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조우(1) (158/200)

 # 158

조우(1)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윗선에서, 그러니까 검은 손이 내린 명은 이 창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을 납치하는 건 알고 있지만, 실제로 뭘 하는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말단도 아니고, 한 길드의 지부장인 자네가 모른다는 게.”

“지부장이라고는 해도 그리 높은 직위는 아닙니다. 만약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가 알았다면, 이 자리는 다른 길드원이 앉아 있었겠죠. 검은 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건 선택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지부의 감시역으로 내려온 것이 팬텀 소드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요컨대 위에서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지부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던 것도 계획적이었나.”

“죄송합니다. 그것도 위에서 내린 명령입니다.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정보를 만드는 거죠. 거짓만으로는 신용할 수 없는 정보가 만들어지니까요.”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사람을 숨길 때는 인파입니다.”

문을 확인한 지부장은 발을 멈췄다. 지하 창고로 들어가는 방이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곳과 후문밖에 없습니다. 후문은 경비가 삼엄한 건 물론이고, 방어 마법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쪽이 그나마 들어가기 쉬울 겁니다.”

“적은 팬텀 소드 혼자인가?”

“아닙니다. 팬텀 소드가 데리고 나온 조직원은 수가 꽤 됩니다. 데지마와 벨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희 조직원에 비하면 강합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뒷말이 안 나오게 정리해두마. 역으로 네 쪽이 문제지 않나?”

“괜찮습니다. 쥐덫에 걸린 쥐새끼들은 전부 죽였으니, 입단속이 가능한 이들뿐입니다.”

“그럼 부탁하지, 지부장.”

“롬멜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지부장, 롬멜은 문을 열었다.

“앞으로 볼 날이 적었으면 좋겠군요.”

“그건 어떨련지 모르겠군.”

어색하게 손을 맞잡는다.

쓴웃음을 짓는 롬멜을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안쪽으로 들어섰다.

지하는 옅은 빛에 의지하고 있었다.

보이는 곳은 보이지만, 상자가 쌓인 곳은 당연한 것처럼 어둠에 삼켜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냄새도 진하다. 상자 안에 담긴 물건은 술인지,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다.

알베르트는 먼저 어둠에 적응했다.

어느 정도 윤곽을 확인할 수 있게 되자 내공을 활성화했다. 창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내려간다. 지하 끝에는 좁은 통로가 알베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안쪽을 경계하며 걸음을 옮긴다. 창고 안에는 상자밖에 없다. 인질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있는 것은 창고에 쓰러진 사람들뿐이다. 아마도 검은 손의 부하들이다. 놈들은 하나같이 의식이 없다. 숨이 끊기지는 않았다. 검이나 마법에 당한 게 아니다. 여기에 남은 흔적은…….

‘천칭.’

[더 안쪽입니다, 마스터. 선객이 있습니다.]

‘그건 알고 있네.’

[아뇨, 그게 아니라 이 기운은…….]

천칭의 목소리를 들을 틈은 없다.

어두운 통로 안에서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었다.

적이다.

이곳에 있는 조직원을 쓰러뜨린 침입자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지만, 녀석이 우호적으로 나올 확률은 없다.

알베르트의 생각이 맞았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녀석은 다짜고짜 발을 내질렀다.

충격에 대비하고 있던 알베르트는 팔로 발을 받았다. 손이 저릿저릿하다. 튕겨낼 생각이었는데, 예상외로 힘이 강하다. 알베르트는 눈가를 찌푸렸다. 일반적인 발차기가 아니다. 충격을 흘려보냈을 터인데도 충격이 따라온다. 마나가 실린 맨발은 이미 하나의 무기다.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적은 거추장스러운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이어지던 연격이 멈췄다. 알베르트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린 적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불빛이 약한 터라 창고를 전부 확인할 수는 없다.

영리한 녀석이다. 일반적인 상대라면 녀석의 움직임을 읽을 수 없으리라. 시야는 어둠에, 냄새는 술에 먹혀버린 장소다. 의지할 수 있는 건 청각 하나. 그 점을 고려한 놈의 움직임은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는다. 그것을 위한 맨발이다. 하지만 알베르트를 상대로는 너무 무른 생각이었다.

