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란랑(欒狼)(2) (125/200)

 # 125

란랑(欒狼)(2)

알베르트는 캘러미티의 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촌락이었다. 특이한 돔 형태의 건물이 몇 개씩 붙어 있다. 그 주변에는 가죽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 알베르트는 처음으로 캘러미티를 보았다. 무성한 소문과 달리 외양은 인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이목구비도 제대로 붙어 있고, 손과 다리도 있다.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귀 끝이 뭉툭하다는 정도다.

다만, 피부색은 확연히 달랐다.

투명한 푸른빛으로 물든 피부는 마치 이곳에서 봤던 라미아와 같았다.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마족보다 약한 것 아닙니까?]

‘개개인의 무력은 그렇겠지. 하지만 캘러미티가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힘 때문이 아니네.’

야만인들은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챈드리 백작가를 보좌하는 로이나 집사한테서 들은 말이다.

가문 대대로 세인트 월을 지켜온 챈드리 변방백의 사용인들은, 수도에 내려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아, 물론이지. 북부의 야만인들은 끔찍한 이들이라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마족보다 기분 나쁜 녀석들이지. 오해하지는 말게. 수백 년 동안 마족의 침략을 막아온 루드비히 가문을 무시하는 게 아니야. 루드비히 가문이야말로 제국 최강의 검이지. 그 사실을 의심하는 제국인은 아무도 없네. 나는 마족과 야만인을 전부 봤네. 마족이 끔찍한 존재인 건 맞지만, 우리에게는 프랑소와 성녀님이 계시지 않나? 신성력만 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네. 반면, 야만인은 그렇지 않다네. 놈들이 모시는 신에 관한 믿음은 끔찍할 정도네. 방금 죽은 동족을 밟고, 신의 이름을 외치면서 벽을 오르는 그 집념은 말일세. 정말로 미친놈들이 따로 없다네.』

로이나 집사의 말이 사실인지, 오늘 알 수 있겠지.

알베르트는 캘러미티의 진지로 향했다.

진지 근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조형물들이 있었다. 돌과 뼈를 반 정도 섞은 석탑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석탑이다. 신당의 지하에서 본 조형물이다. 다만, 이곳의 석탑은 좀 더 투박했다. 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물의 뼈가 대부분이다. 마물의 살가죽을 벗겨서 만든 탑들이 입구로 이어지고 있었다.

란랑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숲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차를 떠올린 알베르트는 캘러미티와 접촉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캘러미티는 다가오는 외지인을 보고 창을 겨누었다.

“저, 적이다!”

어눌한 목소리가 자아낸 것은 마족의 언어였다.

마을 안쪽에서 캘러미티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각보다 무장이 변변찮다.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지, 그들이 걸친 옷은 갑옷이 아니다. 평상복처럼 보이는 가죽옷과 비단으로 짠 옷을 입은 이들도 있다. 무기들의 상태가 이상하다. 녹슨 검과 주변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이는 죽창. 탈영병 수준이 아니다.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그 모습은 민간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의 긴장한 기색이 그대로 전해졌다.

칼자루로 손을 옮기자, 일순간 몸을 떨었다.

[제 눈이 이상한 걸까요, 마스터. 어떻게 봐도 민간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나도 그렇다네.’

겁에 질린 캘러미티들의 눈을 본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칼자루에서 손을 뗀다. 아무래도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너희들을 이끄는 대장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대장? 마, 마족이 선우(單于)를 찾는 건가?”

“아니다. 마족이 족장을 찾는다. 족장을 죽이려는 거야!”

“…….”

뭔가 말을 잘못 꺼낸 걸까.

캘러미티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양 떼처럼 겁에 질렸던 이들이 알베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몸을 돌보지 않는 돌격. 훈련된 병사가 아니다. 맹수처럼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알베르트는 손을 들었다.

