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북부에서 온 손님(2)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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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에서 온 손님(2)

    미궁과도 같은 수풀을 통과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정원으로 숨어든 아리시엘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차려입은 드레스와 몸이 더러워지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 풀이야 털면 되고, 흙이야 빨면 된다. 어차피 사람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다. 신목 밑으로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쉬기 위해서다.

    수풀은 생각보다 많이 자라있었다.

    정원사인 필립의 손길이 닿아서 깔끔하게 정리된 편이긴 하지만. 애초에 길이 아니라 벽으로 만든 수풀이다. 당연히 몸집이 작은 아리시엘 외에는 통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다. 신목 아래에서 검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길이다.

    어렵사리 수풀을 헤치고 지나가던 아리시엘은 발걸음을 멈췄다.

    거추장스러운 장신구가 수풀에 걸려 떨어지지 않는다. 귀찮아도 그냥 갈 수는 없다.

    침착하게 수풀을 떼어낸다. 가시에 닿은 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입안으로 손가락을 옮긴 아리시엘은 피를 빨았다. 지혈은 그걸로 끝. 쌍둥이 자매가 준 장신구도 회수했다.

    신목은 이제 코앞까지 와 있었다.

    수풀 아래로 굵은 뿌리가 보인다. 잔디를 기어서 통과한 아리시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와 같은 신목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목에 도착했을 뿐인데, 무언가 머릿속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쌓인 고생도, 짜증도. 단번에 잊혔다. 오길 잘했다. 피로가 날아가는 느낌에 아리시엘은 산뜻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익숙한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알을 데리고 온 것이 아녀서 차나 쿠키는 기대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필립이 준비해놓은 자신만의 자리가 있다. 앙증맞은 테이블과 의자.

    한데, 그곳에 선객이 와 있었다.

    은청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었다.

    오늘 저택을 방문한 교류단 중 한 명인지, 그는 이국적인 북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쪽을 바라보는 소년은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고민하던 아리시엘은 곧 자신의 행색을 떠올리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수풀을 억지로 통과한지라 그녀의 모습은 들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옷 이곳저곳에 묻은 풀은 물론이고, 한껏 단장했던 얼굴마저 흙이 묻어 있었다.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어딜 봐도 명문의 레이디라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아니아니. 진정하자. 괜찮다. 분명 그 사람의 위치와 지위를 나타내는 가장 쉬운 수단은 의복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물이다. 자신이 당당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래, 나는 루드비히 가의 아리시엘이니까.

    그렇게 마음먹은 소녀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안녕.”

    목소리가 떨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코끝에도 묻어 있습니다.”

    “알고 있어!”

    아리시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손수건을 꺼낸 그녀는 코에 묻은 흙을 닦아냈다.

    “길을 잃으셨나 보군요. 이 정원은 생각보다 길이 복잡하니까요.”

    “뭐? 아, 아니. 별로 그런 건 아닌데.”

    “괜찮습니다. 여신님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여신? 너. 신관이라도 되는 거야?”

    “신성력이라면 자신 있지만, 안타깝게도 신관이 될만한 재목은 아닙니다.”

    소년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남자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예쁜 얼굴이다. 소년을 바라보던 아리시엘은 이유도 없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넌 누구야?”

    “전 네이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이름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이르라고 자신을 밝힌 소년은 아리시엘이 누군지 모르는 눈치다.

    그러고 보니 아리시엘도 눈앞의 소년과 인사를 나눈 기억은 없었다. 교류단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아리시엘을 보고 갔는데, 네이르는 그 자리에 올라올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약소 가문의 자제인 모양이다.

    “레이디는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법이야.”

    “그렇죠. 레이디가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죠. 하지만 곤란하네요. 수행 중인 사용인도 보이지 않는지라, 따로 물어볼 사람이 없네요.”

    “그, 그랬지, 참! 다들 어디에 있는 건지. 정말. 못 써먹을 애들이라니까!”

    사용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따라올 만도 한데. 오늘따라 도착이 늦다.

    “그럼 사용인이 올 때까지 잠시 저랑 차나 드시지 않겠습니까? 혼자서 마시기에는 조금 양이 많거든요.”

    “차?”

    네이르가 들고 있던 건지, 테이블 위에는 차와 쿠키가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된 찻잔과 접시의 개수는 두 개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차야?”

    “홍차입니다.”

