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무덤의 뒤편 (148/200)

 # 148

무덤의 뒤편

언데드를 뚫고 무덤으로 내려온 알베르트는 손을 들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벽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표식도 보이지 않았다. 손끝으로 내공을 운용한다. 알베르트의 내공과 맞닿은 벽면은 옅은 빛이 반짝였다. 사라질 것 같은 마법진. 내공을 식량으로 삼은 녀석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습한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비좁은 길이 나타났다. 빛이라고는 한 점 보이지 않는다. 미리 준비해 온 등잔에 불을 넣은 알베르트는 통로 안쪽으로 나아갔다.

[마스터.]

들었던 발을 도로 내린다.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운 알베르트는 앞으로 던져보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간 돌멩이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닿기 전 조각은 한 번 더 부서졌다. 불을 앞으로 가져간다. 철사와도 같은 날카로운 줄이 통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검붉은 검기가 어둠을 갈랐다.

힘을 잃은 철사가 떨어졌다. 적어도 보이는 위협은 사라졌다.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트랩을 걷어내며 나아간 알베르트의 앞에 낡은 객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객잔 앞에는 무릎을 꿇은 망자가 있었다.

한번은 쓰러졌을 터인 녀석이 꿈틀거렸다. 검을 쥔 망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갑옷을 입은 녀석이다. 시더 황자가 제압했던 그 망자다.

철판이 몸에 모두 붙기 전에, 알베르트는 그 앞으로 치고 나갔다.

거리를 좁힌 그의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 있었다.

일검.

붉은 강기를 머금은 롱소드가 망자의 몸을 갈랐다.

철판과 함께 쪼개진 녀석의 몸은 힘없이 무너졌다.

알베르트는 객잔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턱에는 푸른빛의 액체가 묻어 있었다. 스멀스멀 지독한 냄새가 올라온다. 독기라는 것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문 옆으로 돌아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아래에서 무언가가 밟혔다.

반사적으로 알베르트는 검을 들었다. 충격이 달렸다. 검신을 두들긴 건 작은 암기였다.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워서 잘 몰랐을 뿐이지. 객잔 곳곳에는 트랩이 가득했다. 철사를 비롯해 독기가 흘러나오는 그릇.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바닥은 밟으면 장치가 발동했다.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을 받아낸다. 창끝은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독이다.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까지 오는 통로는 장난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객잔 안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어두운 계산대 너머. 낡은 의자와 탁자밖에 보이지 않는 홀. 한때 시더가 무너뜨린 객잔의 벽 쪽도. 평범한 물건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가. 이곳은 이미 사냥터다. 사냥꾼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와 같다. 놈은 객잔 안에 들어온 알베르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간단하다. 먹잇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포식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고 있을 뿐이다.

발걸음을 돌린다. 아무 준비 없이 사냥터로 들어가는 건 무모하다.

일단 객잔 밖으로 나온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트랩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돌파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통로처럼 전부 부숴버리면 편할지도 모르지만, 그 여파로 마법진이 훼손될지도 몰랐다. 다행히 알베르트의 생각은 길지 않았다. 고민하는 그를 알아차린 것처럼 객잔에서 작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거적때기를 눌러쓴 망자였다.

꼽추처럼 허리가 굽은 망자는 알베르트를 보고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기억에 있는 모습이다.

암독제.

하오문의 문주.

천마의 뒤를 따랐다는 무덤수호자 중 한 명.

무너진 중원에서 떠돌고 있을 그가, 이곳에 나와 있었다.

먼지가 일었다.

암독제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작은 암기가 알베르트의 목을 노렸다. 단도가 떨어졌다. 위협은 계속해서 따라온다. 암독제의 좌측 손에는 날카로운 침이. 우측 손에는 검이.

먼저 수를 취한 건 침이다.

검을 쥔 알베르트의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경계해야 할 건 침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놈의 주 무기는 검이다. 날아오는 침을 확인한 알베르트는 왼손을 움직였다. 손안에는 한 움큼의 침이 잡혀있었다. 두 검이 맞물렸다. 그러나 힘의 차이는 완벽했다. 암독제의 손이 튕겨 나갔다. 알베르트는 그 뒤를 쫓았다.

따라붙는 추격자가 우습다는 듯 암독제는 속도를 올렸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떨어지지 않는다. 역으로 그 움직임을 상회한다.

쫓기는 것은 암독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녀석은 몸을 뒤로 물렀다.

그 움직임을 알베르트는 읽고 있었다.

뻔한 수였다. 놓치지 않는다. 거리를 벌릴 거로는 예상했다.

