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란랑(欒狼)(3)
길었던 환영식이 끝나간다.
음식을 간신히 먹어치운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권하는 아이락(馬乳酒)이라는 술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맛이었다. 속이 느글거리는 것이 한 번 게워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더 먹으라고 권하는 검은 돌 부족의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그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접해준 음식을 앞에서 토해낼 수는 없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마을 외곽으로 향하는 그의 시선에 아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얼 하고 있는가 싶어 다가 가보니, 아랑은 천막 안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오는 알베르트를 본 그는 썩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피곤하던 머릿속이 단번에 차가워졌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아랑 사형.”
“목소리를 낮추래이.”
그답지 않게 긴장한 목소리였다.
천막 안쪽을 확인하라는 듯 그는 눈짓을 보냈다. 부족민들이 숨겨놓은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천막 안쪽을 확인했다.
천막의 내부는 생각보다 넓은 편에 속했다.
괴로운 신음이 가득한 그곳은 환자들이 가득했다. 임시로 만든 구호소로 보인다. 뼈가 부러지거나 하얀 천으로 몸의 특정 부분을 감싼 이들이 누워 있다. 알베르트의 권격에 휘말린 이들도 있다. 의식이 없는 그들 사이에서 한 소녀가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란랑이다.
환영식에서 빠져나가는 걸 봤는데, 여기에 와 있었던 모양이다. 마차에 있던 약초를 가져온 그녀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야만인들이라고 별로 탐탁지 않아 했던 것과는 별개로, 소녀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처를 확인하고 약초를 처방한다.
썩어들어가는 상처 부분을 절개하고, 능숙하게 봉합을 마친다. 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상관없다. 그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떠올라있었다. 즐거워서 멈출 수가 없다는 듯. 그녀는 치료라는 행위에 심취해 있었다.
상처와 약초가 맞닿을 때마다 환자는 신음을 흘렸다.
그때마다 란랑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썩어들어가는 상처 부분에 집착하고 있었다.
불쌍한 환자가 지르는 신음은 이제 거의 비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란랑은 멈추지 않는다. 괴로워하는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그것은 환자가 느끼는 통증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소녀는 환자의 아픔을 즐기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알베르트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아랑을 보았다.
“내 말하지 않았나. 치우 일족은 모두 어딘가 미쳐 있다고. 그건 우리 공주님도 마찬가지야.”
살점과 함께 피와 고름이 떨어졌다.
편안해지는 환자의 얼굴을 본 란랑은 땀을 닦았다. 치료를 마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다른 환자를 보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녀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
열락에 취해 있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마차 위에 앉은 알베르트는 홀로 백주를 들고 있었다.
안주는 없다. 아랑 사형이 그랬듯이, 그도 달을 벗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호를 그리며 떨어지는 별무리가 마치 누군가의 머리카락 같다. 이 자리에 없는 여인이 떠오른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연심에 출구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리움을 달래듯이 알베르트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부녀는 마차 안에서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모르겠다. 부녀의 대화를 엿듣는 취미는 없었다. 란랑이 먼저 이야기하면 모를까, 굳이 먼저 나설만한 일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적어도 알베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술이 거의 비어갈 무렵 낯익은 소녀가 마차 위로 올라왔다. 어렵사리 올린 손에 든 것은 술이다. 아이락은 아니다. 챙겨온 백주다. 시선이 마주친다. 란랑은 휙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올라온 그녀는 알베르트의 뒤에 앉았다. 알베르트의 등을 마주 대고 앉은 그녀는 백주를 들었다.
생각보다 눈치가 있는 아가씨다.
알베르트가 잔을 들자 그녀는 술을 따랐다. 백주를 받아든 알베르트는 그녀의 잔을 채웠다.
아직 성인도 아닌 란랑이 술을 마시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무엇보다 마차 안에서 귀를 기울이는 그녀의 아버지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알베르트가 할 말은 없었다.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깔끔하게 마신 알베르트와 달리 란랑은 기침을 토해냈다. 모르긴 몰라도 오만상을 쓰고 있겠지. 백주는 꽤 도수가 높은 술이니까. 잔을 깨끗하게 비운 그녀는 다시 잔을 들었다.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시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란랑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할거에요?”
“외간 남자인 내가 꺼낼 말은 없어.”
그녀의 말을 빌려 이야기한다.
두 부녀의 일이다. 치우 일족의 일에 알베르트가 참견할 건덕지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싫어요.”
“그런 것 같아.”
“그래도 밉지는 않아요.”
“가족이란 게 그렇지.”
알베르트의 가족은 루드비히 저택의 사용인들이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알베르트도 항상 그들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가는 이상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종종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있었고, 진심으로 화를 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기쁜 일이 있을 때면 같이 웃고, 슬픈 일이 있을 때면 같이 울었다.
그게 가족이라는 것이다.
“알베르트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너도 만만치 않아.”
“전 그래도 정상이에요.”
“원래 이상한 놈은 자각이 없는 법이야.”
푹, 하고 란랑의 팔꿈치가 알베르트의 등을 찔렀다. 조용히 하라는 것 같다.
술잔이 차오른다.
