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검성(劍星)
검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홀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지면에 흩어진 돌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주변을 덮고 있는 기운 하나하나가 이미 검기에 가깝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베르트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기도가 너무 강한 나머지 숨을 쉬는 것이 힘들 정도다.
호흡을 정리하는 순간, 알베르트는 검성의 모습을 놓쳤다.
몸을 물러 거리를 벌렸다. 기척이 따라붙는다. 반사적으로 검을 들었다. 검신 위로 충격이 떨어졌다. 생각보다 가볍다. 검? 다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들어온 것은 손날이었다. 힘으로 밀어낸다. 그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무언가가 다가왔다. 이쪽이 진짜다. 유그피르의 검이 보인다. 막아낸다. 월아를 비튼 알베르트는 검성과 일 합을 나누었다.
“-!?”
날아간다. 순식간에 시야가 멀어진다. 충격을 줄인다. 두 발로 홀 바닥을 끈다.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 바로 잡는 시야 한 편에서 검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신형이 일렁인다.
이형환위.
검성의 수는 일찍이 사부님이 사용했던 전설적인 경신법이다. 놓치고 나면 따라갈 수 없다. 그러면 사전에 막을 뿐이다. 알베르트는 유적지에서 주웠던 광석을 꺼내 투척했다. 세 개의 돌이 노리는 곳은 차례대로 눈, 목, 심장. 모두 검성의 앞에서 막혔다.
검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단순한 손짓이었다. 쓸어내리듯이 얼굴에서 가슴으로 내려진 손에는 광석이 잡혀 있었다.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번 시간은 그저 찰나.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알베르트는 검성과의 거리를 쟀다. 춤을 추듯이 발이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멈췄다. 검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이형환위가 아니다. 고속으로 내달리고 있다. 움직임을 놓쳤을 뿐이다. 따라간다. 알베르트는 아랑처럼 땅을 좁히며 달릴 수는 없다. 그가 배운 것은 사부님의 경신법, 풍도신보를 한계까지 운용한다.
흙먼지가 일어났다.
먼지가 뒤따르는 그 앞에 검성이 있었다.
전력으로 내달린 알베르트는 간신히 검성의 모습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유그피르의 검이 불타오른다.
제국을 상징하는 명검과 천마의 신검이 부딪혔다.
카라락!
불똥이 튀어 오른다. 월아에 실리는 중량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무기다. 유그피르의 검을 떨쳐낼 수 없다. 무언가 다가온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걸러낼 수 없다. 급한 대로 알베르트는 왼손을 들었다. 차가운 이물질이 손을 꿰뚫는다. 아픔을 느낄 사이는 없다. 들어오는 후속타를 받아내기 위해 알베르트는 월아를 옮겼다.
머리, 받아낸다. 목, 넘길 수 없다. 왼손을 준다. 손등에서 통증이 달렸다.
붉은 피가 흩날렸다. 손등에 꽂혀 있는 광석이 보였다. 시야를 바로 잡은 알베르트는 검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신형. 검성의 발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이미 보법의 일종과 같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다. 검성의 몸놀림은 알베르트가 알고 있는 기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극한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나 마찬가지다.
검성을 칭송하는 전승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승이 거짓에 가깝다.
그 어떤 전승도 검성의 경지가 이런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내공을 한계까지 끌어낸 알베르트와 달리 검성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다.
처음 보였던 기운은 이쪽의 전의를 자극하기 위한 투기다. 한결 가벼워진 그의 몸에서는 짙은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즉, 지금 검성이 보이는 움직임의 주는 신체의 힘이다. 알베르트처럼 내공이 주가 아니었다.
이것이 체의 극.
사부님이 말했던 완성된 체가 눈앞에 있었다.
어깨로 호흡을 재개했다.
검성의 움직임을 무리해서 따라잡았기 때문일까, 혈도에서 미미한 통증이 달렸다. 반면, 검성은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낡은 유그피르의 검신을 슬며시 쓰다듬은 그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누군가를 닮은 벽안이 냉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것이 검성.
신화의 시대를 살아갔다는 검의 극한에 이른 기사.
제국 최강의 검.
검성 블라드 루드비히.
알베르트의 입가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절대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 그런 것과는 별개로 몸 안의 피가 끓어올랐다.
무인의 본능이 가슴을 불태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앞의 존재는 그야말로 영웅이다.
