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조우(2)
“란도 여기에 있다는 건 냄새를 맡은 모양이네요.”
그녀가 말하는 건 뱀의 추종자겠지.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안쪽은 확인해봤어?”
“아직이에요. 바깥쪽부터 정리하고 소피아와 함께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어디의 바보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진입은 힘들 것 같네요.”
“미안. 마무리는 내가 지을게.”
란랑은 소매 속에서 한 물건을 꺼냈다.
나무를 본뜬 조각상이다. 공화국에서 왔던 모하메드 의장이 들고 있던 바로 그 물건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 조각상은 생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 물건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란?”
“루미너스 일루젼.”
“좋아요.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월편을 닮은 이 열매를 황녀 전하가 원하셔요.”
“여기에 현물이 있다는 거야?”
“황녀 전하의 예상이 맞다면요.”
“그럼 확실하겠네.”
“…….”
확신이 있으니 움직였을 것이다. 유피의 말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팬텀 소드가 갖고 있을 확률이 높은가. 지부장인 롬멜도 용의선상에서 제외한다. 녀석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어. 책임지고 내가 가져올게.”
“아니에요, 란. 저희는 한 번 물러날게요.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으니까요.”
시간도 많이 흘렀고요.
란랑은 소피아를 업었다. 자신의 몸보다 큰 여인을 등에 진 소녀는 말했다.
“조만간 황녀 전하와 함께 만나러 갈게요. 그때까지 물건을 부탁드려요.”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네.”
발걸음을 돌리던 란랑은 문득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란.”
“너도 마찬가지야, 란랑.”
소녀는 언젠가 보여줬던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
창고 안쪽으로 향할수록 술 냄새가 짙어졌다.
단순히 상자에서 흘러나온 냄새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예 바닥에 술을 뿌려놓은 것 같다. 내용물이 밖에 나와 있지 않고서는 이리 냄새가 강할 리 없다. 술 냄새로 대체 무얼 숨기고 싶은 걸까.
창고를 조사하며 나아가던 알베르트는 발소리를 죽였다.
목소리가 들린다.
몸을 숨길만한 곳은 많다. 상자 뒤로 몸을 숨긴 알베르트는 조심스레 앞쪽을 살펴보았다.
“좋다. 그럼 백금화 300장이다. 어, 어떤가? 300장. 그거면 날 살려주겠는가?”
“아니, 돈만으로는 넘어갈 수 없지. 팬텀 소드. 네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얼마라고 생각하나? 수지가 맞질 않아. 날 매수하고 싶다면 좀 더 매력적인 걸 제안해봐. 가령, 여기서 만들고 있던 물건을 준다든지 말이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두 사람이었다.
부러진 검 앞에서 숨을 갈무리하고 있는 건 팬텀 소드로 보인다. 그런 녀석의 앞에 선 남자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루, 루미너스 일루젼 말인가?”
진땀을 흘리고 있던 팬텀 소드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런가. 너도 이 약을 원하는 거냐? 그렇지. 그래. 크로만 가에 고용된 거라면 약을 손에 넣어도 쓸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특별해. 나도 함부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잘못하면 집어 삼켜진다. 이건 그런 물건이야.”
“그럼 교섭은 결렬이다. 네 놈을 죽이고 취하는 수밖에.”
“지, 진정하게. 내 말은 이게 위험한 물건이라는 소리네. 이걸 어떻게 쓰는 건 자네 마음이지 않나? 다만 시간이 필요해. 여기에 남은 현물은 없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여기에 남은 흔적만 봐도 상당한 양이야. 날 속일 생각이라면 그만둬.”
미심쩍어하는 물음에 남자는 대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이곳에서 만든 루미너스 일루젼은 수도로 올라갔다. 여기 남은 건 여물지 않은 과실뿐이야. 시, 시간을 주게. 마침 신선한 재료가 남아 있으니, 잘 쥐어짠다면 완성품 한 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듯 녀석은 몸을 돌렸다.
뒷문에 손을 얹은 그는 마법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푸른 마법진이 떠오른다. 술식에 손을 댄 그는 이윽고 잠금을 해제했는지, 문고리를 쥐고 돌렸다.