속이 뜨겁다. 술이 좀 늘긴 했지만, 이 이상 마시면 과음이다. 여기서 끊는 게 좋겠다. 잔을 내려놓는 알베르트의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마차 위에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저도 없고, 알베르트도 없어요. 있는 건 달님뿐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 나와도 달님만이 들을 거예요.”
깊게 한숨을 쉰 소녀는 입을 열었다.
“치우 란랑이라는 소녀는 말이에요. 항상 혼자였어요. 동포들에게 신의로 칭송받는 어머니는 마계 전역을 여행하고 다녔고, 역사학자인 아버지는 한시도 집에 있길 싫어하는 방랑벽이 있었죠. 아무도 없는 집. 홀로 지내는 것이 당연한 풍경. 소녀만 있는 집은 말이죠. 항상 한기가 가득했어요.”
어렸을 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하다는 게 무엇인지 몰랐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집구석에 혼자 있는 란랑은 외롭지 않았다. 집 안에는 책은 물론이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약초들이 가득했다. 갖고 놀 것이 없었던 란랑은 그 모든 걸 접하며 성장했다. 약초와 의학을 배우면 배울수록, 가끔 돌아오는 어머니가 기뻐했으니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열심히 배웠다.
그렇게 혼자서 집을 보고 있으면 밤늦게 아버지가 돌아온다.
혀 짧은소리를 내며 아버지를 반기면,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았다. 단지 인사가 오갈 뿐인 관계. 씻고 난 후 아버지는 마루에서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이 란랑은 싫었다. 술을 마실 때면 아버지가 더없이 멀게 느껴졌다.
그 사람은 아버지로는 최악이었다.
소녀가 10살이 되던 해까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이죠. 소녀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답니다.”
몸이 이상했다.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정상이 아니었다.
어떤 약초를 먹어도 효과가 듣질 않는다.
어떤 책을 읽어도 이런 병세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어머니는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버지뿐.
그러나 딸아이의 상태를 보고도 아버지는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쓰러진 란랑을 안고 아버지는 밖으로 나왔다.
처음으로 나가보는 집 밖.
그것이 어린 딸아이가 얼마나 기대했던 일인지, 아버지는 몰랐다.
그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런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왔던 사람이니까.
세상으로 나온 란랑을 맞이한 것은 책 속의 이야기와는 너무나 다른 곳이었다.
그림에서 꺼내온 것 같은 마을도.
즐겁게 반겨주는 사람들도.
신기한 것으로 가득한 노점상도.
맛있는 거로 가득한 객잔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피 냄새가 가득한 그곳은, 전쟁터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약탈하고, 사람이 사람을 빼앗는 전쟁터로.
병장기 소리가 울리고, 콧속을 가득 채우는 피 냄새. 눈앞에서 생명이 꺼져간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말했다.
『마, 우리 공주님은 무엇이 느껴지나?』
“…….”
란랑은 눈을 감았다.
정말 최악인 남자다. 아버지라고는 부르고 싶지 않다. 그건 눈 앞에 펼쳐진 전쟁터를 보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의 목숨이 꺼져가는 광경을 보고, 소녀는 자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눈에 비쳤던 치우 란랑은 즐겁게 웃고 있었으니까.
더는 몸을 가득 채우던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소녀는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호신술 이상으로는 가르쳐주지 않았죠. 당연했어요. 그저 마음이 채워가는 대로 손을 움직일 뿐인 아이에게 검을 쥐여줄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딸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래, 모를 리가 없었다. 치우의 피가 흐르는 이상, 그 갈증과 허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몰라요. 아침에는 의학을 배우고, 열심히 약을 만드는 아이가. 밤만 되면 몰래 외출한다는 걸 말이죠.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어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니까요.”
강자를 찾으러 마계 전역을 떠도는 사냥꾼.
사냥꾼의 딸은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귀신이었다.
깨닫고 보니, 소녀는 멈출 수 없었다.
남이 괴로워할 때면 아픔이 사라져가는 희열이 느껴졌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배덕감은 소녀의 행위를 더 불타오르게 했다.
거부할 수 없다.
시간이 날 때면 낙양의 옥에 찾아가 고문받는 범죄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그녀의 일상이다.
치우 란랑의 몸에 흐르는 피는 명실상부한 귀신의 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소녀는 알베르트의 등에 자신의 몸을 기댔다.
“알아요. 저도 제가 이상하다는 것은. 죽이고, 괴로워하는 걸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니. 이런 건 평범하지 않잖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머리가 돌아버린 소녀라도.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미쳤다고 해서, 다른 감정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니까요. 외로움도. 슬픔도. 아픔도. 다른 사람처럼 전부 똑같이 느끼니까.”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눈물을 삼킨 란랑은 물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해요. 이것이 우리 일족의 숙명이라고요. 하지만 전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어보고 싶어요, 알베르트. 당신은 외인(外人)이잖아요. 제가 만약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요?”
“…….”
소녀의 물음에 알베르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별무리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해진 대답은 어디에도 없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와 같다.
도착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그 앞에 어떤 섬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육지에 도착한다 한들, 잠시 선박을 댈 뿐인 경유지가 될 수도 있다. 종착점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정처 없이 흘러가는 바다 위에서 끝날지도 모른다.