캘러미티는 빈틈투성이다. 내지르는 창. 피할 필요도 없다. 목표조차 제대로 겨누지 못한다. 스쳐 가는 녀석의 얼굴을 가격 한다. 온다. 검과 창. 가볍게 발을 구른다. 진각의 묘용을 담은 발이 땅을 울린다. 무너진다. 쓰러진 놈들의 가슴을 찬다. 발끝에 감각이 달리고, 무너지는 놈을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녹이 주먹에 묻어난다. 알베르트의 정권과 맞닿은 검신은 그대로 깨져나갔다. 멍하니 바라보는 놈의 얼굴을 후려친 알베르트는 발을 옮겼다.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도끼. 놈의 발을 밟는다. 녀석의 몸이 앞으로 꺾인다. 팔꿈치로 이마를 가격한다. 고개가 들린다. 드러난 목을 그대로 손날로 찌른다. 두 개의 창. 이쪽이 더 빠르다. 창의 몸통을 가른다. 배후를 잡는다. 몸을 수그린다. 그 위로 검이 휘둘러졌다. 당황할 필요 없다. 눈에 들어온 적의 무릎을 걷어찬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다리가 꺾인다. 떨어지는 놈의 상반신을 밟고 뛰어오른다. 위에서 내려다보자, 몰려든 캘러미티가 개미 떼 같다.

하늘로 뛴 알베르트를 향해 녀석들이 창을 들었다.

겁에 질렸지만 물러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는 끝이 없다. 알베르트의 주먹에 강기가 맺혔다. 시전하는 초식은 아랑 사형에게 배운 무공이다. 치우 일족에 전해지는 초식을 이 자리에서 재현한다.

내공이 신체를 가속한다.

무언가 위험한 게 온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캘러미티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피를 볼 이유는 없다. 앗아가는 건 녀석들의 전의다. 알베르트의 주먹이 땅에 떨어졌다.

심혼권(心魂拳) 오의

공파(空破)

귀가 떨어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알베르트가 떨어진 자리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마치 마법이 행해진 것 같다. 내지른 것이 아니다. 파괴했다는 말이 어울린다. 초식에 휘말린 대지는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위력은 뭘까. 주변을 둘러본 알베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것이 정말로 자신이 펼친 무공인가. 믿을 수 없는 위력이다. 무력시위를 위해 펼쳐낸 초식이긴 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파의 위력을 본 캘러미티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무너진 대지와 그 안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알베르트. 말도 안 되는 괴물을 봤다는 듯 그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공포다.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린 그들을 보며 알베르트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다른 병사들과는 다르다. 짐승의 이빨로 장식된 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단 남자는 상반신에 두꺼운 가죽옷을 두르고 있었다.

“검은 돌 부족의 족장 돌올(突兀)이다. 신의 축복을 받은 남자에게 묻고 싶다. 그대는 우리 부족의 손님으로 온 건가?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온 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손님으로 왔다는 말이군. 좋다. 그대의 이름을 묻고 싶다.”

“난초다.”

알베르트의 대답에 돌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돌 부족의 족장 돌올이, 부족의 손님이 되길 바라는 난초의 결투에 응한다.”

“결투?”

뜬금없는 소리에 알베르트는 반문했다.

돌올은 알베르트가 만든 구덩이로 내려왔다. 구덩이 주변으로 캘러미티들이 모였다. 자연스레 결투장이 완성된다. 얼굴을 찌푸린 그를 향해 돌올은 말을 이었다.

“신성한 결투다. 신께서 우리를 지켜본다. 손님이 되길 바란다면 난초는 전통에 따라 돌올을 쓰러뜨려라. 그것으로 자격을 증명할 수 있다.”

전통. 자격의 증명.

아무래도 결투는 캘러미티의 풍습인 것 같다. 구덩이 위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캘러미티들의 시선은 떨리고 있다. 창을 쥔 손이 하얗게 물든 걸 보니, 이미 이 결투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것 같다.

“결투라니, 진심인가? 자네는 날 이길 수 없네.”

“난초. 당신은 강하다. 우리 모두 안다. 그렇지만 당신이 우리 부족의 손님으로 왔다면. 결투를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전통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부족의 족장인 내가 할 일이다.”

건장한 근육이 꿈틀댄다.

주먹을 굳게 움켜쥔 돌올은 알베르트를 향해 뛰었다. 극한까지 단련된 신체다. 어느 정도 내공을 다루고 있는 건지, 그의 움직임은 알베르트의 생각보다 빨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우직하게 달려든 녀석의 머리를 알베르트의 손이 맞이했다.

손바닥과 부딪친 돌올은 그대로 넘어갔다. 등과 후두부가 땅과 부딪친다. 일순간 충격이 심했을 텐데도, 돌올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몸이 다시 일어난다. 아래가 비었다. 무방비한 다리를 노리고 알베르트의 몸이 들어간다.

