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수상한 동태(3) (13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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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동태(3)

무덤은 점차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알베르트도 와본 적이 없는 장소다.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비밀통로를 타고 마법진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안과 제이크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언데드를 무찌르면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루미에르 교의 성기사를 보는 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금지된 숲과 가까운 공작령은 교단에게 있어 일종의 불가침 지역에 가깝네.’

[마족이 옆에 있는데 말입니까?]

‘마족이 옆에 있기 때문이라네. 루미에르 교단은 이전의 루미에르 교단이 아니니까.’

아이러니한 일이다.

루미에르 교의 힘은 기본적으로 마족이 있기에 나타난다.

마족의 영향력이 옅어지면, 자연히 교단의 힘도 약해진다. 정계의 중심에서 권력을 누리는 루미에르 교단은 자신들의 힘이 약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성수를 비롯한 외적인 지원은 아끼지 않지만, 요원 지원은 보기 힘들다.

마족을 적대시하지만, 마족과 교전이 없는 현시점에서는 루미에르 교단의 신관들이 변방의 공작령까지 내려오는 일이 드물었다.

다른 도시에는 당연하게 있는 루미에르 교단의 신전이 공작령에 없는 건 그런 까닭이다.

‘주인님은 루미에르 교단이 공작령에 간섭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아마 그 본질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권력욕에 물든 사제는 마족보다 무서운 존재라네.’

[그렇군요. 저택의 참사는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신성력을 다루는 신관들이나 신전기사단이 공작령에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네. 도둑 길드의 정보가 맞다면 무언가 변화가 시작된 것 같으니. 이렇게 교단의 성기사가 내려온 것도 희소식일지도 모르네. 가령, 우리 가문이 루미에르 교와 협력해서 정계로 나갈 발판을 만들지도 모르지. 교단의 얼룩진 부분과 얼마나 타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군요.]

‘가능성. 그러네. 확실한 건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네.’

희망적인 관측이다.

이미 루미에르 교는 골수까지 썩어 있었다. 부패한 살점은 다른 몸으로 옮겨붙었고, 이는 생살을 잘라내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결국, 프랑소와 성녀의 개혁이 끝나갈 무렵에는 교단의 힘이 절반 가까이 줄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루미에르 교는 마족과의 전쟁에 임했다.

만약 개혁의 시기를 좀 더 빨리 당길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바뀌리라.

알베르트는 걸음을 멈췄다.

어두운 통로 너머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안과 제이크도 기척을 느끼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스켈레톤 나이트와 오크 좀비다.

긴장이 풀린 걸까.

코웃음 치는 제이크와 달리 이안은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회색빛으로 빛나는 갑주.

날카롭게 빛나는 검. 텅 빈 눈 안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것 같다.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확인한 이안은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그 손에 잡힌 것은 검이 아니다. 은빛으로 빛나는 메이스(Mace)다.

“물러나게.”

성스러운 빛이 이안의 몸과 메이스를 감싸 안는다.

성수를 뿌린 것처럼 메이스가 신성한 기운을 내뿜었다.

[블레싱(Blessing). 홀리 웨폰(Holy Weapon). 둘 다 성기사가 다루는 신성 마법이군요. 하지만 검이 아니라 메이스라니. 아직 정식 성기사는 아닌 모양입니다.]

‘견습 성기사네. 아직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 같군.’

견습 신분이라면 아직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는 것은 힘들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도와줘야 할지도 모른다. 알베르트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품 안의 가면을 꺼냈다. 그 사이 이안은 데스 나이트와 교전을 시작했다.

첫수를 가져온 것은 데스 나이트였다.

검과 메이스가 교차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데스 나이트의 검은 메이스를 파고들지 못한다. 역으로 성스러운 기운이 검을 갉아먹는다. 서로의 무기가 겹쳐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의 힘을 견디지 못한 이안이 메이스를 뒤로 뺐다.

따라오는 놈의 움직임에 맞춰 이안은 뒤로 물렀다. 제이크는 그 곁에 있지 않았다. 성수를 머금은 그레이트 엑스가 휘둘러진다. 데스 나이트가 부리는 다른 하급 언데드를 상대하고 있다.

주변의 도움은 바랄 수 없다.

이안에게서 두려워하는 기색은 느낄 수 없다. 데스 나이트의 눈이 아닌 검을 응시한다. 휘둘러지는 검에 맞춰 메이스가 움직였다. 검을 쳐내고, 속을 찌른다. 큰 타격은 없다. 신성력에 그을린 갑주에는 붉은 흠집이 남았을 뿐이다.

이안의 공격에 현란함은 없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기본 훈련과 같다. 날아드는 검을 튕겨내고 찌른다.

히트 앤 가드(Hit and Guard).

