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2) (133/200)

 # 133

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2)

지옥도에서 벗어난 양양 성이 사라지고, 두 사람은 다시 정원으로 돌아왔다.

“세실리아 아그리파. 산의 마녀가 이곳에서 죽었어. 5황자인 아벨 워스테인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 같아. 이 순간에는 살아 있었지만, 지병이 깊어졌고 이는 망자화로 이어졌다는 모양이야. 결국, 우리가 만난 5황자는 이미 녀석들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망자였던 셈이지.”

“…….”

알베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현실이 아니다. 아가씨의 말이 맞다면, 이전 삶에서 유피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다.

“아직 더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이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가씨의 손이 향하는 것보다 먼저, 알베르트는 천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 나타난 세상은 유피의 공방이었다.

평상시의 아름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떡이 진 머리와 눈가 아래로 드리워진 다크서클. 지저분한 드레스는 며칠 동안 세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공허하게 풀린 붉은빛의 눈은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 투영되는 것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은빛 머리가 아름다운 여인이다. 어머니, 아르웬 성녀의 기억을 유피에르는 고장 난 인형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소리가 났다.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삿갓을 눌러 쓴 스켈레톤이었다.

『아이야, 이대로 죽을 생각이냐?』

사부의 물음에 유피에르는 반응하지 않는다.

살짝 눈을 굴리는가 싶더니, 활짝 웃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시선이 돌아왔다.

『실의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 언니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와라. 중원으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제국에 갔다 오거라. 네 어머니의 고향을 보고 오너라.』

“…….”

유피에르는 대답하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 마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사부는 공방을 뒤로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붉은빛으로 빛나는 기묘한 돌이 남아 있었다.

“유피와 저는 낙양에 갔습니다. 왜 이 시점의 그녀가 성에 있는 거죠?”

“갈 수가 없었던 거야. 낙양에는 시더 황자가 있는데,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졌으니까. 무엇보다 이신설교의 선녀가 죽어버렸어. 접점이 이어질 수가 없었지. 그 결과, 마족의 수도는 악마에게 함락당했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무가 몇 번이나 꽃을 피웠을까. 성의 결계가 뚫린 것을 눈치챈 유피가 밖에 나왔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성을 돌아다니던 망자들이 끔찍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흡사 악마를 닮은 기괴한 형태의 마물이다. 유피에르는 그 안에서 그들의 목숨을 거두고 있는 사부를 보았다.

“아저씨!”

『걱정하지 말아라, 아이야. 너는 가거라. 이 한 몸 정도는 무사히 간수 할 수 있으니.』

“그 말이 아니야. 아저씨의 몸도…….”

『그 솔직함이 평소에도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터다.』

스켈레톤의 몸에 붉은빛이 달렸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가는 것처럼. 그 몸에 살이 생겨난다. 오랜 일족이 다루는 지팡이 검을 쥔 사부의 머리카락은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일찍이 중원을 신화의 시대로 이끌었던 천마의 모습이, 유피에르의 앞에 나타났다.

『가거라, 아이야. 제국으로 향해라. 그곳에는 란 가문의 후계자가 남아 있다. 내가 남긴 신석을 들고 있을 테니,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본래 이런 걸 바라고 보낸 것이 아니었다만. 별수 없지. 란 가문의 핏줄이 널 도울 것이다.』

“사군자 말이구나. 그 핏줄이 아직 남아 있을까.”

『혈통은 끊기지 않았지. 다만, 전승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저씨는 어떡할 건데?”

『못해도 수십 년.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면 나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염소를 닮은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두 사람을 본 그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유피의 아공간에서 두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라우와 롯. 롯의 팔에 안긴 그녀는 성문을 뛰어넘었다. 홀로 남은 천마는 다가오는 악마를 보고 입을 열었다.

『돌격대장 마몬인가. 과연, 네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성의 모습이 흩어진다.

신기루가 사라지듯이 천마의 모습이 없어지고, 아리시엘과 알베르트의 앞에는 잿더미가 되어가는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꺾인 깃발. 쑥대밭이 되어버린 정원. 온전한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날 밤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마물과 마족이 침입한 루드비히 저택이다. 비명과 피가 난무하는 저택을 유피에르는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래, 내가 16살 때 겪었던 참사는 악마의 첫 번째 진격이었어. 마몬과 천마의 사념은 충돌했고, 잔존 병력은 유피에르의 행방을 쫓아 숲을 넘어온 거야.”

