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용의 무덤(1) (128/200)

 # 128

용의 무덤(1)

새하얀 눈 자락으로 덮인 설원에 발을 내디딘다.

알베르트는 눈 앞에 펼쳐진 유적지를 보고 숨을 삼켰다. 검은 바다의 앞에 자리 잡은 무덤은 엄청난 크기였다. 반쯤 부서진 기둥과 무너진 조각상. 녹아내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유적지는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이 지은 건물이 아니다.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예술품을 보는 것 같다. 반파된 유적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위압되는 느낌이었다.

대륙 내에서도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가 만든 건물임이 틀림없다. 땅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유적지의 잔재 하나하나가 섬세한 손길로 가득했다. 하지만 알베르트가 정말로 놀란 것은 무덤 때문이 아니었다.

알베르트는 유적지로 다가가는 아랑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원의 끝,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는 낯익은 모습의 선박이 좌초되어 있었다. 부러진 깃발을 장식한 문양은 루미에르 교의 상징인 로사리오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바닷가로 밀려온 잔해들은 얼마나 많은 병선이 여로에 올랐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제국의 병선이 왜 이곳에 있을까. 항구도시 비올라에서 떠난 병선들이 향하는 곳은 한 군데뿐이다.

죽음의 바다를 넘어가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한 이는 없었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백골을 본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요, 란? 용의 무덤은 저쪽이에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어.”

제국이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다는 서쪽 해로. 죽음의 바다를 건너면 나온다는 전설적인 장소. 드래곤의 섬은, 이들이 말하는 용의 무덤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끝을 보는 건 처음인가 보군.”

곁에 다가온 알베르트를 본 아랑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안개가 가득한 검은 바다. 유적지 위쪽에 드리워진 안개가 세상의 끝이었다.

“그렇습니다.”

제국에서 말하는 죽음의 바다가 세상의 끝일 거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의 끝에 관한 아랑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시공간이 비틀어진 장소. 세상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공간. 유피도 말했다. 침식이 시작된 그곳은 지옥의 환경을 닮아가고 있다고. 제국의 병선들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단지, 바다의 기후가 문제였던 게 아니다. 그들의 여로는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마, 너무 접근하지는 마라. 영향권에 말려들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말이다. 무덤이 세상의 끝에 들어간 거로는 보이지 않는구만. 후딱 들어가서 약초를 캐고 돌아온다.”

“사룡초는 특이하게도 검은빛을 띤 약초에요. 몸통과 뿌리 부분은 검은색. 꽃은 하얀색인데, 신비한 냄새를 흩뿌리는 게 특징이에요. 만약 유적지 안쪽에 자생하고 있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용이 흘린 잔재에서밖에 발견되지 않으니까. 구분이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입구부터 살펴보는 게다. 하나하나 천천히. 알겠나?”

마차를 세워놓은 세 사람은 유적지로 다가갔다.

유적지의 입구에는 두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좌측에 있는 것은 제국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조각상이었다. 훼손 상태가 심하다. 머리 위를 가리고 있을 투구는 보이지도 않고, 허리춤으로 옮긴 손은 손가락이 닳아 없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 정도인데, 중간 마디가 날아가 버린 검은 본래 어떤 검이었는지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우측에 있는 조각상은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사보다 훨씬 키가 작다. 머리가 날아간 무인의 조각상은 손조차 없었다. 원형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흥미가 동한다는 듯 조각상을 살펴보던 아랑도,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유적지 내부는 알록달록한 빛이 가득했다.

천연 빛을 내는 광석이 천장과 벽,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원래는 벽화를 장식하고 있었을 광석일까. 군데군데 떨어진 돌들은 마치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월궁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물속에 떠올라있던 은빛의 달. 이곳에는 지워진 벽화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예쁘다.”

“기념으로 몇 개 챙겨둬라. 아란이두 좋아할 기다.”

아랑은 딸아이를 향해 광석을 던졌다.

제법 모양새가 예쁜 돌이다. 붉은빛의 돌을 받은 란랑의 두 눈이 어린애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또 괜찮은 광석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피에게 줄 생각으로 알베르트도 빛깔이 좋은 광석 몇 개를 챙겼다.

벽화 뒤쪽으로는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좌측과 우측 통로.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어디를 먼저 가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알베르트의 뒤로 아랑이 다가왔다.

