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1)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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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1)

    감정을 수습한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호수의 풍경이 평화롭다. 언제나 몸을 맡기고 있던 정원과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허브티.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상이, 너무나도 소중했던 광경이 돌아와 있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잔을 내려놓은 알베르트는 아리시엘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어떻게 살아계신 겁니까?”

    무엇보다 그것을 가장 먼저 물어봐야 했다.

    직접 이 두 눈으로 아가씨의 시체를 보고 만지기까지 했다. 찬란하게 빛나던 금빛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걸 봤는데, 눈앞의 아가씨는 생전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살아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있던 세상의 나는 죽었어, 알.”

    “그 말씀은, 지금 아가씨는 환상이라는 말씀입니까?”

    “환상……. 그러네. 알에게는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해. 하지만 죽은 것도 나. 여기에 있는 것도 나. 알이 알고 있는 아리시엘 루드비히도 나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건 내가 천칭을 관측한 순간부터 시작된 거야. 순환이 보이게 되면 말이지. 더는 막을 방법이 없어지는 거야.”

    아리시엘은 테이블 위의 천칭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표정 하나 없는 요정은 그녀의 손길을 거절했다. 싸늘한 반응에 아가씨는 웃음을 머금었다.

    “있지, 알. 세상이라는 건 말이야. 우리가 사는 이 세상만 있는 게 아니야.”

    “지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우리 세상에 포함되는 거지. 내가 말하는 건 다른 세상이야. 거울 뒤의 세상.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마주할 수 없는 세상. 세상의 끝이라고 부르는 이 장소는 말이지. 거울이 마주 보는 장소야. 본래는 서로 등을 맞대고 있을 터인 세상이 같은 선 상 위에 서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간섭할 수 있고, 다른 세상에 있던 나의 일도 알 수 있는 거야. 거기에 있는 것은 나고, 여기에 있는 것 또한 나니까.”

    설명을 들은 알베르트는 멍하니 아리시엘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알이 이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성좌의 마스터가 되어버리니까. 나도 간신히 깨달은 마도야. 그러지 못했다면 천칭도, 쌍둥이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자, 이번에는 알의 차례야.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생각보다 네가 일찍 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거든. 여기에 오는 건 좀 더 시간이 흐른 뒤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제 이야기 말입니까.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아가씨가 전장으로 떠나고, 저택을 등졌던 시기부터 말씀을 올려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돌아온 시점부터 말하는 게 맞을까. 아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고민하는 알베르트를 아리시엘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급할 것 없다.

    차분하게 이야기해도 좋다.

    아가씨의 배려를 받아들인 알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돌아온 시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젠가 악몽 속에서 꺼냈던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때와는 다르다. 자신을 성좌라고 밝혔던 쌍둥이와는 다르다. 눈앞에 있는 건 진짜 아가씨다. 그 사실이 알베르트는 무엇보다 기뻤다.

    …….

    “그래, 그 여자를 찾아가서 천마의 사념과 만났구나. 알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평소에 무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잖아.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방법 말고는 선택할 길이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집사 시험을 이용해서 성을 찾아간 건 의외네. 후회하지는 않아? 다들 죽은 줄 알고 있을 텐데.”

    “제가 돌아가면 다들 놀랄 겁니다.”

    “누군지 잊어먹고 있는 건 아닐까 몰라.”

    …….

    “현자의 돌.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그 여자에게 준 건 정말 잘한 거야. 내가 다루는 마법과 달리 그 여자가 쓰는 마법은 어느 정도 마도구에 의존하는 면이 있거든. 그럼 성에 있던 망자들도 거의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갔겠구나.”

    “그렇습니다. 유피가 그들의 저주를 풀었습니다.”

    “좋은 소식이네. 저택의 참사는 일어나지 않겠구나.”

    “네?”

    “설명은 차후에. 계속 이야기해 봐.”

    …….

    “월아를 회수하기 위해, 라피엘을 구하고…….”

    “라피엘 슈네르. 1황자의 시녀가 살아남았구나.”

    천마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이다.

    월아를 쥔 라피엘을 구한 일을 말하는데, 아가씨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멈췄다. 살아남았다. 그녀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아가씨. 혹 실례가 아니라면…….”