“그건 누가 정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치우 란랑. 다들 똑같아. 인족도. 캘러미티도. 마족도. 모두 답을 찾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서.
알베르트도 마찬가지다. 지난 삶에서 걸어갔던 길 또한 그가 밟았던 인생이다. 그 끝에 아가씨는 죽고, 유피도 죽었다. 제국은 패배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그 길을 부정할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만 남았을 뿐이더라도. 지금의 그를 만든 길이니까. 그 결과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길을 걸어가도. 마지막에는 후회가 남기 마련이니까.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어. 그저 인생의 끝에 섰을 때, 그나마 후회를 적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갈 뿐이지.”
조금이라도 후회를 줄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은 게 아닐까.
이야기를 마친 알베르트는 란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란랑이 물었다.
“알베르트가 황녀님의 곁에 있는 건, 그런 이유에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바보네요. 결국, 당신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잖아요.”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정답은 언제든지 바뀌는 거니까. 아랑 사형도. 아란 씨도. 그리고 너도. 나는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해.”
등에 작은 아픔이 달렸다.
란랑이 손바닥으로 알베르트의 등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연이어서 때린다.
“뭘 아는 척 말하는 거예요. 자기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말로 재수 없어.”
집사는 짧게 웃었다. 소녀의 목소리는 더는 젖어 있지 않았다.
*&*
이른 아침 알베르트는 마차의 짐을 확인하고 있었다.
검은 돌 부족이 챙겨준 물건을 하나하나 분류한다. 남은 양고기나 탕은 그럭저럭 괜찮지만, 아이락은 아니다. 속이 느글거리는 술은 그들의 손에 돌려준다. 굳이 고통을 자처할 이유는 없었다.
길었던 여로도 이제 끝이 보였다.
돌올이 말하기를, 용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유적지가 지척에 있다는 모양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유적지는 말을 타고 가면 일주일 내로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간밤에 백주를 마신 란랑은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기 안쓰럽다. 아랑이 건네준 찻잔을 받은 그녀는 억지로 차를 삼키고 있었다. 욱, 하고 헛구역질을 반복하는 소녀의 얼굴은 남에게 보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떠날 준비를 하는 마차를 향해 돌올과 부족민들이 다가왔다.
양손에 이런저런 물건을 든 그들은 혹여라도 늦을까 봐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다음에 또 방문해라, 난초. 우리 검은 돌 부족은 당신을 환영한다.”
“그러지, 기회가 된다면 말이야.”
돌올의 말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와 인사를 마친 그는 란랑을 보았다.
“그리고 그쪽의 아가씨.”
“?”
란랑은 입가를 가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을 열면 안쪽에 있는 것이 쏟아질 것 같았다. 숙취에 시달리는 소녀를 보며 돌올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검은 돌 부족의 족장 돌올이 작은 소녀에게 감사를 표한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우리 부족인들, 많이 죽었을 것이다. 고맙다.”
“고맙다, 아가씨. 내 아내 살아 있다.”
“다음에 또 방문해라. 맛있는 거 많이 대접해준다.”
부족민들이 란랑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각자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전통 물건들이 그녀의 손에 안겼다. 옷가지, 장식물, 장난감. 순식간에 쌓여가는 선물에 란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고맙다, 아가씨.”
“또 놀러 와라.”
대답을 기다리는 부족민들을 보며 란랑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그녀는 볼멘 목소리를 냈다.
“몰라요. 또 놀러 올까 보냐.”
부끄러워하는 란랑의 목소리에 부족민들은 방긋 웃었다.
경이 흉과 요를 이끌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다시 놀러 오라는 부족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마차는 산길을 나아갔다.
“부탁해, 아빠.”
“하모, 알았데이.”
란랑은 자신이 받은 물건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랑은 잡동사니 같은 물건을 들고 마차 안쪽으로 들어갔다. 란랑의 손에 남은 물건은 수작업으로 자수를 넣은 하얀 모자만이 남았다. 손재주가 뛰어난 재단사가 만들었는지, 용 모양의 그림이 그려진 자수는 무척이나 섬세했다. 용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모자를 란랑은 가만히 응시했다.
“그건 마음에 들어?”
“북쪽으로 올라가면 계속 추워지니까요. 따뜻한 옷가지는 쓸 데가 많아요. 그리고…….”
모자를 매만지던 란랑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알베르트는 처음 보는, 마치 그 나이 때의 소녀가 지을 것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조금 어머니의 심정을 알 것 같아요, 란.”
“란?”
알베르트는 무심코 반문했다.
자신이 말하고도 조금 놀란 듯, 란랑은 고개를 휙 돌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알베르트에게 물었다.
“왜요? 어머니도 이렇게 부르잖아요. 안 돼요?”
“…….”
하얀 모자 때문일까, 붉게 달아오른 소녀의 얼굴은 알베르트의 눈을 사로잡았다. 천칭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란랑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아가씨를 떠올리게 했다.
“상관없어, 란랑.”
“흥.”
철없던 꼬마 아가씨와의 거리가 조금 좁혀진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