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금빛의 해후 (131/200)

 # 131

금빛의 해후

[이 느낌은…….]

화를 억누르지 못한 목소리가 났다.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던 천칭이 소리쳤다.

[그런 거였습니까, 마스터. 처음부터 모두 당신이 의도했던 겁니까……!]

‘자네?’

[마스터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최악입니다. 정말로 최악입니다, 그 여자는.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절 관측한 자가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니……!]

분노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었다.

천칭이 이렇게까지 노기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의지를 억눌렀을 때보다 더한 감정의 파도다. 천칭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저것이 여기 있는 이상 제가 함께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군요. 그 여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잠깐만 기다리게. 그렇다면 이건 역시…….’

[서두르시죠. 제가 본래 자리를 찾아가면 저울도 사라질 겁니다. 그래. 아리시엘 루드비히. 당신은 그런 인간이었지. 날 관측했다는 건 당신도 거울 뒤의 세상을…….]

천칭의 말이 끊긴다.

몸 안에 깃들어 있던 천칭의 기운이 사라졌다. 흩어지듯이 피어오른 기운은 탁상 위의 천칭 저울로 빨려 들어갔다. 저울의 접시가 한쪽으로 기운다. 좌측으로 떨어진 저울은 평형을 이뤄달라는 것처럼 우측이 올라왔다.

답까지는 이제 한 발자국밖에 남지 않았다.

천칭 저울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알베르트는 손을 뻗었다.

*&*

소녀는 거목 안쪽에 파인 구멍 속에서 떨고 있었다.

생각보다 공간은 넓었지만, 그녀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소녀는 두 다리를 몸쪽으로 붙였다. 가지런히 양손을 모은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무섭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새로운 정원을 돌아보는 것처럼 즐겁기 짝이 없었는데, 순찰 중인 기사들을 피해 숲을 헤매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다.

아무도 없어.

잔소리꾼 노아도. 시답잖은 대꾸를 반복하는 집사도.

신비한 에일린도. 무뚝뚝한 필립도. 멋진 로엔 경도.

가문의 긍지를 말하는 아빠도. 좀 더 침착하라는 엄마도.

평소에는 귀찮기 짝이 없는 사용인들도.

왜 필요할 때는 내 옆에 없는 거냐고, 겁에 질린 소녀는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본다. 위쪽 구멍에서는 푸른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혹시 저택의 사용인들이 그녀를 찾아낸 걸까? 희망의 불씨가 소녀의 마음에서 일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직 소녀가 사라진 걸 모른다. 잘해야 저택에서 숨바꼭질하는 중이라 여기고 있겠지. 실제로 그녀는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사용인들을 골탕 먹였다.

장난이 지나치면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

노아가 들려준 우화가 떠올랐다. 양치기였던 소년이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진짜 늑대가 왔을 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저택의 사용인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곳을 찾아낸 걸까? 구멍 안쪽에 짚과 나뭇잎이 깔린 걸 봤을 때, 어떤 동물의 보금자리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 정도는 앉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 혹시 곰이 지내는 건 아닐까? 아니, 동물이면 다행이다.

저택에서 빠져나온 소녀가 찾아온 이곳은 금지된 숲이다.

마물은 물론이고, 마족까지 살고 있다는 저주받은 숲이다. 마족. 그래, 소녀는 마족이 보고 싶었다. 마족과 검을 겨누고 살아온 루드비히 가의 영애가, 마족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면 웃음거리가 된다. 후에 있을 사교회 데뷔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마족을 봐야만 했다.

그러나 엄마도, 로엔 경도, 노아도. 모두 금지된 숲으로 향하는 걸 말렸다.

그래서 나왔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몰래 저택에서 빠져나온 아리시엘은 마족을 보러 숲에 왔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이제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림자가 진다.

햇살이 들어오던 구멍 위쪽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아가씨라는 사람이.”

“…….”

그녀를 보는 순간 얼굴을 구긴 것은 한 남자였다.

낯익은 얼굴이다. 알베르트 라나. 소녀의 전속 집사다. 평상시에는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남자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소녀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람이다. 그것도 자신의 집사다. 안도한 소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 왜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울어요?”

“우, 아. 으……. 무서웠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다.