    “그러네, 나는 관찰했을 뿐이니까, 알의 입으로 듣고 싶었거든.”

    그럼 보러 갈까, 하고 아리시엘은 손가락을 튕겼다.

    저울을 들고 있던 천칭이 알베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작은 요정의 몸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아가씨의 마나다. 천칭의 입이 움직인다. 알베르트는 이해할 수 없는 수상쩍은 언어다. 그 양손과 양발에서 4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별을 닮은 마법진과 달을 닮은 마법진. 푸른빛의 원이 두 발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천칭이 행하고 있는 마법은 하나가 아니다. 각자 다른 술식을 가진 4개의 마법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다중영창.

    아리시엘의 백업을 받은 천칭은 자신의 주특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알의 아래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특기다.

    “나도 모든 걸 본 건 아니야. 하지만 깨진 조각을 최대한 모아봤어. 가자, 알. 네가 알고 있는 세상과 유피에르, 그 여자가 겪은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푸른빛에 둘러싸인 저울에 아가씨는 손을 얹었다.

    뒤따르듯이 알베르트는 그 위에 손을 올렸다.

    “잘 봐, 이게 유피에르가 맞이했던 현실이야.”

    세상이 녹아내린다.

    추억이 깃든 정원이 사라지고,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두운 대산이다.

    두 사람은 영체가 된 것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아가씨의 모습은 월아의 악몽 속에서 봤던 유피와 비슷한 상태였다. 알베르트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리시엘은 앞을 가리켰다. 대산 정상에는 세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별무리가 지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의 여인, 유피에르 바토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 곁에 있는 것은 누구인가.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 시더 아르테니아다. 무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앞에는 월아를 든 라피엘이 보였다. 그녀의 손은 상태가 심각했다. 뼈가 드러난 것도 모자라 팔까지 전부 침식당했다. 시녀의 오른쪽 어깨는 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를 잃을 수는 없어. 라피엘이라도 이렇게 했을 거야.”

    “자신의 여자도 지키지 못하는 남자가 무엇을 논한다는 말이냐?”

    유피에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더는 라피엘을 향해 뛰었다.

    그 머리가 작열한다. 순식간에 본신을 드러낸 시더는 단 한 걸음으로 라피엘과의 거리를 좁혔다. 권갑 위로 뚜렷한 형체의 강기가 떠오른다. 검붉은 빛이 감도는 강기는 마기와 내공이 섞여 있었다.

    월아와 권갑이 부딪힌다.

    월아에서 흘러나온 하얀빛은 순식간에 권갑의 빛을 먹어치웠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시더의 권갑이 깨졌다. 작열하는 머리카락에서 빛이 사라진다. 시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빙글, 몸을 돌린 라피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더의 목을 향해 월아를 찔러 넣었다.

    그 가슴으로, 날카로운 은빛이 달렸다.

    월아가 땅에 떨어졌다.

    숙주의 몸에서 떨어진 백사는 칼자루에 달라붙었다. 천천히 굳어가듯이 뱀은 하나의 장식품이 되었다. 한 박자 늦게, 라피엘이 시더의 몸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시더는 그녀를 받았다. 몸 안에 들어온 라피엘은 울컥, 하고 피를 토해냈다.

    “라피엘……?”

    라피엘을 끌어안은 시더의 손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녀의 가슴에 남은 관통상은 돌이킬 길이 없다. 어떤 약을 가져온다고 해도 치료할 수 없다. 목숨이 끊기기까지는 불과 몇 초. 시더의 품에 안긴 라피엘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왼손이 시더의 볼에 닿았다.

    “또, 울고 계시는군요. 마치, 처음 봤을 때, 같네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만. 그만 말해라. 일단 상처를 먼저…….”

    라피엘의 눈이 흐릿해진다. 일그러지는 시더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언제나 웃고 계셔야, 모두가 불안해…….”

    턱선을 따라 움직이던 라피엘의 손이 떨어졌다.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다. 남은 것은 축 늘어진 그녀의 몸뿐. 멈춰버린 시더를 향해 유피에르가 다가왔다.

    “오빠.”

    “…….”