달칵, 하고 열린 방 안에는 낯익은 두 시녀의 모습이 보였다.
마린과 루인.
사이 좋은 쌍둥이 자매가 축 늘어져 있었다.
[다행입니다. 둘 다 무사한 모양이군요.]
알베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식이 없는 두 사람은 단순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바로 만들 수 있는 건가?”
“물론이네. 금방 끝나니 잠깐만 기다려주게.”
남자는 품에서 작은 조각상을 꺼냈다.
나무에는 작은 열매가 열려 있었다. 루미너스 일루젼. 란랑이 부탁했던 물건이다. 조각상을 내려놓은 녀석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꺼림칙한 기운의 정체는 마기다. 손안에서 휘몰아치던 마기는 그대로 조각상에 스며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쌍둥이 시녀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다.
“바로 네 목숨으로 말이지!”
거미줄처럼 퍼진 줄기는 남자를 덮쳤다.
작은 한숨 소리가 났다. 뻗어오는 뿌리를 본 그는 손을 들었다. 어둠 속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하나의 벽이 만들어진다. 벽에 막힌 뿌리는 더 나아가질 못했다.
필사의 기습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헛수고다. 차라리 그 익지 않은 루미너스 일루젼을 써보는 건 어떠냐?”
팬텀 소드는 포기하지 않는다.
조각상에서 시작된 뿌리가 늘어난다. 그러나 소용없다. 완성된 마법진은 흔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조각상의 과실로 눈을 옮겼다. 역시 사용해야만 할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일단 시간을 벌자. 조각상이 다루는 힘의 원천은 사람의 정기다. 다행히 여기에는 신선한 재료가 있다.
조각상에서 새로 뿌리가 뻗어져 나왔다.
마법사를 노리는 게 아니다. 이 뿌리는 무방비한 두 시녀를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움직임을 취했다.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나이프를 마법사에게 던진다. 결과는 확인하지 않는다. 녀석에 대한 견제는 그것으로 마치고 팬텀 소드를 노린다. 가장 먼저 끝내 해결해야 하는 것은 조각상을 든 손. 권기를 두른 알베르트의 손이 놈의 손목을 잘라냈다.
“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조각상이 떨어졌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알베르트는 손을 들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남자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 몸이 넘어갔다. 손을 든 알베르트는 머리를 잃은 녀석을 볼 수 있었다.
뒤에 있던 마법사가 한 짓이다.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깔끔하게 잘린 놈의 목 단면에는 몇 겹이나 되는 마법진이 쳐 있었다.
알베르트는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발치에는 알베르트가 던진 나이프가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에 반응한 건가. 놈의 기운을 읽어낼 수 없다. 둘이 나눈 대화를 봤을 때, 혹시 크로만 가에 고용된 용병일까. 그렇다면 얕볼 수 없다.
시체가 되어버린 팬텀 소드는 두 사람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알베르트와 마법사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상을 확인했다.
“보아하니, 노리는 건 서로 똑같은 모양이군요.”
“물건은 하나. 필요한 사람은 둘인가.”
“물건이 두 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사람이 혼자가 되어야겠지.”
양보할 수 없다는 마법사의 의사에 알베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마법의 위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현시대에 펼쳐지는 기적의 힘. 현실을 침식하고 발현되는 마법은 펼쳐지고 나면 막을 수 없다. 같은 마법이 아니고서는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기사가 마법사를 이길 방법이 있다면 그건 딱 하나. 술식이 준비되기 전에 허를 찌르는 수밖에 없다.
거리를 좁히는 것은 알베르트의 장기다.
들어가서 얼굴을 가격한다. 조직원들과 싸우고 있는 걸 봤을 때, 목숨까지 뺏을 필요는 없다. 이쪽도 제국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손속에 사정을 둔다.
쿵!
주먹에 강한 충격이 달렸다. 검이 보인다. 가속도가 최고조에 달하기 전, 앞으로 나온 마법사가 뽑은 검과 부딪혔다. 마법사인 놈도 알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뛰어나왔다.