그건 참사가 지나간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잿더미 속을 그녀는 몇 번이고 오갔다. 그것이 속죄라도 된다는 것처럼.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흩어진 식솔들을 찾아 저택으로 내려왔던 그가 유피에르와 마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모든 걸 잃은 유피에르는 너와 만났어, 알.”

“…….”

인형극이 막을 내리듯 눈앞의 광경이 어두워졌다.

천칭이 자아내는 마법진에서 빛이 사라졌다. 보여주고 싶은 기억은 이게 전부였던 것 같다. 말문이 막힌 알베르트를 아리시엘은 조용히 응시했다.

“하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물어봐도 좋아.”

“이 시점에서 이미 마족들이 당했다면, 왜 악마들은 진격하지 않은 거죠? 3차 대전쟁이 벌어진 건 이로부터 20년이 훌쩍 넘은 후지 않습니까?”

“수도가 함락되었을 뿐이지. 마족의 힘은 건재했어. 시더 황자를 중심으로 해서 항전 중인 세력이 남아 있었고, 지저의 무인들 또한 그 아래에서 뭉쳤지. 하지만 악마를 신봉하는 캘러미티의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고. 아드레이 대산에서 마왕이 부활함과 동시에 마족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돼.”

몇 남지 않은 동포들을 살릴 길을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멸망할 것인가.

“황자와 황녀의 선택은 전자였어.”

“그래서 유피가 돌아갔군요. 동포를 살리기 위해서.”

아리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어? 내가 왜 알을 과거로 돌려보냈는지. 내가 회귀를 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천칭의 위험 부담도 클뿐더러 이 시점의 나는 아직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어. 무언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점이지. 그래서 알을 믿었어. 유피에르와 인연이 있고, 그나마 마족에 대한 적개심이 적은 알을 믿을 수밖에 없었어.”

“만약, 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걸. 알은 내 집사니까.”

아가씨는 단언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푸른 두 눈에는 신뢰의 빛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쌍둥이에게 언질은 해뒀지만, 이곳에 도달하는 건 최소 5년은 더 흐른 후라고 생각했거든. 그 정도 시간이면 선조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알은 가끔 내 예상을 뛰어넘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선조님이 화내는 건 아닐까 몰라.”

쨍그랑, 하고 컵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테이블 위에 있던 아가씨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찻잔을 바닥으로 민 것은 천칭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자 천칭은 알베르트의 앞으로 갔다. 자리에 앉은 천칭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아리시엘을 노려보았다.

“천칭에게 들었습니다. 아가씨는 천칭을 물건처럼 다루셨다고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입이 매우 험한 친구입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천칭의 말은 다 사실이야. 내 자업자득이지. 이 아이가 조율하는 건 세상의 균형이니까. 천칭을 관측한 나 또한 세상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조절해야 할 의무가 있어. 하지만 나는 그 의무를 등졌어. 이 아이의 의지를 억압하고 철저히 도구로 다뤘지. 그것도 모자라 거울 뒤의 세상을 보고 지금 미래를 바꾸고자 하고 있어.”

“…….”

“다른 누구는 몰라도, 천칭만큼은 날 용서할 수 없을 거야. 이 아이가 마족을 증오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야. 아무리 마족이 제국에게 신석을 빼앗겼다 한들, 그 힘을 이용해 다른 세상의 존재가 침공하게 만든 건 그들이니까.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린 마족을 용서할 수 없는 거야. 천칭자리라는 건, 그런 성좌니까.”

아가씨의 손길이 닿자 천칭은 거칠게 그 손을 쳐냈다.

주종관계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천칭이 드러낸 감정은 적개심에 가까웠다.

“아가씨…….”

“알은 몰라. 내가 얼마나 지독한 여자인지.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알은 몰라.”

어째서냐는 뉘앙스가 담긴 알베르트의 목소리에, 아리시엘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있지, 나는 말이야. 그 사건 이후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어. 파랗던 하늘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달콤하던 쿠키가 흙 맛밖에 나지 않고, 사람의 얼굴이 모두 똑같게 보이고. 홍차에서는 끔찍한 비린내가 났어.”

