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호수의 마녀(2)
“여기가 고향이면 집사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겠네요? 가령 가족분들이라든지 말이죠.”
“맞아. 그렇겠네. 알의 집은 어디야? 가족은 다 여기 사는 거야?”
“제 가족은 루드비히 저택에 있는 모두니까요. 이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야. 알의 가족은?”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습니다. 남은 혈육은 저뿐입니다.”
“아……. 음. 미안.”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드린 적이 없으니까요.”
딱히 비밀로 하는 건 아니지만, 저택 내에서도 알베르트의 가족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민감한 화제를 건드리고 말았다.
단숨에 기가 죽어버린 아리시엘은 알베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평범한 주종 관계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꺼림칙한 분위기를 읽은 에르체베트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물건을 고르고 계셨던 것 같은데. 뭔가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
아리시엘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굴리는 아가씨의 모습에 알베르트가 대답했다.
“주인님에게 드릴 선물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선물? 라베린에서?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더 실례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이 도시에서 나는 물건은 하나같이 변변찮지 않습니까. 역으로 공작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아가씨가 주인님의 취향을 알고 계시니, 그 점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가 아닐 텐데요.”
“여, 역시 그런가.”
기운이 돌아온 아가씨가 대화에 들어왔다.
힘이 빠진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사라진 상태였다.
“뭔가 좋은 물건이 없을까?”
“좋은 물건이라고 해도…….”
딱히 떠오르는 물건이 없다.
초조하다는 듯 아가씨는 손톱을 깨물었다.
에르체베트는 짐을 쌓아놓은 꾸러미 쪽으로 손을 옮겼다.
“도시에서 나는 물건은 아니지만, 이런 선물은 어떠신가요?”
그녀가 꺼낸 물건은 의복이었다.
아리시엘은 처음 보는 복식의 형태다. 드레스와도 비슷한 차림새지만, 일반적인 외출복처럼 보인다고 할까. 원단은 고급스러운 물건이다. 옷을 살펴보던 아리시엘의 시선이 에르체베트를 향했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에 그녀는 대답했다.
“마족이 즐겨 입는 옷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름 진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족이? 진짜야!?”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진귀한 정도가 아니잖아! 나한테 주는 거야?”
“지난번 선물의 보답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써주세요.”
마족의 옷을 받은 아리시엘이 새된 목소리를 냈다.
“무슨 속셈이지, 마녀. 빚을 져두고 싶은 건가.”
기뻐하는 아가씨와 달리 알베르트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언제라도 손을 쓸 수 있게 내공을 올려놓은 상태다. 아가씨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다. 소름 끼친다는 듯 에르체베트는 손사래를 쳤다.
“진정해. 뭔가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좋아. 발푸르기스의 자매의 이름으로 맹세할게. 넌 싫지만, 공녀는 마음에 들거든.”
“…….”
거짓말은 아니다.
애초에 에르체베트는 뒷공작과 거리가 멀다. 자매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면, 정말로 단순히 호의를 표시한 걸지도 모른다.
“고향으로 바로 갈 생각이야?”
“네?”
“이런 선물을 받았는데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서 그래. 어때? 우리 저택에서 조금 머무르다 가지 않겠어? 아직 보고 싶은 점도 남아 있거든.”
“점 말씀인가요. 공녀님이 궁금하시다면 이 자리에서 점을 쳐도 상관없어요.”
“아, 지금은 궁금한 게 없어.”
차후에는 생길 것 같지만,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좀 기다려주면 안 될까? 방은 많으니까 고르고 싶은 대로 골라도 돼.”
“공녀님은 욕심쟁이군요.”
에르체베트는 볼에 손을 얹었다.
문득 알베르트는 보랏빛 머리의 마녀가 떠올랐다. 곤란하다는 듯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더 머무를 수는 없거든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음……. 그래? 그럼 별수 없지.”
“네. 혹 다음에 다시 찾아뵐 일이 있으면 그때는 저택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알았어. 그러니까…….”
“제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에르체베트. 제 이름은 에르체베트 로젠입니다, 아리시엘 공녀님.”
고개를 숙이는 에르체베트를 향해 아리시엘은 손을 내밀었다.
“좋아. 다음에 보자. 언제든지 환영할게. 에르체베트는 내 친구니까.”
“친구……. 과분한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공녀님.”
이히히, 하고 아리시엘은 빙긋 웃었다.