영애라면 손수건을 들고 다니면서 닦으셔야 해요, 노아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외출할 때는 언제나 끼고 다니던 순백의 장갑도. 여유분까지 챙겨서 가져온 꽃향기가 나는 손수건도. 모두 숲을 돌아다니면서 더러워져 버렸다.

흙먼지가 소녀의 얼굴에 그대로 묻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는 한숨을 쉬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은 그는 그녀의 옆으로 내려왔다. 하얀 손수건을 꺼낸 그는 소녀에게 건넸다.

“고, 고마워.”

“고마우면 다음부터 가출 같은 건 하지 마요. 공작 가문의 영애나 되는 아가씨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로엔 경이 말하지 않았어요? 금지된 숲으로는 절대 가지 말라고. 무슨 깡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나 참.”

딱딱한 집사의 목소리에 소녀는 눈물 젖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마족을 봐야만 했는걸!”

“그런 걸 봐서 뭐하게요? 죽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주지 마요.”

“나, 나는 루드비히 가문의 아리시엘이니까. 마족을 모르면 안 돼. 알아야만 해. 그래야 가문의 이름에 누를 안 끼치는걸. 검은 못 쓰니까. 다른 거라도 잘해야만 한단 말이야.”

“어이구, 기특해라. 이것 참. 아가씨의 마음 씀씀이에 집사는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렇게까지 가문을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이 죽으면 가문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니 말이에요.”

“…….”

신랄한 대답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아났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모양 좋은 입꼬리가 흔들리고, 푸른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소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울어선 안 됐다. 창피는 한 번이면 족하다. 같은 남자 앞에서 눈물을 두 번이나 흘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가씨치고는 잘 하셨어요. 용케도 제 은신처를 찾았네요. 여기라면 안전하니까요.”

“은신처?”

“네, 여기는 제가 만들어놓은 비밀기지니까요.”

집사는 창고에서 몰래 가져온 사과를 꺼냈다.

한 입 베어먹으려다가 뚫어지라 쳐다보는 아가씨의 시선을 느끼고, 반으로 갈랐다.

“먹으실래요?”

“고마워.”

아리시엘은 사과 반쪽을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집사는 그 모습을 잠시 살펴보았다. 나름 귀엽게 생긴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숲길을 헤매고 다녔던 건지, 비싼 드레스는 이곳저곳이 찢겨 있었다. 외출용 장갑도 한쪽은 보이지 않는다. 윤기가 흐르던 금발도 나뭇잎과 흙먼지로 가득해 더러운 동물의 털처럼 보였다. 사과를 잡은 두 손은 흙이 가득하다. 사과를 먹을 때 흙 맛이 느껴질 텐데, 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다.

정말인지. 모셔야 할 아가씨라기보다는, 손이 많이 가는 동생에 가깝다.

사과를 다 먹어치운 아리시엘은 비로소 여유가 돌아왔는지, 옆에 앉은 집사를 보았다.

집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날카로운 인상의 집사는 아리시엘에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전속이라고 해도 대화를 나눈 적은 손에 꼽았다. 대부분 노아에게 일을 떠맡기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진다고 할까. 세바스찬과 함께 있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다가가기 힘든 남자였다.

알베르트가 냉소적인 건 그의 출신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노아가 말하길, 이 남자는 슬럼가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가문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럼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용인들은 그녀를 아가씨로만 대한다. 정해진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 물어보자. 아리시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베르트. 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도 내가 바보라고 생각해?”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퉁명한 대답에 그녀는 겁을 먹었지만,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작아지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나, 다 알고 있어. 뒤에서 다들 이야기하잖아. 루드비히 가문의 후계자가 검도 못 다루는 반푼이라고. 검의 명가에서 태어났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고.”

“검이랑 마족 이야기를 왜 하는가 싶더니. 그래서 가출한 건가요, 오늘?”

“가, 가출한 적 없어!”

울컥한 아리시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이 남자에게 진지한 대답을 바란 게 바보였다.

뾰로통해진 소녀는 몸을 돌렸다.

알베르트는 등을 돌린 아가씨를 보았다. 이런 고민 상담을 왜 자신에게 하는지 모르겠다. 좀 더 의지할 수 있는 상대에게 꺼내는 편이 나을 텐데. 그래도 상담을 들은 이상 그것에 대답해주는 게 예의다. 이런 사고뭉치 소녀라도, 알베르트의 아가씨였으니 말이다.

