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오늘의 루드비히 저택(2) (136/200)

호 # 136

오늘의 루드비히 저택(2)

한가로운 오후. 아리시엘의 방에서 에일린은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동안 배운 것을 확인하는 시험 시간이다. 문제를 푸는 아리시엘의 이마에는 귀여운 주름이 잡혀 있었다.

「사교회에서 레이디가 범해서는 안 될 실수로 올바른 것은?」

오지선다형 문제다.

보기를 살펴보는 소녀는 세기의 난제와 마주한 듯 연신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시험지를 아무리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답을 내지 못한 아리시엘은 펜 끝을 신경질적으로 두들겼다.

“에일린은 어떻게 생각해?”

“저한테 정답을 물어보면 안 되죠, 아가씨.”

에일린의 대답에 아리시엘은 양 볼을 부풀렸다. 그녀는 풀고 있던 시험지를 한쪽으로 치웠다.

“알베르트 라나 말이야. 에일린의 일족들이 돌봐줬다면서. 무언가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상한 점 말인가요? 음……. 글쎄요.”

“난 영 이상해. 저택 사람들이 반겨주는 것도 수상하고. 무엇보다 인상이 무섭잖아.”

“아가씨, 얼굴로 차별하면 못써요.”

아가씨의 취향을 알고 있는 에일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일까. 철이 들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참. 거리에 용한 점쟁이가 찾아왔다는 소문이 있어.”

“늪지의 점쟁이 말이군요.”

“에일린도 알고 있어?”

아리시엘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늪지의 점쟁이. 클레멘트 도시에서 활동하는 용한 집시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떠돌이 점쟁이라고 하는데, 그 실력은 보통이 아니라는 모양이다. 저택에서 거의 나가지 않는 에일린의 귀에도 종종 들려올 정도니 말이다.

“저도 직접 만나본 건 아니에요. 다만, 사용인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는 꽤 많이 들었거든요. 얼마나 신통한지 돈 문제는 물론이고, 연애 문제도 귀신같이 맞춘다고 하더군요.”

“그치? 그치? 기회가 되면 만나보고 싶은데. 초대하면 찾아와주려나?”

“아가씨의 초대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좋아. 오늘은 뭘 물어볼지 고민해봐야겠다.”

“네. 일단 시험을 끝내고 같이 고민해봐요.”

아가씨는 다시 펜을 들었다.

문제를 확인한다. 조금 전 풀지 못했던 문제를 넘긴 그녀는 쉬운 문제를 찾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답을 적던 아리시엘은 앗, 하고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 이게 아니지. 알베르트! 그 남자 이야기는 안 할 거야?”

“오늘은 눈치가 빠르네요.”

분위기를 봐서 자연스럽게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눈치가 빠르다.

“너무해.”

완전히 삐져버린 아가씨는 볼을 부풀렸다.

삐죽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본 에일린은 자업자득인가요, 하고 중얼거렸다.

“좋아요. 그럼 알베르트의 정체를 확인하러 가볼까요?”

“정체를?”

“네. 마침 오늘은 저와 공부하는 시간이니까요. 전속 집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죠.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것도 좋은 공부니까요.”

“알았어. 바로 준비할게!”

시험지를 뒤덮은 아리시엘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따분한 수업 시간에서 벗어난 그녀의 얼굴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

알베르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에 띄는 그 집사는 아리시엘의 유모인 노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다른 사용인들이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보였다. 언제나 아리시엘을 돌봐주던 노아는 유모치고는 어린 편에 속했다. 이제 나이가 삼십 줄에 가까워진 그녀는 알베르트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봐, 에일린. 알베르트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어.”

“그냥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네요.”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 손을 든 노아는, 겁도 없이 알베르트의 볼을 잡았다.

쭉 늘어나는 볼을 본 아리시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려야 되지 않을까.

에일린을 조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정교사는 잘 보라는 듯, 두 사람을 가리켰다.

알베르트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소탈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본 노아는 한숨을 쉬었다.

에일린의 손길에 따라 실프가 움직였다.

바람의 정령이 손짓하자 두 사람의 귀에 알베르트와 노아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알의 접근법이 잘못된 거라니까.”

“제 접근법이 말입니까?”

