.”
“아가씨도 지나치십니다. 유피는 아가씨가 생각하는 그런 여성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과분한 사람입니다.”
“…….”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이번에는 아가씨의 얼굴이 굳었다.
그 사이 유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언제나 내가 첫 번째라고 하지 않았어?”
“아가씨는 별개의 문제야.”
“내 집사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건 기간 한정이라고 말했잖아. 내가 루드비히 출신이라는 것도 밝혔잖아.”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유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폭발했는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 몸이. 유피에르 바토리가! 알베르트 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알베르트는 멍하니 유피를 바라보았다. 아리시엘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시선에 유피의 고개를 돌렸다. 귀는 물론이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은, 내가 필요하지 않아?”
“유피.”
뭔가 억누른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계기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질 뿐인 찰나의 입맞춤. 조금 전까지 마시고 있던 차 때문일까. 그녀의 입에서는 홍차 맛이 났다.
멀어지던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유피의 손이 알베르트의 등을 잡았다.
“잠…….”
“…….”
손을 대면 떨어질 것 같은 입맞춤이 아니다.
두 눈을 감고 다가온 유피의 행위는 짧게 끝나지 않았다. 그곳에 있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몇 번이고 입술을 거듭했다.
쨍그랑.
끝나지 않는 두 사람의 입맞춤에 아리시엘이 포크를 떨어뜨렸다.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껴뒀던 딸기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우와.”
한쪽에서 멍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피의 얼굴이 멀어진다.
붉은 입술에서 하얀 실이 이어졌다. 손을 든 그녀는 실을 끊었다. 살짝 혀를 내민 그녀가 말했다.
“케이크 맛이 나네. 저거, 알이 만든 거지?”
머릿속이 수습되지 않는다.
아가씨의 앞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만 건가. 유피가 이렇게 행동력이 좋았던가. 사고가 엉킨다. 완전히 당황한 알베르트의 모습에 그녀는 만족한 듯 웃었다.
“유피……. 너 말이야.”
“기다리는 건 지쳤거든.”
장난기 어린 그 얼굴마저 사랑스럽게 보인다.
더는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알베르트는 그 미소에 이끌리듯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