복부, 팔꿈치를 찔러 넣는다. 발 안쪽을 그대로 무너뜨린다. 다시 돌올의 몸이 넘어간다. 그래도 의식이 붙어 있는 걸까. 두 눈을 깜박인 녀석은 손을 들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다. 정신력만이 아니다. 외공의 일종인 걸까. 좋다. 의지를 꺾을 수 없다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손목을 잡고, 떨어지는 팔목 안쪽으로 몸을 붙인다.

우드득, 하고 알베르트는 돌올의 오른팔을 부러뜨렸다.

“-!”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걸까.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버린 놈은 반대쪽 손을 들었다. 뻗어지는 놈의 주먹을 잡는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을 넣는다. 왼손이 그대로 박살 난다. 이만하면 패배를 인정할 것 같은데. 녀석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런 이빨이 알베르트의 손목을 노렸다.

빙글, 알베르트의 몸이 선회한다.

돌올의 뒤를 잡은 알베르트는 무릎 안쪽을 밟았다. 녀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내려앉는다. 그 목을 향해 알베르트는 손을 겨눴다. 이래도 승복하지 못한다면 의식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

“더 할 생각인가?”

“져, 졌다.”

돌올은 패배를 인정했다.

족장이 고개를 숙이자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캘러미티들이 웅성거렸다. “졌다.”“족장이 졌다!”“돌올이 졌어!”“검은 돌 부족의 패배다!” 그러나 충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 같다. 그들도 예상했던 결말이다. 소란이 가라앉는다. 시선을 든 알베르트를 본 캘러미티들은 엉거주춤 두 손을 모았다.

“난초는 검은 돌 부족의 손님이다. 손님은 환대해야 한다. 하마주(下馬酒)를 준비해라.”

“하마주다, 손님이 왔다!”

“하마주 의식을 준비해라! 양을 잡아라. 술을 가져와라. 성대한 환영식이다!”

소리를 지르는 캘러미티들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이곳을 그냥 지나가고 싶다만.”

“손님을 바로 보낼 수는 없다. 최소한 식사는 하고 가라. 검은 돌 부족의 위신을 걸고 완벽한 대접을 해주겠다.”

“…….”

뭔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다.

엉거주춤 일어난 돌올은 절뚝거리며 구덩이를 올라가고 있었다. 몇몇 캘러미티들이 알베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서 적의는 찾아볼 수 없다. 말문이 막힌 알베르트를 보며 그들은 제각각 목소리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당신, 강하다!”

“우리 부족. 강한 사람 좋다!”

“부족의 손님, 난초. 환영한다!”

“다른 부족에 자랑할 수 있다. 난초는 검은 돌 부족의 손님이다!”

혹시 그가 아는 야만인과 이들은 다른 게 아닐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스터?]

‘손님으로 맞이해준다면, 그래도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나.’

알베르트는 시골 사람들처럼 눈을 반짝이는 그들 사이에서 한숨을 쉬었다.

*&*

란랑은 자신의 앞에 준비된 요리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다 익지도 않은 양고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푸른 피부의 야만인들은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서 먹으라고 재촉해온다. 한 입 먹기도 버겁다. 비위가 상해서 먹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았다.

알베르트는 꾸역꾸역 양고기를 먹고 있다. 그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설익은 양고기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탕 위주로 먹고 있었다. 고기를 입안에 가져가고 탕을 마셔서 억지로 쑤셔 넣는 식이다. 그 모습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주변에 있는 야만인들이 호탕하게 웃고 있다.

얼굴조차 보기 싫은 아버지는 이 부족의 족장이라는 돌올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캘러미티의 역사에 대해서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것 같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 썩 괜찮은 대답이 돌아온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흥미가 생긴다는 듯 그는 끊임없이 돌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마을 중앙에 피운 불 주변에서 야만인들이 수상쩍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환영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건 그녀뿐인 것 같다. 기다란 뿔피리 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진다. 돌아가고 싶다. 기대했던 일도 보지 못했다.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란랑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이름을 지어준 세 마리의 마물과 노는 쪽이 건설적이다.

광장 한쪽에 세워놓은 마차로 향하던 란랑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돔 형태로 지은 캘러미티의 천막 안에서 무언가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마차와 천막을 번갈아 쳐다보던 란랑은 혀를 내밀었다.

묘한 열기가 가슴을 간질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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