신화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괴물 같은 아랑 사형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영웅이다. 넘을 수 없는 벽과 마주했음에도, 알베르트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끝이 아니다.
넘어서야 할 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을 박찬다. 검성의 움직임을 놓치기 전에 알베르트는 나아갔다.
검성을 쓰러뜨린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그래, 아무래도 좋아졌다.
이 싸움을 왜 시작했는지. 그런 건 관계없다.
알베르트는 그저 눈앞의 무인을 이기고 싶었다.
“때로는 수십의 말보다 검이 더 중요한 걸 말하는 법이지. 우리의 첫 만남도 그러지 않았나? 그래, 자네의 의사가 그렇다면 나 또한 어울려주겠네.”
검성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묻어 나왔다.
알베르트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재밌다. 부정할 필요는 없다. 논다는 말이 맞았다. 즐겁다. 검성과 검을 맞대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즐겁다. 숨이 차오르고 몸이 무거워진다. 몸의 이상을 알리는 통증이 점점 강렬해진다.
월아와 유그피르의 검이 부딪히며 시계를 어지럽혔다.
번뜩이는 검성의 움직임을 알베르트가 뒤따라간다.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소모전을 계속해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목이 메말라버릴 것만 같다. 목 안이 눌어붙는다. 불쾌하다. 몸 안의 피가 들끓는다. 닿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이길 수 없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검성을 쓰러뜨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뒤를 생각할 여력은 없다.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부분에 손을 뻗는다.
마기를 다루지 않고서는 검을 맞대는 것조차 사치였다.
판단을 마친 알베르트의 머리가 작열했다.
그는 잡념을 버렸다. 생각하는 것은 하나, 눈앞의 적대자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 외의 사고는 필요 없다. 내공과 함께 마기가 어우러진다. 신체가 타오른다. 감각이 확장된다. 마기를 끌어 올린 알베르트는 호흡을 갈무리했다.
체력은 많지 않다.
검성과 검을 맞댄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럼에도 전력을 발휘한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기는 만족스럽게 제어되지 않는다. 신체가 너덜너덜하다. 이미 만신창이다. 왼손에는 관통상까지 남아 있다.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태다. 이런 몸으로 검성을 이길 수 있을까? 차라리 맨몸으로 아랑 사형과 싸우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랑 사형과 함께 여행을 떠난 이 한 달간. 그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사냥꾼이라는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과 같다.
검은 이미 검집에서 뽑혔다. 날을 드러낸 검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사냥해라.
먹잇감을 유린하고 그 이빨을 박아 넣어라.
망설이지 말아라.
사냥을 멈춘 사냥꾼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충동에 몸을 싣는다. 알베르트의 신형이 사라졌다.
본신을 드러낸 그는 단숨에 검성과의 거리를 좁혔다. 월아가 검은빛을 뿜는다. 유그피르의 검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막혔다. 맞닿은 검을 뿌리쳐내듯이 밀어붙인다. 밀리지 않는다. 역으로 유그피르의 검이 앞으로 나왔다. 단순한 힘겨루기로는 밀어낼 수 없다.
알베르트는 주먹을 쥐었다. 권강을 두른 손날이 검성의 목을 노렸다. 그 손날이 검성의 손에 막힌다. 알베르트의 움직임은 이미 읽히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다.
두 검이 경합에서 벗어난다. 알베르트는 다리가 올라간다. 강기가 실린 발차기는 그대로 검성의 머리에 직격했다. 얼굴을 앞에 두고 발이 멈춘다. 검성의 팔에 막힌 발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연이어서 쏟은 이격, 삼격도 막히고, 막혔다.
알베르트는 실망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아아, 그래. 쉽게 무너지면 말이 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검성 블라드 루드비히.
신화의 시대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런 존재가 이 정도로 쓰러졌다면 역으로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놓치지 말아라.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쫓아간다. 내공이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다. 극한에 달한 알베르트의 움직임은 검성을 추적한다. 뜨겁다.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피가 끓어오른다. 몸 안에서 불꽃이 달리는 것 같다. 타오르는 화마를 재울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 자체가 되어서 나아간다.
불길이 달린다.
들불은 곧 꽃이 되어 알베르트의 주변에서 피어났다.
천마신공 오의
백화혈무
검붉은 꽃이 피어오른다.
