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사용인들의 밤
화덕의 열기가 뜨겁다.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낸 알베르트는 마지막으로 간을 보았다. 약간 짭조름하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맛. 이 정도면 됐다. 남은 재료로 만든 것치고는 제법 괜찮은 요리가 나왔다.
걸쭉한 스튜를 접시에 담아내고 식탁에 올린다.
잡탕에 가까운 야채 스튜다. 별로 식욕을 돋우는 미관은 아니다. 그래도 스튜 위로 떠오른 덩어리 중에는 간간이 고기가 보였다. 스튜를 든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 실력은 녹슬지 않았군. 한데, 엘프들도 이런 스튜를 즐겨 먹는 건가?”
“조금 다르네요. 엘프들이 주식으로 삼는 건 수액 수프입니다. 한번 맛보고 싶다면 만들어드릴 수도 있지만, 별로 추천해드리고 싶지는 않네요.”
“수액 수프? 흠…….”
흥미가 인다는 듯 로버트는 턱을 매만졌다.
“정말로 그런 걸 즐겨 먹는가?”
“의외로 단맛이 납니다.”
수액이라는 말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탓일까. 노아는 으엑,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달콤하기는 개뿔이. 쓴맛밖에 안 나거든. 차라리 나무껍질을 벗겨 먹겠어.”
“그것도 괜찮죠.”
허기를 달래는 것만 생각한다면, 수액보다 괜찮은 별미에 속했다.
기근에 시달리고 나면 마을 주변의 나무들은 씨가 말랐다. 가난한 변방 마을에서는 당연한 풍경이다. 노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밤색 머리가 흩날렸다.
“노아 언니도 그랬군요. 껍질은 저희도 많이 먹었어요.”
“막 자라나는 대나무를 발견하면 진짜 맛있게 먹었는데.”
루인과 마린이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상은 거의 차려져 가고 있었다.
시원한 물과 야채 스튜. 감자조림과 매콤한 소스를 넣은 토끼 구이. 포크와 잔의 수는 총 6개.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은 다섯 명이다. 루드비히 가문 내에서도 꽤 고참에 속하는 노아와 로버트, 알베르트. 그리고 쌍둥이 자매인 루인과 마린.
아직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몸을 굽히면서 들어온 거인은 신선한 과일이 담긴 소쿠리를 식탁 위에 올렸다.
“어라, 어디서 난 건가요? 필립. 혹시 창고에서 가져온 거면…….”
“직접, 키운 거.”
“아하, 영감님이 탐내던 그 밭에서 가져온 건가 보네요. 애지중지 키우던 과일이지 않았나요? 오늘 먹어도 괜찮겠어요?”
“좋은 날이니까, 괜찮다.”
“필립 씨…….”
알베르트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끝났다.
알베르트를 비롯해 전원이 착석하자, 여기 모인 사용인 중에서도 최고참인 로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알베르트의 생환을 축하하며. 한 번 먹어볼까?”
“예이!”
“알베르트 님의 생환을 축하하며!”
“마시자!”
“먹자!”
차린 것은 없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식단이다.
무엇보다 고기가 있다는 것이 좋다. 알베르트가 사냥해온 토끼는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네 마리다. 스튜는 어디까지나 곁가지 음식으로.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토끼 구이를 뜯고 있었다. 남자들은 차분히 먹고 있지만, 세 여자는 신경전이 상당하다.
특히 루인과 마린은 뒷다리를 놓고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리는 두 개란다, 마린.”
“하나는 노아 언니 거고. 하나는 내 거 아니야?”
“그건 누가 정한 거니?”
“이럴 때는 언니가 먼저 양보해야 하지 않아? 고생하는 동생을 위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잡아 오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루인과 마린은 알베르트의 기억에 없는 시녀였다. 정확히는 친해지기 전에 사라져버린 탓이다. 그러다 보니 그냥 얼굴이 똑같은 자매가 있었지, 하고 떠오를 뿐이다. 두 시녀의 취향을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아가씨가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나.”
“아, 로버트도 느끼고 있나 보네요? 뭔가 생기가 넘치기 시작하셨죠. 그렇게나 싫어하던 달리기도 열심히 하시고. 검도 잡고 계시잖아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걸까요?”
“철도 들기 시작했지. 이제는 밤마다 쿠키를 먹으려고 주방을 찾아오는 일이 없어졌다네. 올리는 쿠키를 남기기도 하고 말이야. 10개를 올리면 3개 정도는 남기시더군.”
“그거 그냥 배불러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아무리 아가씨가 어린애 입맛이라지만, 배부르면 먹을 수가 없다.
간식 시간도 매번 챙기고 있고, 먹는 양도 적지 않다. 단순히 양이 늘어났기 때문이지 않을까. 노아의 대답에 로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몸을 쓰는 일이 느셨다. 더 먹으면 먹었지. 덜 먹을 이유는 없겠지.”
“으음……. 알은 어떻게 생각해?”
“아가씨도 여성이지 않습니까. 여성이 간식을 조절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죠.”