“그래. 아가씨는 한참 민감한 시기란 말이야. 너 같이 무서운 인상을 한 남자가 갑자기 다가오면 어떻겠어. 당연히 무서워하지.”

“무서워……. 그렇군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아직 저와 아가씨는 얼굴을 튼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그래. 항상 곁에서 지켜봐 왔던 나면 모를까. 갑자기 다가가면 무서워하기 마련이잖아. 다른 건 잘하면서 이상하게 아가씨를 대하는 건 서투르네. 거리감을 잘 못 잡는 느낌이야. 그래도 뭔가 안심했어. 너도 못 하는 게 있구나.”

“저도 사람입니다, 누님.”

어쩐지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꼬리를 내린 알베르트를 보며 노아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몸이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는 거야? 안 좋으면 사양하지 말고 바로 말해. 돌아오자마자 노동 삼매경이잖아.”

“역시 누님이군요. 사실 비밀입니다만, 가끔 마기 때문에 몸이 쑤실 때가 있습니다.”

“진짜야? 마기 때문에? 큰일이네. 우리 공작령에는 신전이 없잖아. 일반 성수로 치료할 수 있을까? 아니, 시녀장님에게 말해서 성녀님의 힘이 담긴 성수라도 구해볼까?”

“저기……. 미안합니다, 누님. 거짓말입니다.”

“…….”

“아픕니다. 아파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뱉은 알베르트의 농담에 노아는 손에 힘을 실었다.

알베르트의 볼이 늘어났다. 그 살이 붉게 물들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엘프랑 같이 지냈다는 거, 거짓말이지?”

“에일린에게 물어보면 확실하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내 눈은 못 속여. 어쩐지 수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방 안에 이상한 검을 두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거 마족이 다루는 검이잖아. 두꺼운 갑옷 하나도 못 뚫는 얇은 도검.”

“엘프들이 줬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몸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기사도 아니고 무슨 검을 쓴다는 거야.”

“엘프에게 이것저것 배워서 그래도 조금 다룰 줄 압니다.”

“활도 아니고 검을 배워오다니. 대단하네, 그거.”

“가끔 저도 놀랄 정도죠.”

노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입가에 맺힌 웃음은 분명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어 보였다.

“못 본 사이 더 뻔뻔해졌구나, 너.”

“누님은 더 예뻐졌습니다.”

“그런 말이나 술술 내뱉고. 진짜…….”

“슬슬 신랑 후보를 물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중매를 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네가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래. 혹 잘생긴 엘프 남성분이라면 생각해볼 수도 있지.”

“힘들겠군요. 나이를 생각한다면 엘프와 누님이 연결되기에는 조금…….”

“…….”

“볼 좀 그만 당기시면 안 될까요, 누님? 아무리 저라도 아픕니다.”

아리시엘은 지그시 노아를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한 표정이다. 항상 곁에 있던 그녀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두 사람은 저택에 함께 들어온 동기라고 들었어요.”

“알베르트랑 노아가?”

“네. 필립에게 들었어요. 남매나 다름없던 사이였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알베르트가 사라지고 난 뒤 노아가 많이 힘들어했다더군요. 사이가 좋았던 만큼, 그 자리가 비게 되면 많은 걸 느끼는 법이니까요.”

“난 처음 듣는 이야기야.”

“이제라도 아셨으면 된 거죠.”

노아는 알베르트의 연미복으로 손을 뻗었다.

삐뚤어진 리본을 다잡은 그녀는 아리시엘에게 하듯이 잔소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뭔가 서운했다. 알베르트와 그런 사이였으면 귀띔이라도 해줄 수 있던 게 아닐까.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아가씨를 보며 에일린이 말을 이었다.

“어떠신가요, 아가씨. 이래도 알베르트가 무서우신가요?”

“아직은 모르는 거야.”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알아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아리시엘은 벽 모퉁이에 바싹 붙었다.

그런 아리시엘을 보는 시녀들의 표정은 오묘했다.

아가씨의 기묘한 행각을 보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정도가 지나치다.

“아가씨. 화장실은 우측 복도 끝이니까 참지 말고 빨리 가보세요.”

“마린. 아가씨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어디 불펴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가씨?”

“쉬, 쉿! 둘 다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걸 하고 있으니까 빨리 떨어져!”