아랑 사형과 함께 연마해온 오의. 선명한 꽃이 피었다.
코끝을 가득 채우는 난초 향은 이전과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주변에 흩뿌려지는 것이 아니다. 알베르트의 제어에 들어온 꽃잎은 그의 발걸음을 따라 피어났다.
단 한 명을 위해 피어난 꽃잎은 화려하게 졌다.
흩날리는 꽃잎을 앞에 둔 채, 유그피르의 검이 움직였다.
검의 잔상이 퍼진다.
구름이 생겨나듯 일렁거린 잔상은 이윽고 실체화했다.
금빛의 검.
검성의 주변에서 떠오른 비검(飛劍)은 꽃잎을 노리고 쏘아졌다. 피어난 열 송이의 꽃이 검에 꿰뚫렸다. 꽃잎이 진다. 허무하게 떨어진 꽃과 달리 비검은 살아 있다.
표적이 바뀐다. 허공에서 방향을 전환한 비검이 알베르트를 보았다.
흉악한 어금니가 드러났다. 그 배후를 노리고 떨어진다.
알베르트는 반응할 수 없다. 월아는 유그피르의 검과 겨루고 있다. 뒤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비검은 괜찮다.
월아가 나설 필요는 없다.
꽃이 져야만 비로소 열매가 맺히는 법이다.
천마신공 오의
린화(燐花)
떨어진 꽃잎이 응축된다. 그 끝에서 결실을 거둔 검붉은 환(丸)이 비검을 향해 떠올랐다.
둥근 환과 비검이 충돌한다. 비검은 알베르트의 등을 앞에 둔 채 멈췄다. 흩어진 꽃잎들이 환으로 피어난다. 그 수는 비검을 압도했다. 검을 든 이후 처음으로, 검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환을 본 그는 거리를 벌렸다.
응축된 꽃잎. 하나의 환. 월아의 끝이 검성을 겨누었다.
린화 사출(射出)
환이 쏘아진다.
유그피르의 검이 검막을 펼쳐낸다. 검막과 부딪친 환이 터졌다.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따라오는 것은 그저 충격. 지척에서 폭발한 환 때문에 검성의 시야가 흔들렸다. 린화의 폭발에 휩싸인 그는 몸을 뒤로 물렀다. 린화를 막은 유그피르의 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성이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알베르트는 행동을 재개했다.
이제는 익숙한 방법이다. 진각의 묘용을 담아 발을 굴린다. 알베르트의 행동을 예측한 검성은 지면에서 뛰었다. 그러나 노림수가 다르다. 진각의 충격을 반대로 이용한다. 발진한다. 일순간 얻은 추진력은 폭발에 가깝다. 알베르트 본인조차도 몸의 움직임에 사고한다면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까 예지한다. 몸이 떨어지는 자리를 계산해 다음 동작을 그린다.
알베르트가 당도한 곳은 검성의 앞.
유그피르의 검이 올라오는 것보다 먼저 마기를 담아 땅을 짓밟았다.
깨졌다. 한계 이상으로 응축된 마기가 검성이 서 있는 대지를 무너뜨렸다. 균형이 무너진다. 월아를 앞으로 내뻗는다. 그 동작과 함께 작은 환이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검성도 그 움직임을 읽었다.
린화 연속사출(連續射出)
찌르고, 찌르고, 찔러넣었다.
폭발과 함께 알베르트의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계속해서 다룬 마기에 의한 반동인 걸까, 알베르트는 울컥하고 목 아래에서 치밀어오르는 걸 토해냈다. 붉은 피가 난장판이 된 무덤 바닥에 흩뿌려졌다. 입가를 닦은 알베르트는 시선을 들었다.
검성은 쓰러지지 않았다. 연기에 가린 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유그피르의 검이 사라졌다, 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 주먹이 보였다.
“-?!”
시야가 날아간다.
등에 달리는 충격에 호흡이 멎는다. 아픔은 두 번째다. 먼저 호흡을 되찾는다. 상황을 파악한다. 제자리를 되찾은 머릿속이 사고를 잇는다. 당했다. 검성은 이쪽의 환을 받아내고 반격을 가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온 거지? 반사적으로 월아를 내민 것이 천만 중 다행이었다. 검성의 공격을 최대한 상쇄시켜준 것이 틀림없다.
입가에 고인 피를 다시 뱉어냈다. 내준 곳이 어딘가를 확인한다.