    “어쩔 수 없네. 특별히 날 에스코트할 기회를 줄게.”

    “감사합니다, 레이디.”

    아리시엘은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주전자를 든 네이르는 직접 그녀의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잔을 들었다.

    조금 달콤한 맛이 감도는 홍차는 피곤해진 아리시엘의 몸에 스며들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음, 나쁘지 않아.”

    힘을 빼면 얼굴이 풀어질 것 같다. 그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제가 남쪽으로 외출을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남쪽과 북쪽은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문화의 차이라는 게 느껴지네요.”

    “당연하지. 여기와 거기는 날씨부터가 다르잖아.”

    루드비히 공작령은 제국의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네이르가 내려온 북부와는 기후 자체가 다르다.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뉘는 남쪽과 달리 북부는 혹한의 날씨에 시달렸다.

    “레이디는 루드비히 공작령에 대해서 잘 알고 있나 보네요.”

    “당연하지. 나보다 공작령을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걸?”

    “그렇군요. 혹 괜찮으시면 저한테도 조금 알려주실 순 없을까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아리시엘이 네이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살짝 경계의 빛을 품고 있다. 또래의 아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가문의 사람이다. 공작령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낼 수는 없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몸이 안 좋은지라 바깥을 많이 돌아다닐 수가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게 취미가 되어버렸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 음……. 확실히 그렇게 보이긴 하네.”

    네이르를 살펴본 아리시엘은 수긍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일단 얼굴색부터가 밝지 않다. 투명한 피부는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다. 북부에서 내려온 다른 손님들과는 다르다. 이 소년은 정도가 지나치다. 나쁘게 말하면 환자로 보일 정도다.

    생각보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걸지도 모른다.

    “좋아. 듣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어?”

    아리시엘은 쿠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 저택에서 먹던 쿠키가 아니다. 차가우면서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이 신기하다. 뭔가 색다른 맛이다.

    “루드비히 공작령에서 가장 유명한 거라면 역시 마족이지 않을까요.”

    “마족 말인가. 음, 마족이라…….”

    마족이라면 할 이야기가 많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태어났을 때부터 귀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은 이야기가 바로 마족에 관한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는 게 좋을까. 역시 시작은 간단하게 해보자.

    “네이르는 마족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외형 말씀인가요? 분명 외형은 사람과 별다를 바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마족은 힘을 사용할 때만 본 모습을 드러내. 이때는 마치 언데드와 사람을 반반씩 섞인 것처럼 생겼어. 공작령에는 라베린 도시라는 곳이 있거든. 그곳에는 마족을 본뜬 조각상을을 모험가들이 만들곤 해.”

    “라베린 도시라면 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분명 모험가들이 모여서 세운 도시라고 했죠. 현상금 사냥꾼. 트레져 헌터. 용병. 그곳에 모인 모험가들은 역전의 용사라는 말도요.”

    “역전의 용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제법 쓸만하긴 했어.”

    “직접 보고 오신 모양이군요.”

    “응.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라베린은 어떤 곳이었나요? 모험가들이 모여 만든 도시라면 특색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재미없는 곳이었지.”

    “네?”

    “정말 재미없는 곳이었어.”

    아리시엘은 한 번 더 강조했다.

    놀 것도. 볼 것도 턱없이 부족한 도시다. 솔직히 칭찬할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서 조각상을 꺼냈다. 원래는 노아에게 줄 생각으로 사 왔던 마족 조각상이다. 기회가 되면 줘야지, 하고 품에 챙기고 다녔지만. 무언가 부끄러워져서 아직도 건네지 못한 물건이다.

    “이게 마족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이야.”

    “잠시 봐도 괜찮을까요?”

    아리시엘의 허락을 받은 네이르는 조각상으로 손을 옮겼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마족 조각상은 조금 기괴하게 느껴졌다. 조각상의 앞뒤를 확인하며 이리저리 돌려본다. 반은 언데드고. 반은 사람이다.

    유심히 조각상을 살펴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언데드인 부분을 제외하면 사람과 별로 다를 것도 없군요.”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성수가 없으면 구분할 수 없으니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더 무섭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본 캘러미티도 그렇습니다. 피부가 푸른 것이나 귀가 조금 뭉툭한 걸 제외하면 사람과 다를 것이 없거든요. 물론 그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닙니다만.”