“검을 못 다루면 뭐 어떻습니까. 그래도 아가씨는 루드비히 가문의 아리시엘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

“그걸로 충분한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못 하는 일 하나 정도는 있어요. 단지, 아가씨는 그게 검이었을 뿐이에요.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요. 아가씨는 아직 어리잖아요. 하나하나 해보면서 적성에 맞는 걸 찾아가면 될 뿐이에요. 아니면 그런 건가요? 난 검에 재능이 없으니까, 다른 것도 다 포기한다는.”

“포기한다고 한 적 없어. 하지만……. 나, 몸은 정말 못쓰는걸.”

무가에서 태어난 후계자가 신체 능력이 떨어진다.

어딜 가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야기다.

그것이 제국 내에서 둘도 없는 명문 중의 명문, 루드비히 가문이라면 더더욱.

“그럼 마법이라도 배워보세요.”

“마법?”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 채.

“재밌지 않겠어요? 검의 명가에서 불세출의 마법사가 태어난다면 말이에요.”

아리시엘은 그때, 처음으로 집사의 웃음을 보았다.

*&*

그리운 광경을 보았다.

한 줌의 빛이 사라지고, 눈을 뜬 알베르트는 한 정원에 있었다.

호수를 배경으로 삼은 그림 같은 정원.

정원 어디에 있어도 눈에 들어오는 가문의 수호수라 불리는 신목.

루드비히 저택의 정원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곳에 있겠지.

자신이 좋아하는 그 장소에서.

호수가 보이는 이 정원에서.

신목 아래에서 티타임을 갖는 걸 좋아했다.

봐, 그렇지 않나?

신목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그곳에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찬란한 금빛이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알베르트는 발을 옮겼다.

등을 보인 그분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드는 손에 있는 것은 찻잔이다. 콧가를 간질이는 냄새는 허브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원래 그분이 좋아했던 건 유피와 마찬가지로 달달한 차였다. 하지만 참사 이후 그분은 입맛을 바꿨다. 어린 나이에 가문의 가주를 맡았으니까. 식습관 하나하나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다.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루드비히 가문은 건재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살아 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가씨.

그릇과 찻잔이 맞닿았다. 다가오는 알베르트의 기척을 느낀 금빛은 입을 열었다.

“이번 숨바꼭질은 좀 길었지? 그래도 날 찾아내다니, 역시 알에게는 못 이기겠어.”

그리운 목소리였다.

의자에서 몸을 돌린 금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리시엘 루드비히.

노집사의 자랑이었던 아가씨가 그 자리에 있었다.

“…….”

그녀는 진짜인가.

이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알베르트는 일순간 그녀의 존재를 부정했다.

혹시 이것도 환상인 건 아닐까?

떨쳐내지 못하는 의문을 품은 채 알베르트는 그녀의 곁으로 향했다.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알베르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밑으로 내려간 시선에 하얀 손등이 들어왔다. 알베르트는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예의를 갖춘 집사는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 몸을 맡긴 그녀는 알베르트를 보고 있었다. 푸른 눈이 반짝인다. 그 눈동자에 비춘 것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이다. 부정할 수밖에 없는데. 아가씨의 시체를 직접 이 눈으로 보았는데. 그럼에도 눈앞의 아가씨를 부정할 수가 없다.

실체가 느껴진다.

따뜻한 맥동. 부드러운 손길. 그 온기는 아가씨의 것이 맞았다.

이번에는 진짜다.

가짜가 아니다. 환상 같은 것이 아니다.

알베르트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리시엘 루드비히였다.

“알베르트 라나. 지금 막, 아가씨의 곁에 돌아왔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와달라는 그녀가 내린 마지막 명. 아가씨가 말한 저택은 바로 이곳이었다.

“어서 와, 알. 정말로 고생했어.”

아가씨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났다.

참을 수가 없게 된 알베르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부신 얼굴을 좀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데, 눈치 없이 차오른 물안개가 아가씨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다르다. 알베르트가 흘린 눈물 때문만이 아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아리시엘도 똑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지 마, 바보야. 나이를 먹더니 눈물만 많아졌구나.”

“아가씨도 울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가 운다는 거야.”

천칭 저울을 든 작은 요정은 그런 두 사람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요정의 손길에 따라 흔들리는 천칭 저울은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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