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호수의 마녀(1) (150/200)
  •  # 150

    호수의 마녀(1)

    아리시엘은 부스스한 머리를 누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았던 건지, 몸 이곳저곳에서 둔한 아픔이 느껴졌다. 딱딱한 침대에서 잔 탓이다. 푹신푹신한 저택의 침대와는 다르다. 돌덩이 같은 침대에서 소녀는 몸을 일으켰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아가씨, 알베르트입니다.” 집사의 목소리다. 아리시엘은 들어와도 좋다고 대답했다.

    방 안에 들어온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의식이 선명치 않다. 물을 담긴 대야가 발끝에 닿았다. 알베르트가 갖고 온 대야는 두 개다. 하나는 온수고, 하나는 냉수다. 아리시엘은 익숙한 동작으로 온수에 발을 담갔다.

    “노아는 어딨어? 늦잠이라도 자는 거야?”

    “노아 누님이라면 저택에 있습니다.”

    “저택? 무슨 소리야, 알. 여기가 저택이잖아.”

    “아가씨. 여기는 라베린 도시입니다.”

    안개 속을 표류하는 기분이다.

    발끝에서 퍼지는 온기가 기분 좋다. 조금 정신이 든 아리시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의 구조는 어딘가 낯설었다. 익숙한 자신의 방이 아니다.

    어젯밤 늦게 잡은 모험가의 쉼터다. 간단한 식사와 숙박을 할 수 있는 여관이다. 일단은 쉼터 중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휴식을 취하고 보니 전부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녀는 물장구를 쳤다.

    찰박찰박, 온수가 튀긴다. 아가씨의 발과 닿은 물방울이 알베르트의 옷에 떨어졌다. 연미복이 물을 먹는다. 집사는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 작은 의자를 가져온 그는 그 위로 찬물이 담긴 대야를 올렸다.

    아리시엘은 자,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찬물에 손을 적신 알베르트는 그녀의 얼굴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냉수가 닿자 정신이 번쩍 든다.

    조금 차갑긴 해도 참을 만한 한기다. 발에서 올라오는 온기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머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감는 건 싫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아리시엘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준비성 좋은 집사가 아침 식사까지 챙겨온 모양이다. 대야를 치운 알베르트는 식사가 담긴 쟁반을 올렸다. 메뉴는 옥수수 수프와 빵이다. 빵 사이에 발라진 딸기잼이 달콤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저택의 식사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하지만 아리시엘은 식욕이 샘솟는 걸 느꼈다. 식사라고는 어제저녁에 먹은 고구마가 전부다. 모험가 길드에서 나온 술은 그녀가 마실 만한 음료가 못됐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아리시엘은 알베르트에게 물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

    “라베린 도시에서의 일정은 끝났습니다. 모험가 길드장에게 인사 정도만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늦지 않게 저택에 돌아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

    “보수는 문제없는 거지? 루드비히의 이름으로 약조했어. 혹여라도 말이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해.”

    “아가씨의 명대로 처리했습니다. 어젯밤 언데드 토벌에 참여한 모험가들에게는, 통상 시세보다 1.5배에 가까운 보수를 지급했습니다. 검이 비난받을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아클레이 모험단에게는?”

    “똑같이 1.5배에 가까운 보수를 치렀습니다.”

    네크로맨서는 아니지만, 언데드를 이끌고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를 제압한 모험단이다.

    졸음과 싸우느라 붉어진 눈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아가씨가 확실히 짚고 넘어간 부분이다. 공적을 쌓은 이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 아리시엘은 루드비히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금액을 약속했다.

    “성수는 루미에르 교단에서 제공했다고 들었어.”

    “이안 경에게 확인해봤습니다. 소모한 성수는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예산이 조금 남았겠네.”

    “당초 주인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3할 정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저택에서 나오기 전 아버님이 말했던 대로다.

    여윳돈을 어떻게 사용할 건지는 그녀의 판단에 맡긴다고 했다.

    “알의 생각은 어때?”

    “빚을 져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그렇지? 혹시 모를 비상금만 남겨놓자. 2할은 길드장에게. 1할은 모험가들에게 나눠줘. 전부 길드에 넘겨버리면 경비금을 핑계로 빼돌릴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아리시엘은 물을 마셨다. 찬물로 입을 적신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남은 돈으로는 선물을 사가고 싶어.”

    “라베린 도시는 따로 유흥거리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가씨의 의중을 읽어낸 집사가 말했다.

