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신목은 알고 있어
눈꽃이 핀 신목 아래에서 아리시엘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바깥에 나와 있었던 건지, 소녀의 하얀 피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발이 흩날린다. 사르르 떨어지는 눈송이와 맞닿은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하얀 세상이 푸른 눈에 담겼다. 흩날리는 눈발을 본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옮긴다.
아가씨의 준비가 끝난 걸 본 알베르트는 준비한 사과를 던졌다.
아리시엘은 마나를 활성화했다.
일순간 몸이 가벼워졌다. 시야가 선명해지고 감각이 예민해진다.
떨어지는 사과를 포착한 그녀는 검을 뽑았다.
일섬.
푸른 궤적이 사과를 갈랐다.
툭.
지면에서 구르는 사과들을 본 알베르트는 손뼉을 쳤다.
“훌륭하십니다, 아가씨.”
“훌륭하기는. 전부 베어내지도 못했는데.”
떨어진 사과를 바라보는 아가씨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다섯 개의 사과 중 갈라진 것은 세 개뿐이다. 그중에서도 반으로 갈라진 사과는 한 개밖에 없었다. 나머지 두 개는 이상한 크기로 쪼개져 있었다.
알베르트는 아가씨를 향해 손수건을 건넸다.
하얀 수건을 받은 아리시엘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전에?”
알베르트는 이곳으로 다가오는 쌍둥이 시녀와 에일린을 보았다.
그녀들의 손에는 담요와 티타임 세트가 들려 있었다.
“말씀하셨던 차가 준비된 모양입니다.”
“벌써 그런 시간이구나. 그래. 조금 쉬고 할까.”
잠시 후 아리시엘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한겨울에 들어선 날씨 탓일까. 푸른 호수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모포를 두른 아가씨는 잔을 들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따뜻한 차를 입에 머금은 그녀는 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것을 먹자 싸늘해진 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온기를 되찾은 아가씨의 얼굴에 여유가 돌아왔다.
“성과가 보이시는 것 같네요, 아가씨.”
“흥. 뻔히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둬.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걸.”
“그렇지 않아요. 제가 봐도 빨라진 게 보이는걸요.”
“마린까지 그러기야? 아직 멀었다니까. 적어도 로엔처럼 오러를 다뤄야 할 거 아냐.”
“오러를요? 아가씨. 로엔 경이라면 이제 곧 소드 마스터를 앞에 둔 기사님이시잖아요. 목표를 좀 더 낮게 잡아보시는 건 어떤가요?”
“난 지금도 낮다고 생각해. 최종 목표는 아버님을 능가하는 기사가 될 거야. 그 정도는 되어야 자랑스러운 루드비히 가의 가주라고 말할 수 있을 거 아냐? 다들 깜짝 놀랄걸?”
“아가씨도 참. 공작 전하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님이라고요?”
“알고 있어.”
아가씨가 농담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루엔과 마린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쉽게 믿지 않는 두 시녀의 모습에 아리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짠데, 하고 아가씨는 볼멘 목소리로 덧붙였다.
“오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가씨.”
“정말로 중요한 건 오러가 아니라 검을 다루는 방법이다. 진짜 검사는 오러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랍니다. 알았어. 알았어. 질리도록 들었다고, 그 말은.”
알베르트의 말투를 흉내 낸 아리시엘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레퍼토리는 없는 거야? 좀 더 참신한 쪽으로 말이야.”
“아가씨가 저한테서 검을 배운지 이제 두 달입니다. 급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님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아가씨는 투덜거렸다.
지난번에 검을 봐줄 때도 그랬다.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 있게 검을 들었는데.
돌아온 대답이라고는 “이제 시작선에 섰구나.” 같은 말뿐이었다. 뭔가 특출난 칭찬을 바란 건 아니다. 그래도 잘하고 있구나 같은 말은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버님은 고집불통. 쫌생이.
“하나 묻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아가씨. 공작 전하께는 꼭 검으로 인정받고 싶은 건가요?”
“당연한 걸 말하네. 루드비히 가는 무가야. 검이 아니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
“제 말은 검을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주력은 어디까지나 검을 사용하면서 부차적으로 다른 기술을 다뤄보자는 거에요. 수도에도 있잖아요. 마검사라는 존재가.”
