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아가씨와 검(1)
아리시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머리를 만지는 노아의 손길도 싫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알베르트는 물었다.
“식사 시간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몰라.”
완전히 토라진 목소리였다.
알베르트는 노아를 보았다. 아침 식사 시간에 같이 있던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터이다. 노아는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것 같다.
그러나 알베르트의 생각은 달랐다.
“주인님께서 잔소리라도 하신 모양이군요.”
“누가 잔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난 혼날 이유가 없는걸.”
“그렇군요. 아가씨는 어엿한 루드비히 가의 레이디니까요.”
“흥.”
“그럼 뭔가 원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 모양입니다. 아가씨가 싫어할 만한 이야기라. 피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기분이 많이 상하시지 않았을 텐데. 그렇군요. 오늘 주인님이 꺼낸 이야기는 혼약 건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
휙, 하고 아리시엘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노아가 만지고 있던 머리 모양이 무너졌다.
“어떻게 알았어?”
“집사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우스꽝스럽게 내려앉은 머리와는 다르다. 그녀의 벽안이 반짝였다.
“나도 배우고 싶어.”
“아가씨가 배우실만한 기술은 아닙니다. 이런 건 소인들이나 익히는 잔재주입니다.”
“잔재주. 음……. 그래도 쓸만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좋아. 약속한 거야.”
그 대화로 조금 기분이 풀린 걸까. 머리를 노아에게 맡긴 아가씨는 입을 열었다.
“알베르트의 말대로야. 있지. 아버님이 혼약자 이야기를 꺼냈어.”
“벌써 그런 시기가 된 모양이군요.”
아가씨의 나이도 벌써 12살이다.
가문끼리 혼약 이야기가 오가는 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유력 후보로 떠오르는 가문은 몇 개 있다.
먼저 북부의 변방백이라고 불리는 첸드리 가문.
제국 내에서는 무로 손꼽히는 루드비히 가와 잘 어울리는 가문이다. 야만족들을 상대하며 갈고 닦은 그들의 검은 항상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자의 용기를 가졌다는 라이언하트 가문도 나쁘지 않다.
북부에서 수많은 무훈을 세운 가문으로. 그 명성은 루드비히 공작령까지 울리고 있었다. 특히나 승마술에서는 견줄 자가 없다는 가문으로, 라이언하트의 사자기병대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가씨의 어머니인 아나스타샤 공작부인이 라시엘 공작과 연결된 거리라.
리그문트 가문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루드비히 가문이 정계로 나가기 편할지도 모른다. 처세술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언담을 갖춘 가문이다. 향후의 일을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앞에 나온 가문은 전부 오답이다.
“성 미뉴에트 가의 도련님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정계에 적당한 입김을 가할 힘이 있고, 가진 영지는 적지만 휘하 사병은 강인하다.
전통이 있는 만큼 북부의 정통성을 갖고 있고, 고강한 신성력을 지닌 핏줄은 루미에르 교단과도 깊은 연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주인님의 마음에 들 가문이다.
“알베르트는 혹시 천재야?”
“진짜 천재는 아가씨입니다. 저 같은 평범한 소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죠.”
“평범해? 알베르트가?”
아리시엘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 미뉴에트 가문이라고 하면 베르나토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하셨죠. 직계 가문의 공자님들이라고 한다면……. 차남이나 삼남분이 거론됐겠군요.”
“응, 아버님은 트리스탄이라고. 삼남이 어떻겠냐고 물어봤어. 성격도 괜찮고, 싹수가 보이는 남자니까 한 번 생각해보라고.”
“차남분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자하단 성 미뉴에트? 말은 나왔지만, 지병을 앓고 있어서 그쪽은 고려하지 말라던데.”
“그렇습니까? 혹시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들으셨습니까?”
“그건 모르겠어. 무슨 희소병이라고 했던 것 같아. 신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댔어.”
자하단 성 미뉴에트.
이전 시대에는 아가씨와 결혼했던 남자다. 두 도련님이 루드비히 저택을 방문했을 때는, 아직 몸 상태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병이 악화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다.
신성력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병.
인지가 점점 떨어지던 그 병은, 유피가 말했던 백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알베르트는 용의 무덤에서 챙겨온 사룡초를 떠올렸다. 고룡의 시체에서 꺾어온 약초가 자하단 도련님을 치료할 약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셨군요.”
“응,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혼약이라니. 싫은걸.”