쌍둥이 시녀, 마린과 루인의 인사를 받은 아리시엘은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두 시녀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면서 쑥덕거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1시간도 안 돼서 아가씨의 행보가 저택 곳곳에 알려질 것 같다.

이 이야기가 그녀의 아버지인 라시엘 공작의 귀에 들어간다면 별로 좋은 말은 안 나오겠지.

여기서 그만두는 편이 좋다. 하지만…….

“가자, 에일린!”

“알겠습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좋나. 한껏 들뜬 아리시엘의 모습에 에일린은 입을 다물었다.

보지 못한 알베르트의 면모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귀여운 공녀의 뒤를 따라 에일린은 저택 밖으로 향했다.

*&*

알베르트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정원이었다.

평소 아리시엘이 좋아하는 후원으로 향하는 게 아니다. 정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고목같이 거대한 체구를 가진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저택의 정원사인 필립이다. 그는 딱딱한 인상의 남자였다. 살짝 휜 매부리코와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는, 정원사라기보다는 산적과 같이 느껴졌다.

알베르트를 본 필립의 입가에 비릿한 표정이 떠올렸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것 같은 필립의 눈빛은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조성했다. 겁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면, 필립의 의도는 성공했다. 몰래 두 사람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아리시엘이 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필립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몸집만 큰 바보.”

“…….”

“그래도 착한 바보야.”

아리시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위에 선 자라면 당연히 부리는 사람을 일거수일투족을 하고 있어야 한다.

아리시엘은 필립의 일족이 오래전부터 이 공작령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원의 거인 필립.

시녀들 사이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입방아에 오르는 단골손님이다. 무서운 용모 때문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언급되는 남자였는데, 아리시엘도 이런저런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정원 안쪽에서 몰래 사람을 묻고 있다든가. 길 잃은 동물들을 가지고 수상한 실험을 하고 있다든가. 물론 그 이야기가 전부 헛소문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럴 것이, 필립은 아리시엘이 찾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늘 예쁜 꽃을 준비해놓았기 때문이다.

호수가 잘 보이는 후원에 테이블을 준비해준 것도 그의 작품이다.

무서운 용모와는 달리 알맹이는 순박하기 짝이 없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아리시엘과 필립은 파장이 잘 통했다.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의외네요. 아가씨는 얼굴만 보니까 싫어할 줄 알았어요.”

“누가 얼굴만 본다는 거야. 난 그런 여자가 아닌걸.”

“그래요? 만약 알베르트가 로엔 경처럼 생겼다면 이렇게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로엔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건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다 알고 있다는 에일린의 미소에 아리시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쫓았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정원 안쪽으로 향했다.

필립과 알베르트가 향한 곳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꽃과 묘목들이 가득한 장소였다.

정원사의 손길이 닿은 묘목은 잔가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리시엘의 곁에 있던 에일린이 감탄사를 냈다. 실프와 운디네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다. 생기가 넘쳐나는 이곳은 정령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였다.

알베르트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필립의 뒤를 따라 묘목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잔가지를 다듬기 시작했다.

“……?”

필립도 마찬가지다. 꽃을 옮기고 묘목을 다듬는다.

단순한 반복 작업이다.

꽃을 가꾸고 묘목을 손본다.

꽃잎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고, 묘목에 달라붙은 기생충을 죽이거나 잡는다.

꽃에 물을 주고 흙을 새로 바꾼다. 덜 자란 묘목과 이제 옮겨도 되는 묘목을 분류한다.

그리고 정원으로 가져다 놓아도 좋을 것 같은 묘목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특별한 일은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모습을 5여 분간 지켜보고 있던 아리시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재미없어.”

“벌써 질리셨나요? 그럼 시간도 남았겠다. 시험이나 마무리 지으러 가죠.”

“좀 더 봐도 괜찮을 것 같아.”

“질리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아리시엘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두 사람은 묘목을 가다듬는 일을 멈췄다.

걸음을 옮긴다. 이번에 향한 곳은 신목의 뒤편에 있는 호수였다. 기생충이 담긴 상자를 연다. 필립과 알베르트는 호수에 벌레를 뿌렸다. 잉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민물고기들이 뻐끔뻐끔 입을 벌린다. 먹이를 챙겨준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았다.