“음, 그러니까 에일린은 지금 나한테 마법 같은 기술에 손을 대보라는 거야?”
“굳이 마법일 필요는 없어요.”
에일린의 곁에 있던 운디네와 실프가 아리시엘의 곁으로 날아갔다.
아가씨의 손에 앉은 두 정령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어떠신가요. 정령과 계약을 맺어보시는 건.”
“정령이랑…….”
흥미가 동한다는 듯 아가씨는 에일린을 보았다.
마법사보다 더 귀한 존재들이 정령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정령과의 친화력이 옅어져 갔다. 예전에는 심상치 않게 볼 수 있었던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들도, 이제 와선 찾아보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정령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내가 가능할까?”
“뭐든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에요. 또 아가씨는 제 친구들과 함께 지내셨으니, 최소 조건은 통과했다고 생각해요. 아가씨가 부르신다면 정령들도 무시하진 않겠죠.”
에일린은 품속에서 작은 돌을 꺼냈다.
정령과 계약을 맺는 데 필요한 정령석이다.
“기억하시나요, 아가씨? 정령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각각의 속성들과 친화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어. 가령 실프는 바람이고, 샐러맨더는 불. 노움은 흙이고, 운디네는 물이잖아.”
“좋은 대답입니다. 그럼 질문 하나 드려볼게요. 바람의 정령인 실프와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바람과 친화력을 높여야겠지?”
단순한 이야기지만 정답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맺기 전에는 일시적으로 자연과 감화되기 위한 준비를 하죠. 폭포에서 물을 맞는다든지, 숲속에서 명상에 잠긴다든지. 그렇지도 않으면 마도구를 사용하는 쪽도 있죠.”
“친화력을 올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나. 그럼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어?”
“그러네요.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건 달리기 정도일까요?”
“뭐?”
아가씨의 반문에 에일린이 대답했다.
“많이 뛸 필요는 없고. 잠시 바람을 쐬고 온다고 생각하세요. 호수까지 해서 쭉 달리고 오셔요.”
“농담이 지나치잖아, 에일린.”
“농담이요?”
“농담이지?”
“설마요. 자. 다녀오세요, 아가씨.”
“…….”
에일린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는다.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이 추위에 저택을 달리고 오라는 말이다.
아가씨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알베르트를 보았다.
“아가씨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안 할래.”
“아가씨.”
“아, 정말. 딱 한 바퀴야. 한 바퀴만 뛰고 올 거니까.”
아리시엘은 걸치고 있던 모포를 벗었다. 옷 위를 두들기는 찬 바람에 아가씨는 몸을 떨었다.
이왕 할 거면 빨리하는 편이 좋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호수를 향해 달렸다.
*&*
아가씨가 신목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신목 앞에는 돌무더기로 만든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 올려진 정령석은 신비한 푸른색을 머금고 있었다. 땀을 대충 닦아낸 아리시엘은 호흡을 정리했다. 제단 앞으로 다가가는 아가씨를 향해 집사가 물었다.
“만에 하나 계약을 맺는 데 실패한다면 어떡하실 건가요, 아가씨?”
“실패가 무서워서 나아가지 못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늠름한 아가씨의 대답에 알베르트의 입가가 가벼워졌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준비는 여기까지입니다. 남은 건 아가씨의 기량에 달려있어요. 정령과 계약을 맺는 주문은 기억하고 계신가요?”
“물론이야.”
“준비가 끝났으면 정령석에 마나를 넣으시면 됩니다.”
아리시엘은 제단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령석에 손을 얹은 그녀는 마나를 활성화했다. 아가씨의 마나에 정령석이 반응했다. 균열이 생기는 정령석을 본 아리시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4대 원소여. 만물을 감싸 안는 바람의 기원이여. 지금 이 자리에서 자연의 친구인 그대를 부르노니. 이 간절한 속삭임을 듣고 있다면, 나의 부름에 응해다오. 나, 아리시엘 루드비히가 감히 그대를 부르니라!”
아가씨는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그 끝에 맺힌 핏방울을 정령석 위로 떨어뜨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이윽고 정령석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잠시 후, 빛이 잠잠해진 걸 확인한 아리시엘은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녹색빛을 한 작은 체구의 요정이 있었다.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다.