화려해진 머리와 다르게 아가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울적해진 그녀를 보며 알베르트는 말을 이었다.
“기운이 없는 아가씨를 위해서,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나 해드려야겠군요.”
“됐어. 지금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제가 숲에서 겪은 이야기인데. 필요 없나요?”
“숲에서?”
흥미가 인다는 듯 아가씨의 목소리가 변했다.
“들을래. 들을래. 무슨 이야기야? 엘프지. 엘프에 관한 이야기지!?”
“그렇습니다. 엘프의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죠.”
숲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가씨나 노아가 물어봐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던 알베르트다. 기대에 찬 두 사람을 보며 알베르트는 말을 이었다.
“제가 신세를 졌던 엘프 마을에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강한 스켈레톤이 있었습니다.”
“스켈레톤? 엘프 마을에 언데드라니. 그게 뭐야.”
“그렇죠. 저도 정말로 놀랐답니다. 생전에는 원로급의 인물이라는데, 일족이 너무 걱정된 나머지 언데드가 되어서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엘프 중에 네크로맨서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는걸.”
알베르트가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리시엘은 웃었다.
“그런데 절대라는 건 없더군요.”
“…….”
쓴웃음을 머금은 집사의 대답에 아가씨는 군침을 삼켰다.
“진짜야?”
“진짜입니다.”
“엘프와 언데드라니……. 뭐야, 그게. 혹시 지금 공작령에서 나타났다는 네크로맨서가…….”
“그렇군요. 엘프 출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
아리시엘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든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렸다는 듯 그녀는 손길을 멈춘 노아를 보았다.
“들었지, 노아? 범인은 엘프였어!”
“그러게 말이에요, 아가씨. 그럼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요?”
머리단장이 끝난 아가씨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야 에일린에게 물어봐야지! 가자, 알베르트!”
“알겠습니다, 아가씨.”
뒤에서 소리 죽여 웃고 있는 노아를 눈치채지 못한 아리시엘은 문으로 뛰어갔다.
*&*
에일린은 신목 아래에 있다는 모양이다. 아리시엘과 알베르트는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날씨가 맑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서 이는 바람은 상쾌했다. 후원을 손질하던 사용인들이 아가씨를 보고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인사를 적당히 받아가며 아가씨는 걸음을 옮겼다.
“알베르트.”
“네, 아가씨.”
“에일린이 그랬는데. 알베르트가 엄청나게 강하다던데. 사실이야?”
“그럼요. 전 무척이나 강하답니다.”
알베르트의 대답에 아리시엘은 물었다.
“진짜? 무척이나 강하다……. 있지, 그럼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인 로엔 경보다 강해?”
“당연하죠.”
“…….”
아가씨의 걸음이 멈췄다.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의 눈에는 불쾌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알베르트는.”
“들켰군요. 아가씨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하겠네요.”
“당연하지. 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낼 수 있다고.”
에헴, 하고 아리시엘은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알베르트는 제법 몸을 쓸 줄 아는 것 같아. 에일린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응, 그래. 내 집사가 얼마나 뛰어난지 아는 것도 아가씨의 소양이야. 한 번 시험 좀 보여줄 수 있겠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뭘 보여드리면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멀리 보이는 신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목. 그래, 신목 위까지 올라 갔다 와 봐.”
“아가씨.”
알베르트는 드물게도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아무리 아가씨의 명령이라도, 가문을 상징하는 신목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아, 알고 있어. 나도. 알베르트가 혹시 모르는가 싶어서 말한 것뿐이야.”
“그렇군요. 역시 아가씨입니다.”
아가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져 있었다.
“그래. 그럼 검술을 한 번 보여줘. 정말로 강하다면 검 정도는 가볍게 다룰 거 아냐.”
“검술이요?”
“응, 난 루드비히 가의 아리시엘이니까. 검을 보는 눈은 제법 있다고 자부해.”
“알겠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알베르트는 허리춤에 있던 롱소드를 뽑았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검이다. 어느 무기점을 찾아가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평범한 검이다.
[이상하군요. 마법이라면 몰라도 아리시엘 루드비히는 몸을 쓰는 일은 영 아니었을 텐데요.]
가볍게 휘두른다.
노리는 것은 날아다니고 있던 날벌레다. 깔끔한 일격. 검격 아래에서 찢긴 날벌레의 사체가 바람 속에 흩뿌려졌다. 검을 수납한 알베르트는 아가씨를 보았다.