필립과 굳건히 악수를 한 알베르트는 저택 쪽으로 발을 돌렸다.

“저기, 둘이 무슨 이야기라도 한 거야?”

“아무 이야기도 안 했어요.”

“그런데 저렇게 죽이 잘 맞을 수 있어? ”

“남자의 우정이라는 거 아닐까요?”

에일린의 대답에 아리시엘은 얼굴을 구겼다.

“그런 게 어딨어.”

*&*

저택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이제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한 세바스찬 집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라시엘 공작의 서재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터라, 아리시엘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에일린의 허락이 있었다지만, 이런 모습을 아버님에게 보였다가는 질책을 피할 수 없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노아 때처럼 대화를 듣는 것은 가능했다.

실프가 가져온 목소리는 에일린과 알베르트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공작령이 조금 소란스럽다.”

“저도 들었습니다. 소문이 맞다면 네크로맨서가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이 이상 사태를 확인하러 루미에르 교단에서 성기사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몸이 별로 좋지 않다면, 이 기회에 한 번 보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교단은 꽤 시끄럽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느 정도 여력이 있는 모양이군요.”

세바스찬은 말을 이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저택이다.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겠지. 뭔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하거라. 내 최대한 신경 써주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도 반나절은 자유 시간이지 않습니까.”

“말이 좋아 자유 시간이지, 재미없는 수업의 연장이지 않더냐. 그래. 에일린의 일족이 잘 대해줬다고 들었다.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떤 물건이 좋겠는가?”

“선물이라면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죠. 기회가 되면 에일린에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재미없는 대화만 계속한다.

아리시엘의 고개가 꾸벅꾸벅 꺾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어지면 그대로 잠들 것 같다. 운디네가 소녀의 코에 손을 댔다. 차가운 물이 닿자 아리시엘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빅토리아 시녀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알베르트. 그래. 적응은 잘하고 있느냐?”

“집에 돌아왔는데 적응이라니요.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게 그런 뜻이 아닌 걸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시녀장님. 하지만 사실입니다.”

“너는 정말인지…….”

빅토리아 시녀장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모습은 변하지 않았구나.”

“안심하셨습니까?”

“그래, 성격이 바뀌지 않아서 안심했다. 그렇지만 다른 의미로 더 걱정되는구나.”

에일린은 실프를 어깨 위로 올렸다.

그녀의 품 안에는 완전히 잠든 아리시엘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가씨에게는 피곤한 미행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세 사람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지만, 에일린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

달콤한 향이 났다.

아리시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체온을 지켜주던 부드러운 이불이 흘러내렸다.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만 걸까. 졸린 두 눈을 멍하니 비빈다. 잠에 약한 그녀가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걸린다. 에일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집사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찬물을 받은 잔을 아가씨에게 건넸다.

“고마워.”

누가 준 건지도 모르리라.

반사적으로 대답한 아리시엘은 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찬물을 단숨에 비운 아가씨는 두 눈을 깜박였다. 상이 맺히기 시작한 눈이 익숙한 방 안을 확인했다.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응시하는 에일린과 물병을 들고 있는 알베르트.

잠기운이 단숨에 달아났다.

“알베르트?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아가씨의 집사니까요.”

“벌써 아침이 된 거야?”

“아뇨. 간식 시간입니다.”

“…….”

알베르트가 쿠키가 담긴 접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제 먹은 것과 같은 쿠키다. 아리시엘은 무심코 군침을 삼켰다. 하루종일 알베르트를 쫓아다녔던 탓일까. 쿠키를 본 뱃속이 시끄럽게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그런 거라면 별수 없네.”

접시를 받은 아리시엘은 쿠키로 손을 옮겼다. 접시 위의 쿠키는 어제보다 양이 더 많은 것 같다. 볼 안이 미어터지게 쿠키를 넣은 아리시엘은 행복한 미소를 띄웠다.

만족해하는 아가씨를 응시하고 있던 알베르트는 물었다.

“오늘은 즐거우셨나요?”

“응? 즐거웠어.”

반사적으로 대답한 아리시엘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설마 오늘 따라다닌 걸 들킨 걸까?

그러나 집사는 무언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아리송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특별한 것 없는 루드비히 저택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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