    “그 야만인들 말이구나. 나도 소문은 많이 들어봤어.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는다거나, 불을 보면 도망친다거나. 막 돌을 던지고 뛰어든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그래?”

    “대부분 헛소문이군요. 캘러미티가 야만적인 건 사실이지만, 지능이 떨어지진 않아요.”

    화젯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저택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데, 그것이 이렇게 즐거울 건지 몰랐다. 어느새인가 아리시엘은 네이르와 나누는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지. 노아가 또 그렇게 어지럽힌 거 있지? 나 참. 내가 그렇게나 말했는데…….”

    “노아라는 시녀를 정말 좋아하나 보군요.”

    “응. 노아는 내 친구니까.”

    “그렇군요. 저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은 아니지만요.”

    “사람이 아니라고? 정령이라도 되는 거야?”

    “비슷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네이르는 웃음을 머금었다.

    만났을 때 지었던 쓴웃음이 아니다.

    호선을 그리는 부드러운 미소에 아리시엘은 시선을 빼앗겼다.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레이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돌아가다니, 벌써?”

    “해가 지고 있습니다. 저녁까지 레이디의 발을 묶어두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그것도 외간 남자가 말입니다.”

    아리시엘은 고개를 들었다.

    신목 너머로 보이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이런 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아, 그러니까…….”

    “다음에 볼 때는 제 친구를 소개해드릴게요.”

    작별을 고한 소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리시엘은 네이르를 올려다보았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키가 크다. 아리시엘의 앞으로 다가온 네이르는 무릎을 꿇었다.

    소녀가 손을 내밀자, 소년은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가져갔다.

    예를 마친 네이르는 고개를 들었다. 아리시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야뭐야. 하고 아리시엘의 머릿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이르는 신목을 뒤로했다.

    아리시엘은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입을 맞추고 간 손등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있었다.

    *&*

    클레멘트 거리로 나온 마린과 루인은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준비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그게 아니었다. 설마 갓 잡은 동물의 생피 같은 걸 요구할 줄은 몰랐다. 특별한 의식을 위해서 쓰고 싶다는데. 그런 걸 미리 알고 준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알베르트 님이 잡아 온 산짐승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있지있지. 언니. 나온 김에 이것도 사 가는 건 어때?”

    “마린. 그러다가 또 시녀장님에게 혼난다.”

    두 사람이 받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녀들의 귀가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다른 동료들이 할 일이 배로 늘어난다. 거기에 물건을 사고 나면 손님을 마중하러 나가야 한다. 거리 중앙의 분수대에서 만나기로 한 손님은 언제까지고 그녀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여유를 부리지는 않겠지.

    가게 바깥을 바라보는 루인의 앞으로 한 소녀와 여인이 지나갔다.

    “이 사람은 정말인지. 약속 시간이 코앞인데 또 어디로 간 거야?”

    “음식점을 둘러보고 온다고 했어.”

    “또 먹으러 갔다고? 뱃속에 무슨 식충이라도 들어 있는 거야? 대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러는 건지. 그래서. 어느 음식점으로 간 거야?”

    “그건 안 물어봤어.”

    “왜 그걸 안 물어본 거야!”

    실랑이를 벌이는 목소리가 크다.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는 것 같다. 아가씨를 찾는 걸 봐서는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사용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 것 같아.”

    “알 수 있어?”

    “응. 저쪽에서 냄새가 나거든.”

    손을 든 여인은 「마족도 울고 가는 사나이 식당」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분 나쁜 이름이네. 정말로 저기 있는 거야?”

    “응. 아가씨의 냄새는 특별하니까.”

    “좋아. 앞장서. 잡으러 가자.”

    “잡으러 가다니. 그런 표현은 쓰지 말라고 하셨잖아. 마중 나간다는 좋은 표현을 내버려 두고 왜 그러는 거야.”

    “일일이 트집 잡지 말고 좀!”

    식당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가리듯 마린이 예쁜 자수를 보였다.

    “언니. 은색이 좋을까? 금색이 좋을까?”

    “전자가 더 좋다고 생각해.”

    “역시 그런가. 하지만 금색도 아까운데. 왜 은색이 더 좋다고 생각해?”

    “정말인지. 그냥 둘 다 사렴.”

    “돈이 없단 말이야!”

    바라건대, 오늘 마중하러 나가는 손님이 약속 시간에 관대하기를.

    루인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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