“사제는 왼쪽으로 가래이. 내는 우리 공주님하고 오른쪽으로 가지.”

“난 란이랑 갈 거야. 아빠는 강하니까 혼자 가.”

“…….”

딸아이의 매정한 대답에 아랑의 얼굴이 울적해졌다.

“알았데이. 무슨 일이 생기믄 연락해라.”

그래도 딸아이의 의견을 존중한다.

아랑은 한 발자국 나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통로 안쪽을 걷고 있었다. 축지(縮地)에 가까운 그 움직임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 아마 빠르게 돌아본 뒤 돌아올 생각인 것 같다.

알베르트는 란랑과 함께 좌측 통로로 향했다.

유적지는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잘 보면 벽면 곳곳에 바닷물이 묻어 있었다. 염분이 담긴 물과 맞닿았기 때문일까. 온전한 물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곳곳에 녹슨 병장기와 장식물들이 가득했다. 이끼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잡초를 지나간다. 물끄러미 주변을 둘러보는 란랑은 가끔 약초로 보이는 풀을 꺾었다.

“여기 좀 와봐요, 란.”

안쪽을 둘러보던 란랑이 알베르트를 찾았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통로 한쪽에 뚫려 있는 그곳은 귀인이 머물던 방으로 보였다. 작은 탁상과 의자. 번질 대로 번진 초상화와 장작을 찾아볼 수 없는 벽난로. 침대의 반대편에는 예식용 검과 커다란 장롱이 있었다. 장롱의 위쪽에는 아기자기했을 터인 인형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레이스 자락이 가득했을 침대 근처에서 란랑은 초상화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 문양. 많이 본 것 같지 않아요?”

훼손된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군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에는 검을 닮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제국 유력 가문의 문양이야.”

“이런 외지에 제국의 문양이요? 캘러미티라면 모를까,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건 알베르트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발견한 문양은 루드비히 가문의 것이니까.

알베르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닳아 없어진 레이스 자락을 쓰다듬었다. 손안에서 부식된 천이 떨어져 내렸다.

「알.」

그리운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이 지금이라도 그곳에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침대 근처에는 란랑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조금 피곤한 걸지도 모른다.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통로를 따라 걸었다.

알베르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걸까. 란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로 끝에서 나온 방은 작은 정원이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연못과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들. 커다란 기둥은 나무를 연상케 했다. 그 앞쪽에 자리 잡은 것은 풀로 뒤덮인 테이블과 의자다. 티타임을 즐기기 위한 장소일까. 테이블 위에는 낡은 주전자와 찻잔이 있었다.

“유적지 안쪽에 정원이라니, 특이하네요.”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찻주전자는 해양 생물의 집이 된 것 같았다. 사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조심스럽게 찻주전자의 손잡이를 쓰다듬던 알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을 그는 부정했다. 하지만 연못 뒤쪽에 자리 잡은 창고와도 같은 건물은 본 알베르트는 천칭을 찾았다. 여기는 정원이 아니었다. 분명 후원이다.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는가?’

[…….]

‘천칭?’

[아, 마스터군요. 죄송합니다, 깜빡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자네가 잠도 자는가?’

천칭이 자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알베르트의 물음에 천칭은 천천히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대답해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여기는, 이상합니다. 제 존재 자체가 흐려지는 느낌입니다, 마스터.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의식을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자네에게 위험한 곳인가?’

[그런 게 아니라……. 시공간이 불안정한 장소여서 그렇습니다. 순환이 일그러지는 장소는 저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특히나 이곳은……. 이상합니다.]

‘음, 알았네. 여기서 나가면 다시 물어보겠네.’

[죄송합니다, 마스터.]

한쪽에 쭈그려 앉은 란랑은 이끼로 보이는 풀을 입에 물고 있었다.

녹즙이 입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녀는 퉤, 하고 즙을 뱉어냈다. 소매로 입가를 닦는 그녀의 손을 막는다. 알베르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을 받은 란랑은 고마워요, 하고 작게 속삭였다. 입가를 닦은 그녀는 녹즙이 묻은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인데요, 란.”

란랑의 어조는 조심스러웠다.

모자 옆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그녀는 물었다.

“황녀님의 곁에 있으면 뭔가 다른 게 보일까요?”