암독제의 소매가 펄럭였다. 그 안쪽에서 검은 흙더미가 나타났다. 얼굴이 따끔거린다. 독이다.

거리는 이미 초근접. 피할만한 여유는 없다.

알베르트가 들어올 걸 암독제는 알고 있었다.

발을 뺀 것 자체가 이미 노림수. 함정을 파고 있던 것은 암독제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피하지 않는다.

피할 필요는 없었다.

깨달았을 때는 늦었다. 목표를 앞에 둔 채, 암독제는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물러나는 그 손을 알베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서걱.

암독제의 오른팔이 치솟았다.

주인을 잃은 어깨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암독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많지 않다. 긴 세월을 보낸 육신은 이미 한계를 넘어버린 거겠지. 벽면에서 새어 나오는 물줄기처럼.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내렸다.

뚝뚝.

한쪽밖에 남지 않은 손을 그는 품 안으로 옮겼다.

몸을 숙인 암독제는 알베르트를 노려보았다.

출수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오른팔을 잃은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그 투지에 답한다. 알베르트는 검을 들었다. 암독제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녀석의 몸이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튀어나온다. 부딪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짝짝, 하고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났다.

“과연. 계승자라는 이름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손뼉을 친 건 한 여인이었다.

로브를 입은 그 여자는 객잔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알베르트의 눈이 꿈틀거렸다. 안쪽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터다. 하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보랏빛 머리의 여인.

머리를 두 갈래로 딴 여자를 본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늪지의 점쟁이.”

“여기서 보게 되는군요, 알베르트 란.”

그녀의 주변에는 호위기사처럼 어비스 나이트가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베르트는 알 수 있었다. 소문의 네크로맨서는 눈앞의 점쟁이였던 모양이다.

“점쟁이가 아니라 네크로맨서였나.”

“네크로맨서? 절 그런 하찮은 것과 비교하면 곤란하죠. 늪지의 점쟁이라는 것도 인족들이 제멋대로 지어준 이름일 뿐. 제 정체는 조금 특별하답니다.”

인족.

그녀가 자연스럽게 꺼낸 단어에 알베르트는 반응했다.

“이건 선전포고인가?”

“선전포고?”

“마족이 언데드를 부려 제국의 땅을 공격했다. 전면전을 바라고 움직인 게 아닌가?”

“…….”

알베르트는 칼자루를 쓰다듬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점쟁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런 어린애 같은 장난이 선전포고라고?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아. 인족들은 정말 약해 빠졌구나.”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너는 뱀을 따르는 신도인가?”

“뱀?”

최악의 수를 생각하며 물었지만, 그녀는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뱀의 추종자를 말하는 거야? 어리석은 물음이네. 이 몸이 그런 야만인들과 어울릴 거로 생각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겠어.”

격한 반응에 알베르트는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아무래도 최악의 사태는 피해간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네. 발푸르기스의 자매가 나쁜 뜻을 품고 제국에 온 건 아니니.”

“…….”

“왜 그래? 네 정체는 전부 알고 있어. 호수의 마녀.”

태연한 알베르트의 목소리에 호수의 마녀는 얼어붙었다.

유피가 말하길. 그녀가 아는 자매 중에서도 유달리 장난이 심한 마녀라고 했다.

무덤 안쪽에 마석 대신 설치되어 있던 인형은 분명 그녀의 작품이다. 유피와 낙양에서 구했던 촉매제가 그것과 비슷한 인형이라는 걸 알베르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아아, 아니거든? 마녀라니.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네.”

“유피의 말대로네. 호수의 마녀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동생이라고 하던데.”

“언니는 그런 소리 안 하거든!?”

빽, 하고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

“…….”

마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목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런 어린애 같은 장난이 선전포고라고?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아. 인족들은 정말 약해 빠졌구나.”

없던 일로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거 바보군요.]

어이없어하는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긍정했다.

아무래도 이쪽이 진짜 얼굴인 모양이다. 산의 마녀인 세실리아나 숲의 마녀인 유피와 달리 꽤나 어설픈 마녀다.

호수의 마녀. 기억을 더듬어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에르체베트 로젠.”

“뭐야?”

에르체베트는 자연스럽게 반문했다.

“…….”

“…….”

이제는 부정해도 글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마녀를 보며 알베르트는 말을 이었다.

“발푸르기스의 자매는 마족 내에서도 높은 지위를 갖고 있지. 그렇기에 마녀라는 이름에는 그만한 무게가 실려있어. 그럴 의사가 없었다고 해도, 네 행동은 마족을 대변해. 그런데 장난이라고? 설마 그런 자각도 없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저지른 거야? 그렇다면 실망을 감출 수가 없는데.”