알베르트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발이 얼굴을 노렸다.

알베르트는 그 발차기를 머리를 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다리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한 번 휘둘러지고 난 발이 변화한다. 마치 다시 휘둘러지는 것처럼 속도와 힘이 담긴 발이 꺾인 알베르트의 머리를 추적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뱀의 움직임과도 비슷하다. 있을 수 없는 각도로 움직이는 발을, 알베르트는 침착하게 몸을 돌려 피했다.

연격은 끝나지 않는다. 물러난 알베르트를 보내지 않겠다는 듯, 녀석은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차고, 찍고, 휘두르고, 후린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기본에 충실한 움직임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십 번은 때려 눕혔을 발차기를, 알베르트는 흐르는 물처럼 피해냈다.

“……!”

으득.

어금니가 갈렸다. 녀석의 움직임이 거칠어진다.

좀 더 마나가 실린 모양인지, 속도와 위력이 배가 되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다. 고집스럽게 발만 쓰던 연격에 간간이 손날이 섞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변화를 주고자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닿지 않는다. 닿을 것 같으면서도 빠져나가는 알베르트의 모습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우연인가? 그렇지 않으면…….

우연이 아니다. 바보 취급당하고 있다. 이쪽의 움직임은 완전히 읽히고 있다. 발을 걷은 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하고 크게 숨을 고르더니, 단숨에 땅을 박찼다.

알베르트의 앞에 녀석의 발이 나타났다.

좌측 귀를 노리는 후리기. 알베르트는 몸을 틀었다.

목을 노리는 돌려차기. 뻗어져 나오는 발보다 먼저 알베르트의 몸이 움직였다.

변칙적으로 들어오는 손날치기. 알베르트의 손에 잡혔다.

그것으로 끝. 보는 눈은 없다. 여기서 녀석을 묶는다.

알베르트의 손에 검붉은 권기가 맺혔다. 기절시키기에는 충분하리라.

그 순간이었다.

창고 안쪽에서 또 하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언가 날아온다. 기절한 녀석을 내버려둔 채 알베르트는 몸을 물렀다. 한 박자 늦게, 바닥에 날카로운 장침이 꽂혔다.

“안 떨어져, 이 무뢰한! 일어나, 소피아!”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소녀였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방금 던진 장침들이다. 알베르트를 앞에 둔 그녀는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소녀를 본 알베르트는 일순간 손을 멈췄다.

조금 표독스러워 보이는 눈매. 작은 몸집. 성장을 거부한 것 같은 소녀의 용모는 무엇하나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이국적인 하얀 모자는 눈에 익었다.

소녀는 틈을 놓치지 않는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쪽으로 치고 들어온다.

무기는 장침. 침 하나하나에는 오러가 어려 있다. 준비 동작을 읽을 수 없다. 사각지대에서 준비하고, 급소를 노린다. 제압이 목표가 아니다. 확실한 살의를 갖고 있다.

여기서 알베르트의 숨통을 끊어낸다.

매서운 공격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만난 상대 중에서 가장 괜찮은 움직임이다.

반가움 때문일까. 알베르트는 눈앞의 소녀와 조금 어울리고 싶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눈에 익다. 무엇보다 동문의 선배에게 배운 무공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떤 초식이 이어질지 예상할 수 있다. 그 움직임은 기절한 소녀보다 훨씬 유려했다.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동작이 이어진다. 자기 나름대로 변초를 주는 건지, 침을 암기처럼 활용한다.

알베르트는 조금 감탄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녀에게 가르쳐준 무공은 겉핥기식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소녀가 보이는 움직임은 일류 기사에 버금갔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걸까.

초식이 끝을 향해 다가간다. 배를 노리고 팔꿈치가 들어온다.

그러나 그건 허초다. 실제로 노리는 것은 턱. 머리를 그대로 꺾어버리는 게 목적이다.

그 필살의 일격을 알베르트는 손바닥으로 막았다.

“어떻게……?”

소녀의 눈이 충격으로 물든다.

시선이라면 충분히 끌었을 테다. 이렇게 허무하게 막힐 거로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자. 더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진정해, 란랑.”