성기사들이 다루는 검술의 기본이다. 정형화된 반격에 시달리던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이 커졌다. 막는 걸 반복한다면, 막을 수 없는 일격을 가한다. 일순간 검이 붉은빛으로 물든다. 굳건하게 공격을 막아내던 이안은 몸을 뒤로 물렀다.

두르고 있던 로브가 검 끝에 걸렸다. 로브를 털어낸다. 누더기 같은 외투 아래에서 가죽 갑옷과 은빛 검이 드러났다.

데스 나이트는 멈추지 않는다. 연격이 들어온다. 메이스가 따라가지 못한다. 신체 능력이 밀린다. 신성력의 가호를 받은 몸으로도 무리다.

이안의 손이 바빠진다.

들어오는 검을 막아낼 수 없다. 판단을 마친 이안은 메이스에 힘을 실었다. 메이스가 신성력으로 빛난다. 교차는 한순간이다. 데스 나이트의 몸이 무너진다. 녀석이 균형을 다잡기 전에 이안은 메이스를 버렸다.

로사리오가 흔들렸다.

신성력으로 빛나는 검이 데스 나이트의 갑주를 꿰뚫었다. 긴 상흔이 남는다. 이안의 검에 베인 데스 나이트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과연 성기사군요.”

숨을 고르는 이안을 보며 제이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데스 나이트라면, 일급 모험가들이 아니고서는 무조건 피하라는 말이 나오는 언데드다. 데스 나이트가 갖는 본연의 강함도 문제지만, 이 개체는 혼자서 다니는 일이 없었다.

지금이야 던전, 그것도 좁은 지역에서 싸웠기에 망정이지.

사방이 트인 곳에서 싸웠다면 영락없이 도망쳤어야 했을 것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데스 나이트가 있었나?”

숨을 고른 이안이 제이크에게 물었다.

“처음입니다. 이런 게 나온다면 버티기 힘듭니다. 성수를 있는 대로 부어야 간신히 승산이 보일 텐데. 그런 짓을 하는 모험가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렇다면 죽는 쪽이 낫다는 이야기인가?”

“그게 아닙니다. 성수를 사용하는 것도 모두 돈입니다. 데스 나이트 같은 괴물딱지와 싸우면서 상처 하나 없이 이기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걸 치료하는 데 들어가는 성수.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성수.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합니까? 정신이 제대로 박힌 모험가라면 열이면 열 도망칠 겁니다.”

데스 나이트가 마석이라도 줬으면 모를까.

지금 이안이 쓰러뜨린 데스 나이트도 전리품이라고 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데드의 사체는 돈이 되지 않는다. 간혹 마도에 미친 마법사들이 이런 골격을 취급하는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것도 시체가 신성력에 노출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처럼 신성력에 활활 타버린 언데드의 시체는 값어치가 형성되지 않았다.

결국, 받을 수 있는 건 루드비히 가에서 걸어놓은 현상금뿐이다. 하급 언데드는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금액 정도밖에 주지 않지만. 데스 나이트 정도라면 꽤 돈이 될지도 모른다.

“믿을 수가 없군. 루미에르 교의 신도들이 사악한 언데드를 놔두고 도망친다는 말인가.”

“루미에르 교가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고귀한 성기사님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요.”

제이크의 대꾸에 이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말싸움할 생각은 없다. 스켈레톤 나이트와 오크 좀비들 사이에서 마석을 챙긴 그는 말을 이었다.

“여기가 던전 최심부입니다. 네크로맨서는 안 보이는 것 같군요.”

“데스 나이트라면 하위 언데드를 부릴 수 있다. 던전에서 발생한 언데드는 이 녀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럼 이만 돌아가실 겁니까?”

“며칠 동안은 상황을 지켜보지. 만약 언데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해결됐다고 본다.”

“알겠습니다. 그때는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죠.”

“대금은 복귀한 뒤에 주지.”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내에게 혼나지 않겠네요.”

두 사람이 떠나자, 알베르트는 모습을 드러냈다.

[메이스를 썼던 것은 비장의 한 수를 위해서였던 모양입니다.]

‘꽤 쓸만한 움직임이었네.’

그는 쓰러진 데스 나이트에게 다가갔다.

상태를 확인한다. 붉은 안광은 보이지 않는다. 신성력에 타버린 녀석은 숨이 끊겨 있었다.

‘천칭.’

[링크가 남아 있군요. 멀지 않습니다, 마스터. 이놈을 조종하던 녀석은 벽 너머에 있는 것 같습니다.]

‘네크로맨서가 무덤 안쪽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 모양입니다.]

어두운 통로는 더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벽에는 덕지덕지 붙은 부적만이 가득했다. 숨을 죽인 알베르트는 주변을 확인했다. 안쪽까지 내려온 모험가는 보이지 않는다. 벽 쪽으로 손을 옮긴 알베르트는 내공을 운용했다.