“뭐?”

마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멍하니 입을 벌린 그녀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감정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더 떠볼 필요도 없었다. 이 마녀는 어딘가 어설펐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모르고 움직인 모양이다.

산의 마녀는 뭘 하는 건지.

발푸르기스의 자매를 통괄하는 건 그녀의 역할이지 않았나.

“어리네.”

“어…… 어려!?”

에르체베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린애 장난치고는 도가 지나쳤어. 돌아가면 자매들에게 혼나는 거 아니야?”

“누누누, 누가 혼난다는 거야!?”

정곡을 찔린 것처럼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당황감은 이내 분노로 승화되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결정했어. 너, 이제부터 큰일 난 거야. 어르신의 부탁으로 얼굴만 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밟아버릴 테니까!”

내숭을 떠는 건 그만둔 것인지, 에르체베트는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보랏빛의 지팡이를 꺼낸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지팡이 밑에서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떨어진 가루가 원을 만든다. 유피가 그러했듯이. 그녀의 발치에서 나무를 본뜬 마법진이 그려졌다.

「무엇보다 거룩한 기둥이 고한다.」

알베르트는 마녀의 마법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린애의 장난에 진지하게 임하는 어른은 없다. 여유로운 집사의 태도에 더 화가 난 것인지, 그녀는 어비스 나이트를 역소환했다. 마나를 회수한 연보랏빛 머리가 빛났다.

「지금 그대의 앞을 어지럽히는 안개를 걷어내고, 눈부신 빛을 내릴지어니.」

뿌리부터 시작된 빛이 나무를 오른다.

밑동을 지나 나아가기 시작한 광채는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앞. 그대에게는 광명이. 이 뒤. 그대에게는 심연이 내리니. 빛과 어둠은 양면의 거울과도 같은 것. 거룩한 기둥이 그 경계를 잡을지어니. 그림자는 이 손에. 빛의 뒷면을 탐구하리라.」

아홉 개의 원이 향하는 곳은 암독제가 선 대지다.

영창의 끝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베르트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오니, 이곳에서 생명의 순환을 노래하리라.」

빛이 지팡이 끝에 모인다.

연보랏빛의 마나가 망자를 향했다.

「사자회귀.」

거적때기 아래에서 암독제의 몸이 변화를 시작했다.

너덜거리는 살점이 천천히 형체를 되찾아간다. 수척한 초로의 노인이 알베르트의 앞에 서 있었다. 오른팔은 돌아오지 않는다. 왼손으로 주먹을 말은 암독제는 오른쪽 팔을 확인했다. 그곳은 텅 비어 있다.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가.

그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암독제에게서 적대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 참. 의식이 들자마자 이런 상황인가. 팔이 날아간 것은 조금 어떤가 싶군.」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요, 암독제.”

「그래, 주군의 뜻을 이은 건 자네였는가. 란 가문의 후계자여.」

알베르트는 포권을 취했다.

「사군자 중에서도 란 가문은 특별했지. 그 충성심이 아니었다면 자네의 선조는 제국으로 향하지 않았을 거야.」

“노선배는 그 연유를 알고 계십니까? 어째서 사부님이 제 선조를 제국으로 보냈는지.”

「물론이네. 란 가문이 제국으로 향할 때 노부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뭘. 그리 특별한 것도 없네. 아무리 주군이라도 여기까지 보지는 않았겠지.」

“혹 실례가 아니라면…….”

「그 물음에 노부는 답할 수 없다네. 때가 되면 주군이 말해주지 않겠나?」

“그렇습니까.”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에르체베트가 소리쳤다.

“뭘 하는 거야, 할아범! 나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줬잖아. 안 싸울 거야?”

「어린 마녀가 입이 험하구나. 노부에게 미련은 없다. 주군의 뜻을 계승한 이와 만났으니.」

“뭐……?”

헥헥, 하고 호흡을 갈무리한 그녀는 지팡이에 몸을 실었다.

힘이 다 빠졌다는 듯 마녀의 안색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끌끌. 주군이 고른 계승자가 어떤 남자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제가 노선배의 미련이라는 건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노선배님 미련은…….”

「우리가 바란 세상은 아니지만, 세상은 이미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지. 노부와 같이 지나간 세대가 간섭할 일은 아니야. 구시대의 잔재는 바람을 타고 흩날려야지. 젊은 시대의 발목을 잡고 있어선 안 돼.」

“…….”

알베르트를 바라보는 암독제의 눈은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