나간 것은 갈비뼈다. 늑골 부분에서 심한 통증이 올라왔다. 적어도 두세 개. 이걸로 끝난 게 다행이다. 잘못했으면 그대로 즉사에 이르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베르트는 자세를 다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검성은 의복 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검성과 붉은 피로 범벅이 된 알베르트.
이 격차는 전력을 다한다고 해서 좁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타오르는 것은 머리만이 아니다.
눈에 비친 검성의 모습이 붉은빛으로 물든 것은 알베르트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건 이미 코안이 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튀고 뛰어오르는 마기가 알베르트의 몸 안을 차곡차곡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알베르트는 멈추지 않는다. 검성을 향해 쇄도한다.
검 끝이 무뎌져서는 안 된다.
틈을 보이는 순간 당하는 건 이쪽이다.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솔직한 공격. 피해냈다. 월아를 쥔 손이 뱀처럼 움직인다.
검성은 종회무진 닥쳐오는 검을 물이 흐르는 것처럼 피했다. 다가갈 수 없다.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월아가 닿을 것 같은데, 그 안쪽에서 흐르는 물길은 다가오는 모든 걸 집어삼키는 격류였다.
시야를 교란할 목적으로 린화를 사출한다.
얼굴 지척에서 터져나간 환은 알베르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눈앞에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타오르는 머리카락이 땅으로 떨어졌다. 후두둑 떨어진 머리카락은 땅에 닿기 무섭게 증발했다. 안에 담긴 마기가 알베르트의 제어에서 벗어나자마자 신체를 불태웠다.
공방은 계속된다.
공격의 끈을 놓지 않는 건 알베르트지만, 그의 손이 검성에게 닿는 일은 없다. 모두 방어하는 팔 위로 떨어질 뿐이다. 뚫을 수가 없다. 틈틈이 박아 넣는 린화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검성은 부담 없이 알베르트의 공격을 넘기고 있었다.
이래서야 끝이 없다. 알베르트는 환을 쌓기 시작했다. 시야가 흔들린다.
자연스레 공격의 주도권이 검성에게 넘어갔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게 벅차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버틸 수 있다. 알베르트는 자기에게 들려주듯이 말했다.
한계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마기가 들끓는다. 광기까지는 앞으로 한 발자국이라는 듯 알베르트의 제어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유그피르의 검을 받아낸 팔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출혈이다. 피가 많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 피해도 피해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맞붙을 수도 없다. 알베르트는 환을 모으는 걸 그만두었다. 이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다.
근접전을 벌이며 모은 환의 수는 세 개. 알베르트는 월아를 들었다.
주변을 떠돌던 환이 월아에 깃든다. 불길한 빛이 감돈다. 검은색으로 물든 월아를 쥔 알베르트는 검성을 보았다. 넘볼 수 없는 어깨 위로 4자루의 비검이 떠 올랐다. 빙글, 하고 황금빛의 검이 알베르트를 겨누었다.
어떤 전조도 없이, 비검이 쏘아졌다.
다가오는 검을 보며 알베르트는 월아를 내렸다.
막을 수는 없다. 간신히 모은 환을 잃을 수는 없다.
풍도신보를 극한까지 운용한다. 빛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바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라. 활로를 찾아라. 생문은 있다. 단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류가 찢어진다. 대기가 지르는 비명에 반응해 발을 움직인다.
일검(一劍).
왼쪽 손이 꿰뚫렸다. 읽어내는 감각도, 따라가는 동작도 너무 늦다. 남은 기운을 모두 쥐어짠다.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하기 전에 나아간다.
이검(二劍). 삼검(三劍).
간신히 반응했다.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다. 볼이 찢겨나간다. 귀가 당한 걸까.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한 이명이 울렸다. 남은 거리는 다섯 걸음. 목표는 그 앞에 있었다.
사검(四劍)
회피할 길은 없다. 각오를 다진다. 너덜너덜한 왼손을 쥔다. 그 위에는 희끄무레한 강기밖에 잡히지 않는다. 타오르는 금빛의 비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비검과 왼손이 교차한다.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형체를 가진 무언가가 왼쪽에서 떨어졌다. 비명을 억누른 알베르트는 검성을 향해 월아를 들었다.
천마신공 오의
천마역천참(天魔逆天斬)
유그피르의 검과 월아가 충돌했다.