“…….”

그 물음에 알베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정원 앞쪽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기운을 느꼈다. 알베르트는 지팡이 검을 들었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낡은 무복 차림의 마족이었다. 망자가 된 것은 최근인지, 비교적 상태가 온전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사제?]

그도 느낀 것일까. 반대쪽 길을 탐색하고 있을 아랑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기전성(御氣傳聲). 기를 통해 목소리를 전달하는 전음(傳音)의 일종이다. 알베르트는 능숙하지는 않지만, 차분히 어기전성을 구사했다.

[망자가 나타났습니다.]

[별일 아니구마.]

[그렇습니다.]

이제 와서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망자와는 몇 번이고 부딪혔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검과 차림을 보았을 때 생전 무인으로 생각된다.

안타깝지만 망자가 되어버린 그를 구할 길은 없다. 무인이라면 무인에 걸맞은 끝을 선사하는 게 알베르트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다. 란랑이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망자는 검을 들었다. 도검은 제국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이 아니었다.

검신에 검기가 맺힌다.

자세를 바로잡은 망자는 알베르트를 향해 쇄도했다. 언데드로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움직임이 재빠르다. 경신법을 운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검 끝이 알베르트의 가슴을 노렸다. 한발 앞서 지팡이 검이 망자를 맞이했다.

망자의 검기가 화려하게 흩날렸다.

하얗게 피어난 검기는 마치 사람의 웃음을 연상케 했다. 아마도 망자의 장기인 초식이다.

매서운 기세를 앞에 두고도 알베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지팡이 검이 앞으로 나아간다. 검풍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안으로 태연히 들어간 알베르트는 망자의 목을 찔렀다.

웃음이 멈췄다.

눈을 어지럽히던 허초가 사라졌다. 망자의 검은 알베르트의 가슴을 앞에 둔 채 멈췄다.

검을 빼자 한 줄기의 피가 치솟았다.

부들거리며 쓰러진 망자의 몸에서 선홍색의 피가 흘러내렸다.

“이젠 제법이네요.”

“아직 멀었어. 이 정도로는 닿지 못해.”

검을 수납한 알베르트는 란랑을 보았다.

조금 전 받은 물음에 대해 답할 차례였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란랑 나름대로 무언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유피는 그런 여자니까.”

“여자, 인가요.”

“응, 남자는 아니잖아.”

“황녀님을 대놓고 여자라고 말하는 건 란밖에 없을 거예요.”

칭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란랑의 어조는 무언가 질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줄곧 고민하고 있던 답을 찾은 것 같다. 기분이 좋아졌다는 듯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정원을 지나자 유적지 안쪽은 검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더는 들어갈 공간이 없다. 사룡초는 고사하고 용종과 관련된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아랑 사형이 향한 길로 돌아가는 쪽이 좋을 것 같다. 몸을 돌리는 알베르트와 달리 란랑은 벽 틈에서 피어난 흑백의 꽃을 발견했다.

사룡초.

용종의 사체에서만 자란다는 전설적인 약초가 정말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뿌리 부분을 조심스레 솎아낸다. 톡, 하고 약초를 꺾은 란랑은 알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찾았어요, 란! 정말로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 정도면 충분…….”

란랑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유적지 내에서 일어날 리 없는 바람이 몰아쳤다. 검은 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그것은, 천천히 눈을 떴다. 황금빛의 사안(蛇眼)에 란랑의 모습이 담겼다. 모습을 드러낸 그것과 마주한 소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욕심 끝에 무너진 어리석은 종족이, 또 찾아왔는가.』

란랑은 자신이 벽틈으로 생각했던 것이 뿔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커다란 뿔은 뭉툭하게 끊어져 있었다. 몸 전체를 덮은 검은 비늘은 상처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 비늘이 가지는 단단함마저 앗아간 건 아니다. 매서운 입안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단순히 그것이 움직였을 뿐인데, 유적지 전체가 흔들렸다. 먼지와 함께 천장 위에 붙어 있던 광석들이 떨어져 내렸다. 알록달록한 색이 빛난다. 유적지 입구에 있던 광석들이 왜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건지, 란랑은 간신히 깨달았다.

그녀의 앞에서 두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이 대륙에서 맥이 끊겼다는 용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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