왜 그녀의 입맛이 바뀌었는가.

평소 가까이하던 쿠키와 홍차를 멀리했던 까닭은 단지, 가주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래, 분명 나는 어딘가 고장 나고 만 거겠지. 무얼 보고, 들어도, 모든 것이 다 똑같이 느껴지니까. 그런데도 말이지. 이상한 게 있어. 눈앞에서 자극적인 광경이 일어나면 놀랍게도 색이 돌아오는 거야.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세상이 그 순간만큼은 빛을 되찾는 거야.”

아가씨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언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그 표정에 순진무구한 기쁨이 깃들었다.

“알은 여기 오기 전에 선조님과 싸웠지? 그건 내가 준비한 거야. 평소 내가 정말로 소중히 여기던 것이 망가지면 어떤 감정이 생기는지, 너무나 궁금했거든. 혹시 세상의 빛이 전부 돌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게 망가진 건 아닌가 봐.”

“…….”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문이 막힌 집사를 보며 그녀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당신의 아가씨는 이런 여자야, 알. 하나뿐인 가신도 망가뜨리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이야. 지금 어떤 생각이 들어? 나한테 실망했어? 아니면 화가 났어? 자, 빨리 말해봐. 그것만 들으면 나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표정이 없는 얼굴과 달리 그녀의 두 눈은 욕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일찍이 쌍둥이가 지었던 것 같은 아가씨의 얼굴이다. 당시 녀석이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예상할 수 있었다. 녀석은 생전의 아가씨를 완벽히 따라 하고 있었다. 사소한 몸짓과 행동, 식습관까지 전부. 그렇다면 이것 또한 아가씨의 본질이다.

아리시엘 루드비히가 가면 아래에 갖고 있던 진짜 얼굴이다.

란랑과 아가씨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나.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아가씨를 보며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모두 제 잘못입니다.”

“죄송?”

“아가씨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 집사인 저는 몰랐습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시고, 친구분들을 사귀시면서 모두 극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는 달리 아가씨는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판단이 오만이였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모든 걸 잃고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녀.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낼 수는 없다.

더는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었으니까.

이겨낸 것이 아니다.

그저, 아가씨는 그저 견디고 있었던 것뿐이다.

“저는 눈을 감으면 악몽에 시달렸지만, 아가씨는 눈을 떠도 악몽에 시달리고 계셨던 거군요.”

“…….”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유능했어도, 하나뿐인 집사가 조금만 더 아가씨에게 신경 썼다면 이런 일은…….”

목이 메어오는지, 알베르트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시엘의 표정이 흔들렸다.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무너진다. 그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아가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왜 날 떠난 거야?”

망설이고 또 망설인 목소리.

불안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가 낸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아가씨를 보는 것 같다.

알베르트가 만들어둔 나무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아가씨가 눈앞에 있었다.

“아가씨를 지키려면 제가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키고 싶은데, 떠난다는 게 무슨 헛소리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가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넌 내 고집을 꺾지 못했잖아.”

그 말대로다.

결국, 그녀는 차디찬 전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맞이한 결말은…….

“그렇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결국, 이렇게 돌아올 거면서.”

“정말로 어리석군요, 저는.”

“그래, 알은 바보야. 세상에 둘도 없을 바보라고. 나 같은 여자가 대체 뭐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아가씨의 정체가 마왕이라 할지라도, 저는 아가씨의 편입니다. 왜냐하면, 아가씨는 제 하나뿐인 아가씨니까요.”

“…….”

그것이 일평생을 딸아이 같은 아가씨의 곁에서 보내온 집사의 진심이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아리시엘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난 마왕이 아닌걸.”

“알고 있습니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알은 바보야.”

“그렇군요.”

“정말로, 바보야.”

“…….”