“성공했어!”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소환한 실프는 이곳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이 난 아리시엘은 손을 뻗어 실프를 만져보려 했다. 실프는 재빨리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어라?”
「…….」
아가씨를 본 실프는 무언가 재밌다는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아직이에요, 아가씨. 정령을 불렀으니 계약을 맺어야죠.”
에일린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리시엘은 실프를 보았다.
아직 계약이 끝난 게 아니다. 술사의 피를 정령이 받아들임으로써 계약은 완료된다. 아가씨는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실프에게 내밀었다. 손끝에 고인 피를 본 실프는 아리시엘을 보았다.
“나랑 함께 해주지 않을래?”
「…….」
하지만 실프는 아가씨의 손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바람의 정령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설마 거절당할 거로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아가씨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띠었다.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아요. 가계약이라면 성공했어요. 링크가 느껴지시지 않나요?”
“링크?”
“네. 가슴 안쪽에서 작은 실 같은 게 느껴지실 거에요.”
가슴에 손을 얹은 아가씨는 정말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가계약을 맺으셨으니, 그 링크를 강하게 의식하시면 조금 전의 실프를 불러내실 수 있어요. 계약은 언제든지 맺으실 수 있답니다.”
“그럼 나도 정령사야?”
“그렇고말고요, 아가씨.”
에일린의 대답에 아가씨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막 정령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을 뿐이지만. 그녀는 이제 훌륭한 정령사다.
“피곤하지는 않으신가요?”
“피곤해? 뭐가? 그냥 계약을 맺었을 뿐이잖아.”
“정령술도 그 기반이 되는 건 정신력이에요. 즉 정령을 불러낼 때는 마나의 소모가 만만치 않아요. 더군다나 아가씨는 오늘 처음으로 정령을 불러낸 거잖아요.”
“그렇게 말해도 피곤하지 않은걸.”
그럴 리가 없다.
에일린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 실례가 아니라면 몸을 조금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응, 물론이야.”
아가씨의 허락을 받은 에일린은 그녀의 몸에 손을 올렸다.
마나의 흐름이 간지러운 걸까.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그만, 하고 킥킥거리는 아리시엘과 달리 에일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너. 알고 있었어?”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았을 것이다.
아가씨의 몸에 깃든 마나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무도가 아닌 다른 길로 걸어가는 것을
“아가씨. 혹시 검이 아니라 마법을 배워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마법? 싫어. 나는 루드비히 가의 아리시엘이야. 설령 마도에 재능이 있다고 한들. 그쪽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아.”
“알베르트.”
“나는 아가씨의 의사가 무엇보다 우선이야. 아가씨가 싫다면 내 대답 또한 거절이야.”
“아가씨의 적성은 그런 차원이 아니잖아.”
힐책하는 듯한 에일린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아가씨의 스승님을 떠올렸다.
대마법사 카라스.
아가씨를 마도로 인도했던 제국 최강의 마법사. 그 남자가 이 자리에서 가르침을 베푸는 거면 모를까. 아가씨가 원하지도 않는 마법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전 시대와 달리 지금은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걷게 하는 거야? 아가씨는 힘이 필요한 게 아니었어?”
“아가씨가 인정받고 싶은 능력은 마법이 아니야.”
루드비히 가는 무가다.
검과 마법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전자를 선택하는 무인이다.
“공작님은 알고 있어?”
“알고 계신다고 생각해.”
“믿을 수가 없어. 그런데도 검을 배우게 하신다고?”
“아가씨는 검을 이끄는 자니까.”
마도를 행하는 자는 크로만 가문이지. 루드비히 가문이 아니다.
그 경계선을 허문 셀렌느 크로만 같은 이단아가 있긴 했지만, 그 남자는 어디까지나 예외다. 이곳과는 사정이 다르다.
“이해할 수가 없어.”
“가문이란 그런 거야.”
언젠가는 아가씨가 마도를 걷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두 정령과 즐겁게 웃고 있는 아가씨를 보며 알베르트는 되뇌었다.
아가씨의 웃음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그런 그들의 모습을 신목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