어째서?
의문은 접어둔다.
놈의 검이 움직인다.
마법사가 호신술로 익히는 얄팍한 검술이 아니다. 확실한 검로를 갖고 날카로운 찌르기가 몇 번이고 알베르트의 명치를 노린다. 검신 위에는 미미한 검기가 어려있다. 어렵지 않게 검을 받아낸다. 오러를 다루는 건 놀랐지만, 그 정도다.
이만한 실력으로는 알베르트를 쓰러뜨릴 수 없다.
그러나 놈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푸른 마나가 반짝였다.
“체인 라이트닝(Chain Lightning).”
4서클의 전격 마법이 시전되었다.
눈앞이 타오른다. 갑작스러운 공격 마법에 당한 알베르트는 거리를 벌렸다. 연미복에서 전기가 일어난다. 예상하지 못했다. 검이 오가는 도중 캐스팅을 마친 걸까. 다행이다. 유피가 준 이 연미복에는 방어 술식이 걸려 있다. 방어 마법이 아니었다면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한 수로 알베르트는 눈앞의 마검사가 누군지 깨달았다.
“마도로 이름이 높은 크로만 가지만, 마법과 검술에 모두 능하신 분은 몇 안 되죠.”
“이 몸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이야기하기 편하지. 길게 말하지 않겠네. 넘기게나.”
“저도 사정이 있는지라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돈인가?”
“저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 검을 받드는 이가 돈으로 움직이면 이름이 아깝지.”
알베르트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이 간다는 듯 마검사는 검을 내렸다.
그 손목에서 떠오른 마법진이 천천히 사라졌다.
“같은 편끼리 검을 나누는 것도 우습군. 그 물건은 자네에게 양보하겠네.”
적의는 사라진 걸까. 잠시 조각상을 바라보던 그는 말했다.
“여기는 검의 영지. 우선권은 내가 아니라 검에 있겠지. 녀석들의 존재에 대해서 검이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조국을 지키는 일로 이어질 테니. 나쁠 건 없겠지.”
“감사합니다, 셀렌느 후작.”
“뭘. 공작 각하께 전해주게. 수도에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셀렌느 크로만 후작.
제국 제일의 마검사는 또 보게나, 하고 창고를 뒤로했다.
*&*
아리시엘은 오늘도 신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교류단이 도착한 지 벌써 삼 일째. 네이르와 만나는 비밀스러운 일상은 소녀에게 즐거운 자극을 주고 있었다. 신목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집사가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신목 아래에는 네이르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앞에 나서기 전에 아리시엘은 몸가짐을 확인했다.
노아에게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이곳에 오는 도중 머리가 흐트러졌을지도 모른다. 손거울을 품에 넣은 그녀는 목을 가다듬었다. 인기척을 내자 네이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아리. 오늘은 늦었네요.”
“어, 어제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가요? 제가 착각했나 보군요. 여기는 고향과 달리 해가 빨리 뜨니까요.”
아리시엘은 소년의 앞에 앉았다.
그녀가 올 걸 알고 있었는지, 테이블 위에는 잔이 두 개 있었다.
“그것보다 어제 봤어? 교류단이 준비한 행사. 불을 그런 식으로 다룰 줄은 몰랐어!”
“아그니(Agni) 말이군요. 불을 신성하게 여기는 북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행사입니다. 좌우를 장식하는 불기둥은 일출과 일몰을 의미하죠. 해가 뜸과 동시에 어둠이 물러나고, 해가 지면 다시 어둠이 찾아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둠이 찾아와? 밤이 오는 걸 말하는 거야?”
“어둠이라는 건 일종의 상징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나 자연재해를 가리키곤 했죠. 지금은 캘러미티가 바로 그 어둠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네이르가 알고 있는 북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리시엘은 귀를 기울였다. 저택에서는 알 수 없는 귀한 내용이다.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쌓아라. 아버님이 입버릇처럼 꺼내는 말이다. 향후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유용하게 써먹을 시기가 오리라.