    “모험가들이 모여 세운 도시입니다. 오락이라고는 술과 도박, 매춘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인님에게 드릴 만한 관광용품은 없습니다.”

    “먹을거리나 특산품도 괜찮아.”

    “이곳에서 조금 특출난 것은 성수뿐이죠.”

    알베르트의 대답은 사실이었다.

    라베린 도시에 기념품 같은 건 없다.

    모험가들의 거점인 이 도시에는 무기와 소도구, 식료품을 비롯해 몸을 쉴 수 있는 여관이 주다. 금지된 숲이 지척에 있는 관계로 도시 간의 교류도 썩 원활하지 않다. 도시의 음식이 항상 부족한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다니는 상인들이 있기 마련이다. 수요는 있고 공급은 적다. 자연히 물품의 값은 올라갔다.

    “확실해?”

    “여기는 제가 자라고 난 도시니까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대답에 아리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고향이라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사람은…….

    “잠깐. 라베린 도시가 고향이었어?”

    “일단은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게 집사의 고향을 알아버렸다.

    “그럼 여기에 대해서 많이 알겠네? 잘됐네. 그나마 괜찮은 물건을 좀 골라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라베린 도시의 특산품은…….”

    알베르트는 말을 멈췄다.

    무언가 생각난 것 같다. 아리시엘의 기대에 찬 눈빛이 집사를 향했다.

    “특산품이라고 할 만한 물건은 아닙니다만. 모험가들이 조각하는 상이 있습니다. 라베린 도시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죠.”

    “좋아. 그걸로 가자!”

    “그래도 누군가에게 선물하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마족을 조각한 상이거든요.”

    “마족 조각상? 으음……. 그래도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은데.”

    아버님은 진귀한 물건을 좋아하신다. 특이하고 그것이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면 당연히 반기시지만, 그것이 검을 맞대는 마족의 상이라면 어떨까. 혹여 화를 내실지도 모른다. 고민하는 아리시엘을 향해 알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사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내가 직접 고를 거야.”

    “아가씨께서 말씀입니까?”

    “응, 아버님에게 줄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조각상이다.

    실제 마족도 아니니 기뻐해 주실 것이 틀림없다.

    잔을 비운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리시엘은 알베르트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함께 다니던 일행은 두 사람의 곁에 있지 않았다. 클레멘트 도시에 시찰을 나갔을 때와 똑같다. 에일린은 지붕 위에서 정령을 부리고 있었고, 로엔은 한 발자국 떨어진 장소에서 아가씨를 호위하고 있었다. 이안은 모험가 길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교단의 일과 관련해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눌 것이 남아 있는지, 저택으로 돌아오는 건 조금 시간이 걸린다는 모양이다.

    사자기사단의 일원들은 도시 바깥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날이 밝은 지금 네크로맨서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붉은 꽃의 리안나가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아마 그들은 천마의 무덤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무너진 던전을 보고 나면 네크로맨서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 당사자였던 마녀는 빠져나간 지 오래지만 말이다.

    어젯밤. 무너지는 무덤에서 에르체베트를 구해낸 것은 알베르트였다.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계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이곳에서의 볼일도 끝난 것 같았고 말이다. 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다.

    모험가가 차려놓은 작은 노점상 앞에서 아리시엘은 물건을 살펴보고 있었다.

    귀여운 미간이 필요 이상으로 좁혀진다. 아가씨는 조각상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듯 싶다.

    “어설퍼.”

    마족의 본모습은 인간과 괴물을 반쯤 섞어놓았다고 들었는데.

    이 조각상은 그것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다. 마치 반인반수처럼 상체는 마물이고, 하체는 인간이다. 어떤 조각상은 어젯밤의 언데드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다. 기괴망측하게 생긴 것도 싫은데. 모험가의 조각 실력도 좋은 편이 아니라 어설프기 짝이 없는 조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진귀한 게 문제가 아니다.

    이런 조잡한 조각상을 선물로 가져갔다가는 아버님에게 혼쭐이 날 거다.

    반면, 알베르트는 이런 물건도 괜찮은지 인간을 닮은 조각상을 두 개나 샀다.

    “이런 게 취향이야? 알은 참 이상하네.”

    “쌍둥이 자매에게 줄 생각입니다.”

    “루인이랑 마린에게?”

    “네, 마족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잠시 조각상을 보고 있던 아리시엘은 인간과 언데드가 섞인 조각상을 잡았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 알베르트는 동화 몇 푼을 모험가의 손에 쥐여줬다.

    “그래. 그럼 이건 노아에게 줄래.”