*&*
이안은 무너진 던전을 둘러보고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던전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던전이 있던 터에는 잔해가 가득했다. 입구를 비롯해 주변의 동상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던전을 앞에 둔 채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던전 주변에서 소란을 일으키다니. 어떤 바보가 그런 거야?”
“또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군. 빌어먹을. 귀찮게 됐어.”
“웬일로 괜찮은 곳이 있었는가 싶었지.”
던전을 조사하러 나온 것은 이안만이 아니다.
여느 때처럼 던전을 탐색하러 나온 모험가들이다.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노다지가 가능했던 던전이 하루아침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모험가들은 다시 다른 사냥터를 찾아야겠지.
이 사실을 반기는 이는 없다.
장물아비들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공수해온 물건을 현장에서 판매한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것이 가능했다. 비교적 안정적인 모험가의 길을 이용한다지만, 목숨을 걸고 오가는 행상이다. 그들의 목숨값이 더해진 장물은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장사치들은 혀를 찼다.
몇 년 동안 잘 이용하던 던전이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모험가들의 발길이 끊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문제는 장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장물을 살 모험가는 한정되어 있고, 장물을 가져온 상인은 많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는 것. 계산이 끝난 상인들은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른 장터를 찾아서.
다른 상인들이 선수 치기 전에,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
그리고 떠나가는 상인들 사이에는 붉은빛으로 빛나는 마법사가 있었다.
아클레이 모험단의 마법사인 붉은 꽃의 리안나다.
빛이 잦아든다.
고요함 속에서 눈을 뜬 리안나는 지면을 쓰다듬었다.
“여기에, 있었어. 네크로맨서가.”
“어디로 간지 알 수 있겠어?”
단장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흔적을, 지웠어. 익숙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보다 위. 그것도 아주 뛰어난 솜씨. 가능하다면,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어렴풋이 남은 흔적을 확인할 뿐인데, 마나의 질이 다르다.
거기에 기분 탓이 아니라면 꺼림칙한 기운마저 어려있었다.
“알고, 있었어?”
리안나는 의뢰주, 성기사 이안을 보았다.
“몇 명이나 있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이안은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고 리안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펼쳐진 손가락은 둘.
“확실한가?”
“붉은 꽃의 이름에 걸고.”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안은 아클레이 모험단의 마법사를 조용히 응시했다.
붉은 꽃의 리안나.
실력은 믿을 수 있다. 제국 내에서도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마탑 출신의 마법사다. 대마법사 카라스의 눈에 띄어 마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녀의 경지는, 마도 병단의 전투 마법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터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마나만이 아니다. 신성력과는 정반대되는 힘. 제국의 적. 마족이 다루는 마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역시 성녀님의 말씀이 옳았다.
이 이상 사태의 배후에는 마족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단장?”
“어떻게고 뭐고……. 강한 놈이라면서. 보수가 적다면 굳이 우리가 움직일 필요는 없어.”
“단장.”
“왜?”
아클레이의 반문에 리안나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됐어. 단장은, 그런 남자니까.”
“보수가 괜찮아지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보수, 좋은 거. 실종 사건.”
“그 건은 별로 끌리지가 않네.”
“실종 사건이라니, 그건 뭐지?”
이안의 물음에 리안나와 아클레이가 입을 열었다.
“성기사님은 모르고 있었나 보군요. 최근 이 주변에서 발생 중인 실종 사건입니다. 소문으로는 네크로맨서가 그 배후에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범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크로맨서가 부린 언데드. 마물의 시체를 활용. 사람 아님.”
“그 건과 이 건은 범인이 다르다는 말이군.”
흠, 하고 이안은 턱을 매만졌다.
그럼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고개를 든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모험가 길드에 도착한 아가씨는 로엔과 함께 길드장의 방으로 들어갔다.
본래는 알베르트도 동행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같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쪽의 상황은 로엔에게 맡긴다. 접수대를 둘러본 그는 텅 빈 테이블로 향했다. 수상쩍다는 듯 바라보는 모험가들의 시선을 넘긴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자리, 비어 있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낡은 로브와 후드로 몸을 가린 손님은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그사이에 마음이 바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맡겨놓은 게 생각나서 찾아온 것뿐이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에르체베트다. 그녀는 후드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아가씨는 안에 계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조금 기다려.”