“뭐?”
최근 들어서 군살이 늘어났으니까. 특히 배 쪽에 말이다.
물론 한참 성장하고 있는 나이다. 일시적으로 살이 찐 거에 지나지 않겠지.
그렇지만 아가씨는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벌써 그럴 나이신가?”
“위에서는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신경 쓸 나이죠.”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로버트의 눈치는 못 본 척 넘긴다.
요리 외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다. 여자의 미묘한 감정을 그가 알아차릴 리 없었다.
“그보다 의외네. 알이 아가씨를 그렇게 잘 보고 있을 줄은 몰랐어.”
“아가씨에 대한 거라면 아무리 누님이라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호오, 알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네? 이래 보여도 나. 아가씨의 유모였어.”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정말 귀찮다고 하셨죠.”
“그건 좀 잊어주지 않을래. 왜 그런 것만 기억하고 있는 거야?”
노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혹여라도 위에 그런 말이 들어갔다가는 한 소리 들을 것일 뻔하다.
주로 빅토리아 시녀장에게 말이다.
“최근에 말이에요. 시녀장님께서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지 않아요? 쉴 시간이 없다고요. 쉴 시간이. 진짜 마을에 내려갔을 때가 그나마 쉬는 것 같다니. 이게 말이 돼요?”
“불평하지 마. 북부에서 귀한 손님이 내려온다고 하니까. 그 준비로 다들 바쁜 거야.”
“여유, 없음.”
“네네. 정말 잘나신 분이 내려오시나 봐요? 안 그래도 마을에서는 사람이 사라진다든지. 이상한 약이 난다는 말도 있고. 이상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정말 정신이 없다고요.”
“어? 뭐야. 난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
“소식이 늦네요, 노아 언니. 정보는 곧 힘이라고요.”
“틀린 말은 아닌데, 너한테 들으니까 어째 화가 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린.”
“쳇. 알았어.”
아무리 사이가 좋더라도 선을 넘어선 안 된다.
언니의 목소리에 마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노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노아는 괜찮다는 듯 살짝 웃었다.
“시녀장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언데드가 라베린 도시 근처까지 나왔다는 모양이에요. 금지된 숲에서 나온 언데드가 도시 쪽까지 올라온 건 처음 있는 일이라서, 꽤 시끄러운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 같아요.”
“저도 들었어요. 소문이지만, 네크로맨서가 활동한다는 말도 있던데요. 듣기로는 루미에르 교까지 말이 올라갔다는 모양이에요.”
“수상하네. 혹시 모험가들이 뭔가 잘못 건드린 거 아냐? 그렇게 숲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해도 함부로 들어가는 건 녀석들이잖아. 말이 좋아 트레져헌터지, 남의 무덤이나 털어대는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사람이라면 일을 해서 돈을 벌란 말이야, 하고 노아는 포크로 토끼의 가슴살을 찔렀다.
“마족이 조용한 건 어떻게 생각해요? 전 지금까지 마족을 본 적이 없어요.”
“맞아요. 루드비히 저택에 오면 마족을 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사실 마족은 전부 죽은 거 아니냐고. 저희 사이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정도라니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정말로. 차라리 안 보이는 지금이 낫지.”
“소문. 화친이 오갔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화친이요? 마족이랑?”
필립의 대답에 쌍둥이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마족이랑 왜 손을 잡아요?”
“생각이 짧구나. 잘 생각해보렴. 마족이랑 화친을 맺는 게 가능하다면 우리로서는 나쁠 게 없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언니? 마족이라고. 그 마족! 우리 땅을 짓밟은 괴물들이라고.”
“땅을 짓밟힌 것도 벌써 400년은 더 된 이야기야.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도 다를 것이 없어. 우리 공작령만 해도 원래는 다른 왕국이었잖아. 마족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흡수한 건 우리 제국이야. 여기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나 마족이나 별로 다를 것도 없어.”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필립 씨?”
“…….”
알베르트의 물음에 필립은 침묵했다.
루드비히 공작령은 본래 변방의 소왕국이었다. 이 소왕국 출신의 인종들은 대부분 체구가 크고, 마치 거인과도 같은 몸집을 가졌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필립이 이곳의 토박이라는 건 사용인 중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우리와는 관계없다. 결국, 누가 와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렇군요. 똑같은 사람이라……. 그럼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르겠네요.”
“우리가 이야기해봤자 뭐가 달라져. 어차피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해결할 텐데. 그래도 마족이랑 손을 잡는 건 아닌 것 같아. 다른 이들이 잡자고 해도, 우리만큼은 거절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래. 어려운 이야기라고 생각해. 우리 가문에서 마족과 손을 잡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반역자로 몰릴지도 모르지. 애초에 교황 성하가 그런 일을 허락할 것 같지도 않아.”
“정말로 손을 잡는다면, 성녀님이 나와서 연설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몰라.”
쌍둥이 자매는 투덜거렸다.