알베르트는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뭐?”

아랑 사형과 아란 씨의 소중한 외동딸, 치우 란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인지, 용의 무덤에서 헤어진 그 날과 똑같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은 그녀의 어머니인 아란 씨를 떠올리게 했다.

“너. 정체가 뭐야? 어떻게 내 이름을……?”

알베르트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얼굴을 드러내자 란랑이 두 눈을 깜박였다. 믿을 수 없다는 걸 본 표정이다.

“어, 그러니까……. 란?”

“오랜만이네, 란랑.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

말문이 막힌 란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작은 입술이 오므라들었다가, 열리기를 반복한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다. 한참 동안 알베르트를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몇 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에요?”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란랑은 고개를 들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참듯이 소녀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검은 두 눈이 물기로 젖어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무겁고 깊다. 조금 감정이 정리됐는지 란랑은 입을 열었다.

“란.”

장침을 소매에 넣은 그녀는 알베르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짝!

“이건 황녀 전하의 몫.”

“…….”

알베르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란랑은 이어서 발을 들었다.

퍽!

“그리고 이건 제 몫이에요.”

“…….”

알베르트의 다리를 걷어찬 그녀는 소리쳤다.

“살아 있다면 진작 와서 살아 있다고 말해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마계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여기서 그녀들과 연락할 방법은 유피의 성을 찾아가거나 금지된 숲을 통과해 마계로 가는 것 정도다. 문제는 유피의 성은 아무리 찾아가도 들어갈 수 없었고, 알베르트는 마계로 가는 길은 알지 못했다.

“변명은 그게 전부에요? 전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을 거 아니에요?”

“…….”

쌍심지를 켜는 란랑의 시선에 알베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그 말이 맞다. 저택에는 에일린이 있으니까. 마계를 나와 저택에 있는 그녀에게 조금 억지를 부렸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소식을 전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을 터다. 알베르트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전하는 거라면 직접 유피와 만나서 전하고 싶었다.

“미안. 좀 더 노력할 걸 그랬나 보네.”

멋쩍게 웃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뭘 잘했다고 웃어요?”

“많이 컸구나 싶어서.”

“거짓말하지 마요. 어머니랑 똑같아서 하나도 안 변했어요.”

“그래?”

“키는 조금 컸지만요.”

“…….”

“진짜거든요.”

무심코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건지, 란랑은 알베르트의 발을 밟았다.

“정말 변한 게 없구나, 너도.”

“사돈 남 말 할 처지에요?”

란랑은 코웃음 쳤다.

“그쪽은?”

“황녀 전하의 시녀에요. 이름은 소피아. 정말, 이 아이를 쉽게 제압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란랑은 소피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후드를 벗기고 상태가 어떤지 확인한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흑과 백이 섞인 머리다. 순간 선녀님이 생각난 알베르트는 그녀의 모습을 살펴봤다.

“아, 그렇네요. 란이 아는 이름은 지아였죠? 그건 가명이고 본명은 이쪽이라는 모양이에요.”

“지아?”

“네, 월편으로 몸이 망가졌던 바로 그 애예요. 몸은 회복했지만, 조금 특이체질이 되어버려서 말이에요. 선녀님처럼 기적을 흉내낼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 말하니, 정말 빈민가에 있던 그 아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그 당시 지아가 남장을 하고 있던 탓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특히나 소녀에서 여인이 되었다면 몰라보는 것이 당연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아니, 란랑은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만약 그녀의 모습이 변했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는 없었겠지.

“놀리는 거죠?”

“칭찬한 거야.”

소피아는 의식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란랑이 원망 어린 시선으로 알베르트를 보았다. 무공을 다루는 걸 보고 손속에 사정을 뒀지만, 깨어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터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천천히 이야기할 시간이 있을 거야.”

“정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래, 난 여기에 있으니까.”

한데, 하고 알베르트는 잠시 말에 틈을 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입을 연다.

“유피도 여기 있는 거야?”

“여기에는 없어요.”

“그래?”

“도시에는 있지만요.”

“란랑.”

“흥.”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베에, 하고 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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