북부의 전통에 대해서 얼마나 들었을까. 문득 시야 한 편에 알베르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보기 드물게도 집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자리를 피하셔야 할 듯 싶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사람이 옵니다.”
“난 또 뭐라고. 못 오게 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님이 오고 계십니다.”
“으겍.”
어머님이 온다는 말에 아리시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머님이 이곳에 온다면 집사가 막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저택에서는 아버님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다. 설령 자신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막을 수 없다.
네이르가 아리시엘을 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그 시선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
“네?”
“여기는 아무나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야.”
“아, 그거라면 말을…….”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일단 도망치자!”
아리시엘은 소년의 손을 잡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네이르는 살짝 웃더니,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이쪽입니다, 아가씨.”
알베르트가 두 사람의 앞에 선다.
미로 같은 정원길을 지나 분수가 있는 공터로 나온다. 갈라지는 길은 세 갈래. 한쪽은 신목에서 보이던 호수로 가는 길. 그 맞은편은 저택으로 향하는 길. 나머지 하나는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어디로 가야 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늦은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인 알베르트가 천천히 아리시엘의 뒤로 물러났다.
든든한 집사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앞을 대신하듯이 나타난 건 우아한 귀부인이었다. 아리시엘을 쏙 빼닮은 금빛이 반짝였다.
“아리시엘.”
“어, 어머님.”
아나스타샤 라이언 하트.
딸아이를 본 그녀의 어머니가 방긋 웃었다.
“정말인지. 어딜 그리 급하게 가고 있는 거니. 트리스탄 공자가 기다리고 있단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남았잖아요.”
“아리시엘. 레이디는 약속 시간을 맞춰서 가는 게 아니라고 했잖니.”
“알고 있어요. 언제나 5분 전에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기운이 죽은 아리시엘을 바라보던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은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알베르트가 예의를 갖췄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집사를 본 그녀는 아리시엘과 손을 잡은 소년을 봤다.
“어머.”
작은 감탄사가 났다.
“죄송해요, 어머님. 이 아이는 길을 잃고 들어온 것 같으니까…….”
“이거 누군가 했더니.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어떤가요? 기분은 조금 괜찮아지셨나요?”
“배려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 공작부인. 생각보다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루드비히 가의 신목에 얽힌 전설은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의 앞으로 걸어간 네이르는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어머님과 네이르.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 같다. 알베르트는 무언가 알고 있을까. 아리시엘의 시선이 향하자 알베르트는 슬쩍 눈을 피했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자하단. 자하단 성 미뉴에트라고 합니다, 아리시엘 공녀.”
“뭐?”
아리시엘은 무심코 손을 들었다.
네이르. 아니, 자하단을 가리키자 그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하단 성 미뉴에트?”
“죄송합니다, 그런 약속이었습니다.”
“아리시엘. 예의 없게 그게 무슨 짓이니.”
어머님의 지적에 아리시엘은 손을 내렸다.
엄지손가락을 깨문 아가씨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거야? 시선이 마주친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네가 몰랐을 리 없잖아!”
“저도 사람입니다, 아가씨. 모든 걸 알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만 그러기야?”
“그럴 리가요. 아가씨에게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안 믿거든!”
알베르트의 대답에 아가씨는 입가를 찌푸렸다.
입안 가득 쿠키를 먹은 것처럼 그녀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불만을 표출하는 아리시엘의 표정을 본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이 우아한 웃음을 그렸다.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제 완전히 친해졌구나.”
“안 친해요! 알은 가끔 제멋대로 군단 말이에요! 누가 주인님이고 누가 집사인지 모를 정도라고요.”
“아리시엘. 집사라고 해서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건 아니란다.”
“충신은 참언을 올리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좋은 가신을 뒀군요, 아리시엘 공녀.”
“보렴. 자하단 공자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니.”
“으…….”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놀리는 게 분명한데. 세 사람이 합심해서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반박의 말을 낼 수가 없었다.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이 어떤지 알 수 있다고 하죠. 공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느낌입니다.”
“…….”
자하단의 말을 들은 아리시엘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알베르트를 노려보았다.
조금 이따가 봐,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아가씨의 눈에 집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