    동생의 부름에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게 된 라피엘을 시더는 끌어안았다. 뼈가 드러난 오른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무언가 참는 것처럼 유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라피엘을 안은 채 시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피에르 황녀.”

    차가운 목소리였다.

    감정을 억누른 어조에서는 평소와 같은 활발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말해.”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들어야만 한다는 걸 유피에르는 알고 있었다.

    “널 찾아올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시더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길이 타오르듯이 본신을 드러낸 시더는 대산을 질주했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오빠의 모습을 보며 홀로 남은 유피에르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쓰러지듯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 사이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오빠. 라피엘.”

    작은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유피에르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두 사람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이 멈춘다. 울고 있는 유피에르의 모습이 사라진다.

    정원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건…….”

    “우리 세상에서 라피엘은 죽었어.”

    이전 시대에서 알베르트가 그녀를 보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다.

    이 시점에서 라피엘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시더와 유피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라피엘 때문이었다. 입맛이 쓰다. 알베르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었다. 얼굴이 굳은 집사를 보며 아가씨는 말을 이었다.

    “이건 시작에 지나지 않아, 알.”

    “시작이라고요?”

    이런 슬픔을, 그녀는 몇 번이고 더 겪었다는 말인가?

    아리시엘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이 다시 천칭 저울로 향했다. 푸른빛의 마나가 가속한다. 요동치는 마나 속으로 알베르트는 손을 옮겼다.

    이번에 나타난 광경은 양양 성이다.

    지옥도에 삼켜진 양양은 알베르트의 기억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마가 진압되지 않는다. 거리는 이미 쑥대밭이 된 지 오래다. 대로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다. 뚫린 외문에서는 끔찍한 마물들이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다. 황림당의 무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죽을 두른 카일은 날카로운 발톱에 목이 꿰뚫려 있었다. 관병들은 어떠한가. 상황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용하 거리에 있는 싸움판 중앙에는 한 올빼미가 쓰러져 있었다. 본신을 드러낸 무진은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이 있어야 할 가슴에는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성문 앞에 있는 이신설교의 방파제도 무너져 있다.

    신복을 입은 신도들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십자패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그 안에서 알베르트는 피로 물든 하얀 신복을 볼 수 있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머리카락이 피와 흙으로 더럽혀져 있다. 선녀, 한소망은 이미 숨이 끊겨있었다.

    성벽 위에는 이제 세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

    쓰러진 채 간혹 몸을 떠는 아벨 워스테인과 무릎을 꿇고 앉은 유피에르 바토리.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앞에는 보랏빛 머리의 마녀가 서 있었다. 산의 마녀, 세실리아 아그리파. 그녀는 내성으로 들이닥친 마물과 마기에 먹혀버린 동포를 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떠나는 건 좀 더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욕심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유피는 항상 언니를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어쩔 수 없네. 세계수의 정상에 갔다 올게.”

    “안 돼, 세실리아. 왜 그러는 거야? 그러지 마.”

    가벼운 세실리아의 어조에 유피에르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세계수의 정상에 오른다는 것. 그건 지혜를 청하는 것과 다르다. 마녀들은 누구나 세계수의 지식을 청하며 마법을 행사하지만, 정상에 도달하는 것만큼은 피했다. 세계수의 정상. 모든 마녀의 지향점이지만, 그곳에 닿는다는 건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작별이야, 유피. 이게 마지막이구나.”

    “언니, 제발…….”

    “괜찮아. 슬퍼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단다. 언젠가, 유피가 마도의 끝에 닿는다면 세계수 정상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그냥 이것 하나만 기억해주렴. 언니는 항상 유피 편이라는 것. 알겠지? 너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단다. 그럴 게 유피는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니까.”

    세실리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커진다.

    사뿐히 그 위에 앉은 세실리아는 양양 성의 하늘로 떠올랐다. 그 지팡이 아래에서 세계수를 모방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순식간에 떠오른 10개의 마법진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양양 성 전체를 뒤덮는 마법진은 일순간 엄청난 빛을 흩뿌렸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떨어지는 보랏빛 나뭇잎은 양양 성에 드리워진 붉은 안개를 걷어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유피에르의 얼굴은 무너져내렸다.

    “아아, 아아아아!!”

    그것이 마녀가 자아낸 마지막 빛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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