불길한 빛에 먹혀버린 월아의 참격은 유그피르의 검을 먹어치웠다.
쾅, 하고 폭발을 견디지 못한 알베르트의 몸이 우스꽝스럽게 날아갔다.
두세 바퀴 뒹군 그는 꼴사납게 무덤 한쪽에 처박혔다. 귀에서 이명이 울린다. 일순간 의식이 끊겼던 건지도 모른다. 월아가 떨어진 소리에 반응한 그는 두 눈을 떴다. 커다란 구덩이가 보였다. 조금 전 월아와 유그피르의 검이 부딪친 그 장소다.
구덩이 안에는 유그피르의 검을 든 검성이 있었다.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그는 상처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군. 그대는 정말로 그 친구가 아니었군.”
유그피르의 검신에는 균열이 생겨있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검. 라시엘 공작이 들고 있던 검과 같지만, 이 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마치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명검의 수명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훌륭한 한 수였다, 계승자.”
알베르트의 머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작열하던 머리카락이 꺼지고, 피투성이가 된 알베르트는 오른손을 들었다. 예를 갖추려던 그는 왼팔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입이 떨리는 목소리를 자아냈다.
“루드비히 가문의 집사장, 알베르트 라나. 초대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런가. 꽤 즐거웠다네. 이 늙은이의 고집에 어울려줘서 고맙네. 이제 앞으로 가게나. 계승자여. 자네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네.”
검성은 유그피르의 검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맞닿은 검신이 부서져 내렸다.
쓸쓸히 남은 칼자루와 함께 왕좌 뒤에 있던 몽환기가 부서졌다.
저택의 벽면에 금이 생겨났다.
균열이 늘어난다. 삽시간에 수를 늘린 빗금은 저택의 광경과 함께 깨져나갔다.
샹들리에가 달린 천장이.
바닥을 굴러다니던 풀 플레이트 메일이.
거치대 위의 예식용 검이.
블라드 루드비히를 그린 초상화가.
마지막으로 왕좌에 떠오른 금은 거울처럼 깨져나갔다.
세상이 부서진다. 무너져내린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악몽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알베르트는 눈을 떴다.
저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의자를 보고 있었다. 낡은 의자에는 썩은 백골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모르겠다. 극심한 탈력감만이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검성은? 조금 전 나눈 일전은 뭐였지? 단순히 환상을 본 건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환상을 보고 있었던 거지?
몽환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루는 마도구.
유피가 무언가 말했던 것 같다. 몽환기를 뛰어난 술사가 다룬다면, 환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환상이 되는 마법을 다룰 수 있다고. 실허의 환상. 조금 전 자신이 본 건 극한에 이른 환상이었던 걸까.
생각이 많다.
머리가 빙글 도는 느낌에 알베르트는 양손을 들었다. 양손? 왼손이 멀쩡히 붙어 있다. 핏자국도 보이지 않고, 피곤한 느낌을 제외하면 몸 상태는 멀쩡했다. 그러나 양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의 경험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주인의 상태가 염려되는 걸까. 허리춤의 월아가 애처로운 검명을 냈다.
아니다. 환상 같은 게 아니다.
그건 단순히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와 검을 나눈 검성은 분명 이곳에 실재하고 있었다. 백골 앞의 탁상을 짚은 그는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로서는 답을 낼 수 없다. 생각은 이후에. 몸 상태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다. 호흡을 갈무리한다. 몸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다. 열병에 걸린 것처럼 오한이 느껴진다. 마법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느낌이다.
조심스레 방 안을 살펴본다.
환상이 깨져나간 방은 특별한 물건이 없었다. 알베르트가 짚고 있는 작은 탁상과 백골이 앉은 의자. 무언가 단서가 될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알베르트는 중얼거렸다. 혹시 검성이 말한 길은 문밖에 있는 걸까?
백골이 손을 들었다.
그는 탁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끝으로 한 줄기의 빛이 떨어졌다.
빛과 마주한 알베르트는 눈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면 탁상으로 빛이 들어오는 구조였던 걸까. 탁상을 짚은 알베르트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빛은 그의 얼굴을 지나 탁상으로 떨어졌다.
무언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빛과 맞닿은 탁상에서 낡은 물건이 투영되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오래된 천칭 저울.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부서질 것 같은 저울이 탁상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