아리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는 눈치다.
“안 해?”
“방금 했습니다.”
“또 거짓말한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리시엘은 양 볼을 부풀렸다.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야?”
“음…….”
이건 알베르트가 잘못했다.
좀 더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편이 좋았다. 알베르트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웠다.
“이 나뭇가지를 잘라보죠.”
“그건 나도 할 수 있어.”
알베르트는 나뭇가지를 던졌다.
아리시엘은 뚱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중에 떴던 나뭇가지가 알베르트의 손으로 떨어졌다. 검을 뽑지도, 휘두르지도 않았다. 알베르트는 아가씨를 향해 나뭇가지를 건넸다. 항의 어린 아리시엘의 시선에 알베르트는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나뭇가지는 멀쩡해 보인다. 아리시엘이 나뭇가지를 쥐려던 순간, 나뭇가지가 얇게 흩어졌다.
하나가 아니다.
고기를 얇게 썰어낸 것처럼, 다섯 층으로 나뉜 나뭇가지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리시엘은 멍하니 알베르트를 보았다.
“마법이야?”
“검술입니다.”
태연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아리시엘은 두 눈을 깜박였다.
나뭇가지와 허리춤의 롱 소드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알베르트에게 물었다.
“저기, 알베르트.”
“말씀하시죠, 아가씨.”
“나한테 검을 가르쳐 줄 수 있겠어?”
“네?”
*&*
알베르트는 정원 바닥에 쓰러진 아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
아리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자아낼 여력도 없는 것 같다. 제자리에 쓰러진 아가씨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리 알베르트라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가씨의 나이가 어리고 기초 체력이 없다고는 하지만, 신목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거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알베르트는 정말 못됐어.”
정신을 차린 아가씨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이렇게 과격한 운동을 바로 시키는 사람이 어딨어.”
“과격?”
후원을 한 바퀴 도는 가벼운 운동이 과격한 운동이라고 불릴 만한 것인지.
알베르트는 한참을 고민했다. 참고로 루드비히 가의 사용인이라면, 아침마다 후원을 세 바퀴씩 뛰는 게 기본 일과였다. 무가의 사용인이라면, 체력은 물론이고 몸을 쓰는 일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 가훈이었다.
그 결과, 가문의 사용인들은 모두 일반 병사와도 비슷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기사에 비할 바는 못 돼도.
“난 검을 가르쳐달라고 했지. 달리기를 배운다고 한 적 없어.”
“검을 다루려면 체력이 기본입니다, 아가씨.”
뿌우, 하고 아리시엘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알베르트도 날 무시하는 거야?”
“아가씨를 무시하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주, 죽을 필요까지는 없어.”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건만, 그녀의 두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굳이 저에게 검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아가씨가 바라신다면, 주인님이 좋은 선생님을 붙여주실 겁니다. 가령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인 로엔 경 같은 분 말입니다.”
“그거로는 안 돼. 다들 뒤에서 쑥덕거린단 말이야.”
무언가를 참듯이 볼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뒤에서 나온다는 말. 아가씨가 무엇으로 고민하는지 알아차린 알베르트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가씨는 아가씨입니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저 같은 소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재입니다.”
“나는 천재 같은 게 아닌걸.”
“아니요. 아가씨는 천재입니다.”
알베르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짜 천재다.
하늘은 두 가지 재능을 내려주지 않는다. 무가에서 태어났지만, 마법에 조예가 깊었던 아가씨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마나의 힘을 두 손으로 다루고,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에 닿았다. 그 끝에 천칭이라는 성좌를 관측하고 제국의 수호자로 성장했던 아가씨다.
알베르트의 자랑이자 긍지, 그 자체였다.
진심이 담긴 집사의 말에 아리시엘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런가?”
“그렇습니다.”
“난 천재야?”
“아가씨는 천재입니다.”
아리시엘은 배시시 웃었다.
“알았어! 그럼 한 번 더 해보자!”
“좋은 자세입니다, 아가씨.”
떨리던 다리가 멈췄다. 기운을 되찾은 아리시엘은 신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제 신목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아직 어린 그녀의 다리라도 5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알베르트는 기운차게 뛰는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잠시 후.
아가씨는 정원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가씨?”
“…….”
아직 아리시엘이 갈 길은 먼 모양이다.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가씨를 보며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