    “누님에게 말씀입니까? 아가씨가 주는 선물이라면 분명 기뻐하겠군요.”

    “정말? 이렇게 생겼는데도 괜찮을까?”

    “물건이 중요한 게 아니죠. 아가씨가 줬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정에 약한 누님이다.

    딸자식처럼 키운 아가씨가 주는 선물이라면 어떤 물건이라도 좋아할 것이다.

    노아에게 줄 선물은 골랐다.

    다시 아버님에게 줄 선물을 골라보자.

    아리시엘은 알베르트를 대동한 채 노점상을 둘러보았다.

    모험가들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라베린의 상가는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몬스터의 체액이나 피. 마물의 힘이 담긴 뿔을 비롯해 잿가루 같은 수상쩍은 물건도 많았다. 무기 중에는 저주가 담긴 도끼나 독이 듬뿍 발린 단검도 눈에 들어왔다.

    모험가들이 쓰기엔 좋을지 몰라도. 아버님에게 드릴 만한 물건은 아니다.

    한 시간을 꼬박 고생한 아리시엘은 양 볼을 부풀렸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어.”

    “원래 이런 도시입니다, 아가씨.”

    “좀 더 발전할 가능성은 없는 거야?”

    “마족과의 관계가 변하지 않는 한, 힘들 거로 생각합니다.”

    라베린 도시에서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이 한 실력 하는 모험가들이다.

    장사치인 사람들도 은퇴한 모험가나 어쩔 수 없이 모험가에서 물러난 이들이 대부분이다. 제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라면 마족의 땅과 맞닿은 이런 외지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모험가 길드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얼굴을 보고 가야 했으니, 일정에 문제는 없다. 길드장 정도 되면 괜찮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혹시나 하지만, 마족이 남겼다는 유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걸음을 돌리던 아리시엘은 한 노점상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수상쩍은 수정구를 올린 노점상이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점쟁이는 한창 손님의 점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점이 끝나고 돈을 받은 점쟁이를 아리시엘은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그녀는 점쟁이에게 다가갔다.

    “안녕, 늪지의 점쟁이.”

    “네?”

    연보랏빛의 머리카락이 후드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다. 늪지의 점쟁이. 호수의 마녀인 에르체베트 로젠이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전 호수의 점쟁이랍니다.”

    “여기서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나 보네. 장사할 거면 클레멘트가 더 낫지 않아?”

    “…….”

    에르체베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가씨의 말을 무시한다. 정체가 들통나기 전에 도망치자. 아무렇지도 않게 장사 도구를 치우던 그녀는 손을 멈췄다. 자신을 보고 있는 알베르트의 눈빛이 무섭다.

    암독제와 알베르트의 비무가 생각난 걸까.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정구를 내려놓은 마녀는 후드를 벗었다.

    햇빛 아래에 에르체베트의 얼굴이 드러났다. 기가 세 보이는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짙게 끼어 있었다. 유피도 그러했지만, 어제 사용한 마나가 회복되지 않은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절 알아보시면 곤란해지시는 거 아닌가요, 공녀님. 여기는 클레멘트처럼 치안이 좋지 않다고요. 나쁜 사람이 아주 많은 도시에요.”

    “배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 주변에는 강한 사람이 많거든.”

    “그러네요. 강하죠. 정말로요.”

    아가씨는 로엔과 에일린을 떠올리며 대답했지만, 에르체베트는 알베르트를 보고 있었다.

    서로 말하는 사람은 다르지만, 의미는 통했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클레멘트에서 장사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점쟁이가 다 그렇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돈을 버는 거예요. 뭐,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지만요.”

    이런 곳에서 그녀와 마주했기 때문일까, 아가씨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마지막? 점치는 걸 그만두는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이제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서요. 어르신의 부탁도 끝났고,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도 전부 봐서.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에요.”

    암독제의 일은 어제부로 끝났다.

    호수의 마녀는 이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다.

    이곳은 제국의 땅이다. 마족인 그녀가 오래 머무르기에는 좋은 장소가 아니다.

    “고향 말이네. 참, 알베르트는 여기가 고향이라고 했어.”

    “여기가요?”

    “응. 내 집사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모양이야.”

    “그렇군요. 이 도시가…….”

    에르체베트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집사에게 주인님은 한 명이죠?”

    “응, 알베르트는 내 집사야.”

    “그래요? 그렇죠. 주인님은 한 분뿐이죠. 알베르트도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제 주인님은 아가씨 한 분이니까요.”

    “…….”

    집사의 대답에 에르체베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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