알베르트의 내공에 반응한 부적이 하나하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적이 떨어지자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장소가 통로를 드러냈다.

통로에 들어설 필요는 없었다.

이상이 생긴 걸 확인했는지, 안쪽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네크로맨서가 아니다. 비좁은 통로에서 나온 것은 검은빛에 휩싸인 데스 나이트였다.

이안이 상대하던 녀석과는 기운이 다르다.

불온한 기운에 휩싸인 녀석은 놈보다 두 배는 더 큰 덩치를 갖고 있었다.

[어비스 나이트. 그렇군요. 놈이 이 언데드들의 주인이었던 모양입니다.]

데스 나이트의 상위 개체.

주변을 지키는 다른 언데드는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검에 성수를 뿌렸다. 어비스 나이트는 알베르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검은빛의 창이 쏘아진다. 섬광과 같은 찌르기. 그러나 그 끝에 닿는 감각은 없다.

어비스 나이트의 창은 빈 공간을 찔렀다. 잘못 찌른 게 아니다.

창이 나아가는 순간, 알베르트는 창 앞으로 다가왔다.

나아가는 경로를 파악하고, 그 옆으로 빠진다.

창대를 밟고 체중을 실은 그는 창끝을 지면으로 눌렀다. 무너지는 어비스 나이트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검붉은 강기가 단숨에 놈의 목을 베어냈다.

머리가 주인을 잃고 떨어진다. 그래도 놈의 움직임은 멎지 않는다. 머리 없는 목으로 창을 든 녀석은 알베르트를 향해 내려찍었다. 바람은 많은 걸 말해준다. 이미 움직임을 읽은 알베르트에게 그 공격은 걷는 것만큼이나 피하기 쉬웠다. 몸을 옆으로 튼 알베르트의 손이 움직였다.

창을 든 손목.

갑주가 보호할 수 없는 발목.

강기로 뒤덮인 검은 사지를 깔끔하게 토막 냈다. 신체를 잃은 어비스 나이트의 몸이 지면에 떨어졌다. 그 갑주 위로 알베르트는 검을 찔렀다. 성수와 맞닿은 녀석은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이내 그 움직임이 멎었다.

[깔끔합니다, 마스터. 만약 제게 손이 있었다면 갈채를 보냈을 겁니다.]

‘확실히 이 검은 초대 가주님의 검술과 어울리네. 사부님의 검술을 펼치기에는 어색하구먼.’

알베르트는 어비스 나이트의 주검에서 검은 마석을 주웠다.

짙은 마나가 느껴진다. 어느 정도 값어치가 나갈 것 같다. 오늘 일을 도와준 에일린에게 선물하자. 어비스 나이트가 나온 통로는 막혀있었다. 통로 끝에는 기분 나쁘게 생긴 인형이 있었다. 짚을 기워 만든 인형에는 불길한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마석의 일종이군요. 언데드를 불러내는 마법이 걸려있습니다.]

‘무덤에서 언데드가 나타났던 건 이것 때문이었나. 그럼 이걸 설치한 범인은 따로 있겠군.’

[부수는 걸 추천합니다, 마스터. 네크로맨서가 다시 설치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마스터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몇 가지 안 되는군요.]

‘알겠네.’

권기를 두른 알베르트의 손날이 인형을 갈랐다.

순간 그 눈에 붉은빛이 깃든 것처럼 보였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검을 뽑았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짚 인형에서 튀어나온 암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암기는 날카로운 침이었다.

성격이 고약하다. 누가 설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석을 제거하고 방심한 틈을 노린 장치다.

‘그런데 말이지, 천칭. 이곳에 있던 마법진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일을 일단락 짓고 밖으로 향하던 그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십만대산으로 통하던 마법진에 관한 이야기다. 시더 황자와 유피. 그리고 라피엘과 함께 이용했던 통로. 당시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여서 이곳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지 못했다.

[중원으로 연결되던 통로 말씀이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유피에르가 닫았던 거로 압니다.]

‘혹시 그 입구가 열릴 가능성은 없는 건가?’

[그 입구가 말입니까, 흠…….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쪽에서 누군가가 열어주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애초에 유피에르 정도 되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열 수도 없을 테고. 만약 열렸다고 해도 언데드와는 별 관련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곳에 있던 것은 망자들과 강시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통로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던 알베르트는 벽면을 확인했다. 유피와 함께 왔을 때 반응했던 비밀통로는 알베르트가 힘을 줘도 밀리지 않았다. 어비스 나이트가 있던 통로처럼 혹 내공을 넣으면 움직이지 않을까.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무덤의 초입 부분에 있는 벽면 주변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이곳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적어도 모험가들의 발일이 끊기는 순간을 노려야 했다.

오늘 들어가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본 뒤 다음에 확인하러 오자.

알베르트는 모험가들이 내려오는 천마의 무덤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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