그만큼 마족과 손을 잡는다는 건 황당한 이야기다. 이런 게 일반적인 제국민의 정서겠지. 제국은 아직 마족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감정의 골은 깊다. 언젠가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다.
“참, 그 소식은 들었어요? 북부의 야만인들이 엄청나게 날뛰고 있다던데.”
“세인트 월에서 내려온 소식 말이네. 소문이지만 캘러미티라고 자신들을 자칭한다고 했어.”
“캘러미티요? 자기들을 재앙이라고 칭한다는 건가요?”
“완전히 미쳤네요.”
어이가 없다는 듯 마린은 볼을 씰룩였다.
“소문도 장난이 아니던데요. 막 사람들을 납치해서 잡아먹는다는 모양이에요.”
“자, 잡아먹는다고?”
“네. 구워서 먹기도 하고. 사지를 다 해체해서 먹는다고도 하고. 끔찍한 소문이 가득해요.”
“으…….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놈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야.”
노아의 얼굴이 하얘졌다.
뜯고 있던 고기가 꺼림칙해진 걸까. 그녀는 슬며시 들고 있던 토끼 고기를 내려놓았다.
“알고 보면 마족보다 더한 놈들 같다니까요.”
“마족이나 야만인이나 똑같지, 뭘.”
“그래도 그놈들은 잡아먹지는 않잖아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좋죠.”
“시체를 갖고 뭘 할지 모르는데? 언데드가 될지도 모른다고.”
“끔찍한 이야기네요.”
웃지 못할 농담에 루인은 입가를 찌푸렸다.
“알은 숲 안에서 마족과 만난 적 없어?”
“마족 말이군요.”
알베르트는 살짝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쌍둥이 자매와 무표정한 필립 씨. 안 그런 척하면서 그를 살펴보고 있는 로버트와 말해보라는 듯 바라보고 있는 노아 누님.
어느 정도 밝히는 건 괜찮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는 건 그의 가족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만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다행히 싸우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진짜야? 다행이네, 그거.”
“마족이 정말로 있긴 한가 보네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네. 그럼 없는 걸 있다고 하겠어?”
요즘 애들은 안보 의식이 부족하다니까.
노아의 덧붙임에 네에, 네에, 하고 마린이 늘어지는 대답을 돌려줬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성수의 힘이 아니라면 구분하기 힘들 겁니다.”
“제대로 안 들을 거야?”“어딜 잡아당기는 거예요!?”“화,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왜 저한테까지……!?” 쌍둥이 자매의 머리를 잡고 당기는 노아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필립 씨는 말없이 로사리오로 손을 옮겼다.
“성녀님이 계셔서, 다행이지.”
“그러네요. 성녀님이 계시니까요.”
성녀 프랑소와.
아르웬 성녀의 뒤를 이은 그녀의 신성력은 제국 내에서도 견줄 자가 없었다.
설령 마족이 제국의 땅을 침입한다고 해도, 그녀의 신성력이 있다면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엘프에게서, 다양한 기술을 배웠다고. 들었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재주입니다.”
“맞아요. 저택 내에서도 소문이 쫙 났어요! 아가씨에게 검 쥐는 법을 가르쳐주고 그러신다면서요?”
“주인님도 아는 눈치던데. 뭐라고 듣는 거 아닌가요?”
티격태격하는 세 사람이 알베르트를 보았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다. 마린의 입에 손을 넣은 노아와 그녀를 말리는 루인. 세 사람이 얽힌 모습을 본 알베르트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무래도 엘프들이 가르쳐 준 자세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알베르트가 아리시엘에게 자세를 알려준 지도 벌써 한 달이다.
그 이후로 틈틈이 지도해드리고 있었지만, 주인님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모르실 리는 없을 테고. 한동안은 지켜보자는 의미겠지. 실제로 아가씨의 자세는 많이 좋아졌다. 다음 지도 때는 꽤 놀라지 않으실까. 칭찬이라도 받으면 아가씨가 꽤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금지된 숲에 거처를 잡은 엘프라, 여러 가지로 신기하네.”
“에일린 님이 그쪽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엘프들의 마을은 어떤 느낌인가요?”
“직접 말하기는 그렇네요. 가능하면 함구해달라고 했거든요.”
“그래? 음, 어쩔 수 없네.”
엘프가 아니라 마족과 지냈습니다,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나중에 진실을 밝힐 기회가 있겠지. 최소한 마족과 화친을 맺은 이후라면, 그러네. 그 시기라면 이야기해도 괜찮을 거로 생각한다.
“대신 엘프들에게 들은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나 말해보겠습니다.”
“이야기? 그런 건 아가씨나 좋아할 것 같은데.”
“너무 애 취급하는 거 아닌가요. 옛날이야기를 듣고 좋아할 나이는 지났다고요.”
“요리랑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럼 들어보고 싶다만.”
“숲 너머에 있다는 죽음의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엘프와 마족들은 그 땅을 이렇게 부르더군요. 세상의 끝. 검은 안개가 가득한…….”
그렇게 사용인들의 밤은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