눈가에 어린 눈물을 닦아낸 그녀는 후우, 하고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바뀔 거야, 알. 네가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어. 에일린 언니는 끔찍한 참사를 피했고, 동포들을 더는 미워하지 않아. 유모가 된 노아는 내 곁을 지키고 있고, 로엔 경은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 필립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답고, 호수 밑의 비밀통로는 이용되지 않을 거야. 캘러미티의 첫 번째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고, 넘어온 악마들도 격파당했어. 마족은 적과 다시 마주했고, 병력은 온전해. 그들이 조직적으로 대항한다면 이전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야. 제국도 마찬가지야. 루미에르 교의 신관들이 유피에르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상, 프리실라 또한 빠르게 활동을 재개할 거야. 크로만 공작가의 마도 병단이 움직일 거고, 그 움직임은 자연스레 마탑의 행동방침이 될 거야. 내 스승이었던 대마법사 카라스가 공방에서 나올 것이고. 루드비히 가문이 북부로 향할지도 모르지. 그러네. 내 지아비였던 남자도 어쩌면 불우한 미래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성 미뉴에트 가문의 자하단 도련님 말씀입니까.”

“그래, 내 남편이지만 불쌍한 사람이었지.”

“아가씨는 그분을…….”

“알고 있잖아. 사랑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하고 아리시엘은 말을 이었다.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어.”

“…….”

B22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

아가씨의 의중을 알아차린 알베르트는 말을 아꼈다. 아가씨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사랑을 속삭일만한 여건도 되지 못했다. 그저 꼭두각시.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성 미뉴에트 가문의 위세를 빌리기 위해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이곳을 나가면 꽤 시간이 흘러있을 거야, 알.”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은 시간의 축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알이 여기에서 나간다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세월이 흘러 있을 거야. 다행인 것은 캘러미티나 악마들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어. 마족이 건재한 이상,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제국이야. 명심해. 적은 마족이 아니야. 캘러미티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악마들이야.”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알은 충분히 해줬어. 이제 정세가 움직이길 기다려야 할 거야. 아마 내가 16살이 되기 전까지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로 생각해. 다만, 그 이후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생각하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몸을 웅크리고 준비해, 알. 무엇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어떤 일이 생겨도 대처할 수 있게 말이야.”

“아가씨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집사는 변하지 않았다.

아리시엘이 본 어떤 세상 속에서도, 이 남자만큼은 자신을 등지지 않았다.

세상 모두를 적으로 돌린다고 해도, 알베르트만큼은 자신의 편이었다.

그 사실을 이 남자는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 여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이 노력했으니까, 이제 유피에르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밝혀갈 거야.”

그러니까 상을 내린다.

알베르트의 안색이 밝아지는 것을 본 아리시엘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할 수 있는 걸 하나하나 준비해 가. 그럼 알이 향하는 길이 곧 답으로 이어질 거야. 이 앞으로는 이정표가 없으니까.”

추억이 가득한 정원의 풍경은 천천히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호수가 사라지고, 신목이 모습을 감추고. 이내 테이블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녹아드는 광경 속에서 아가씨와 집사는 서로를 응시했다.

“아가씨는…….”

“나는, 이제 그만 쉬고 싶어. 그동안 힘냈으니까. 이 정도 자격은 있지 않을까?”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모르겠다. 다시 작별을 고해야 하는 건가. 알베르트는 목 안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그런 집사를 보며 아리시엘은 물었다.

“알. 아직 어린 나는 어땠어?”

“무척이나 귀여우셨습니다.

“그렇지?”

아가씨는 시선을 들었다.

따사롭게 들어오던 햇빛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아공간처럼 검은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천칭의 관측에서 벗어난 이번 생의 나는 서투를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일지도 몰라. 자기 고집이 셀지도 모르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꼬마일 거야. 분명 내버려 두면 이상한 방향으로 걸어갈 거야.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아가씨?”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알. 이번 생의 나를, 부탁해도 될까?”

이것은 낙인일지도 모른다.

지난번의 삶도 이미 자신이 묶을 대로 묶어버린 집사의 삶이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좀 더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데도 아리시엘은 이 남자가 자신의 곁을 지켜줬으면 했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마지막에는 결국,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단 한 명 뿐인 가족. 아버지와 같은 남자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알베르트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뭔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 아리시엘의 표정이 가벼워졌다.

“알,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

“아가씨는, 언제나 제 최고의 아가씨였으니까요.”

아리시엘은 웃었다.

아가씨의 마지막 미소에 이끌리듯이 알베르트 또한 눈물 젖은 미소를 그렸다.

“다시 만나자, 알. 내가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야. 이번에는 반드시 행복해져.”

“알베르트 라나. 아가씨의 마지막 명을 받들겠습니다.”

빛이 사라진다.

찬란한 금빛은 그렇게 아름다운 웃음을 남긴 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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