“알고 있어. 나는 공녀님을 보러 온 게 아니야. 떠나기 전에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걱정하지 마. 어젯밤 지른 비명에 대한 거라면 비밀로 해줄게.”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구태여 왜 그 화제를 언급하냐고, 마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쏟아지는 시선에 에르체베트는 거북한 기침을 터뜨렸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모험가들이 시선을 거두는 걸 확인한 그녀는 말했다.
“안 물어볼 거야?”
“네가 솔직하게 대답해줄 거로는 생각하지 않는데.”
“잘 아네. 무릎 꿇고 사정사정 빈다면 생각해볼 수는 있어.”
“그럼 이야기는 끝났네.”
“끝나긴 뭐가?”
목소리를 높이던 에르체베트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에 얼굴을 숙였다.
“너 진짜 정떨어진다.”
“붙을 정도 없어.”
“됐어.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안 물어볼 거야?”
“…….”
유피에르 바토리.
그녀를 언급하는 에르체베트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에르체베트는 코웃음을 쳤다.
“언니는 화가 났어. 그것도 꽤 많이.”
“역시 그런가.”
“그래도 진짜로 화가 난 건 아니야.”
“무슨 말이야?”
“거기까지 말해줄 의리는 없어. 그건 네가 만나서 알아봐.”
“몸 상태는 좀 어때?”
“그 점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의녀랑 시녀가 붙어 있거든.”
“의녀?”
혹시 아란 씨인 걸까. 알베르트가 그녀의 이름을 꺼내자 에르체베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녀 쪽은 치우 란랑이라는 이름이야. 시녀 쪽은 분명 소피아였지?”
“란랑이…….”
아랑 사형과 아란 씨의 딸이다.
그 서투른 소녀가 유피의 곁을 지키고 있다면 건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아란 씨를 닮아서 의술 하나는 확실한 아이니까.
혹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그 밤의 문답을 떠올린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나름대로 유피의 곁에서 답을 찾고 있는 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유피는 지금 산에 있는 모양이네.”
“아니. 지금은 전 세계를 떠돌면서 뱀의 추종자를 추적하고 있어.”
악마신봉자.
뱀의 추종자.
알베르트가 이쪽에서 그들의 뒤를 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피 역시 그 흔적을 쫓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뱀을 추적한다면 언젠가 이 길이 그녀가 걷는 길과 겹치리라.
“세실리아 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어떻게 지내다니. 큰 언니는…….”
아, 그런가. 하고 마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에르체베트의 시선이 한동안 알베르트에게 머물렀다. 무언가 알고 싶다는 듯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잡고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바보구나. 너한테 건 마법이 풀렸는데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큰 언니라면 세계수의 정상에 오르셨어.”
“세실리아 님이……?”
마녀가 오른다는 세계수의 정상.
아가씨가 보여줬던 과거의 편린에서 알베르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즉 그곳에 올랐다는 말은…….
“더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는 말이구나.”
“응. 역대 산의 마녀가 그러했듯이. 자매들이 보는 앞에서 정상에 오르셨어.”
“유피도. 그 자리에 있었어?”
“당연한 소리를 하네.”
“울었어?”
“…….”
잠시 말문이 막힌 에르체베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런가.”
유피에게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사람이다.
모르긴 몰라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더 많이 울었겠지. 그래도 준비가 된 상태에서 받아들인 이별이지 않았을까. 자매들과 함께 슬픔을 나눴다면,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웠으리라.
에르체베트는 테이블 위로 꾸러미를 올렸다.
“받아.”
“이건?”
“큰 언니가 계승자한테 주라고 했어.”
“나한테?”
꽤 큰 물건이다.
열어보라는 에르체베트의 시선에 알베르트는 꾸러미를 풀었다.
꾸러미 안에는 새장이 있었다.
새장 안에는 움직이지 않는 보랏빛 까마귀가 있었다.
“선물이라고 하면 알 거라던데?”
“선물이라니, 마지막까지 정말…….”
이마에 손을 올린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이 그녀다운가.
안녕히 가시기를, 산의 마녀. 가능하다면 한 번 더 뵙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하고 갈게.”
자리에서 일어난 마녀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여기에는 놈들의 냄새가 가득해. 도시의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는 건 아마 녀석들이지 않을까 싶어. 정말로 네가 공녀를 소중히 여긴다면,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충고, 고맙게 받아들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