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란랑(欒狼)(1)
검 끝이 빛난다.
알베르트와 검을 맞대고 있는 것은 이형의 마물이다. 하반신은 뱀, 상반신은 여성의 외형을 가진 라미아(Lamia)다. 북부의 기후에 맞게 적응한 것인지, 놈들의 피부는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날아드는 검 앞에서도 알베르트는 침착했다. 몸이 가볍다. 기민하게 꿈틀대는 라미아의 움직임은 무섭지만,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여로에 오른 뒤 몇 번이나 반복한 실전이다. 살아 있는 마물은 차라리 대처하기 쉬웠다.
리빙 아머(Living Armor) 같은 마물은 타격을 입혀도 반응을 확인할 수 없다. 녀석들은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저항을 반복했다. 반면, 라미아 같은 마물은 통증에 흔들렸다.
풍도신보의 묘리를 닮은 발이 우아하게 나아간다.
만곡도(蠻曲刀)가 춤춘다. 지팡이 검을 타고 들어온 곡도는 알베르트의 손목을 노렸다. 검신을 타고 올라오는 마수에서 벗어난다. 검에 붙은 곡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손목을 놓치자, 이번에는 손가락을 노린다. 칼자루까지 따라온 두 만곡도가 손가락으로 향했다.
목표를 앞에 둔 채, 라미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알베르트는 라미아의 안쪽에 파고들어 있었다. 무방비한 복부에 검을 찔러넣었다. 손끝에 달리는 감각을 느낄 시간은 없다. 내장을 뽑아낸다. 붉은 피가 흩날렸다. 쓰러지는 라미아의 몸을 밟고 알베르트가 뛰었다. 배후를 노리던 라미아가 일순간 사냥감의 모습을 놓친다. 녀석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라미아의 배후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검을 수납했다.
반듯한 균열이 라미아의 목에 떠올랐다. 선혈이 맺힌다. 똑,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라미아의 머리는 주인을 잃었다. 상황을 마무리 지은 알베르트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아랑 사형은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란랑이 있다.
마차를 노리고 있던 라미아는 아랑의 손에 당한 것인지, 마부석 근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란랑은 지팡이 끝으로 라미아를 건드리고 있었다. 발작과도 같은 비명이 났다. 란랑은 멈추지 않는다. 그 얼굴에서는 묘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차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불쌍한 녀석의 목을 수도로 잘라냈다.
소녀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아넘긴 그는 입을 열었다.
“마물이 늘었습니다. 길을 잘못 들린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마, 길이라면 제대로 가고 있다. 관에서 이런 외곽까지 정비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래이. 사제, 마계는 말이데이. 주요 성들을 제외하면 거의 무법지대에 가까운 상태야. 왜 동포들이 지 발을 냅두고 수로를 애용하는지 모르겠나? 그쪽 길이 그나마 안전하기 때문이야. 우리처럼 도보로 여행을 떠나는 이는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아버지랑 같은 인간으로 묶지 마.”
란랑은 기분 나쁜 목소리를 냈다.
“미안하데이, 우리 공주님. 아부지도 좋은 소리를 해주고 싶지만 말이다. 이제 더 한 게 나오기 시작할 게다. 외곽 지역은 세상의 끝과도 가까우니 말이다. 우리 고향에서나 나오던 것들이 슬슬 보이겠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길을 잃어버린 녀석들 말이다. 구천을 떠도는 망자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할 게다.”
“…….”
마족의 말로.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동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부와 상당히 가까워졌습니다. 망자뿐만 아니라 캘러미티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야만인들이라면 전선에서 몰아냈다고 했잖아요?”
“몰아냈다고 한들 캘러미티를 전부 격퇴한 건 아니야. 교전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탈영병들도 나왔을 거고, 국경에서 떠돌고 있을 녀석들도 많을 거야.”
“그러니까 더 우리 땅에 있을 이유가 없는 거 아니에요? 알베르트의 말대로 녀석들이 부대에서 빠져나왔다면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을 텐데. 그 상태로 어떻게…….”
란랑은 말꼬리를 흐렸다.
알아차린 것 같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부대에서 이탈한 병사가 고국으로 돌아간다 한들 좋은 꼴은 기다리지 않는다. 거기에 야만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먹을 걸 구하지 못해 약탈을 반복하는 놈들이다. 자연히 도출되는 답은 하나였다.
“최악이에요.”
“다른 길을 찾아보는 건 어떻습니까?”
“뭐꼬. 여기까지 와서 야만인 따위에게 겁을 먹은 긴가?”
“그게 아닙니다, 아랑 사형.”
알베르트는 란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분명 15살이라고 했던가. 아직 나이가 어린 그녀가 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다. 의술에 종사하는 건 관계없다. 피에 익숙한 것과 살인현장을 보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그 대상이 동포가 아닌 캘러미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캘러미티도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란랑이 가끔 보여주는 얼굴도 마음에 걸렸다.
아랑 사형이나 아란 씨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이 아이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피가 튀는 싸움을 굳이 보고 싶어라 하다니, 어떻게 생각해도 꽃다운 나이 때의 소녀가 할 생각은 아니다.
“마, 괜찮다. 사제가 위험하면 이 사형이 특별히 도와줄 수도 있다. 물론 구해준 이후에는 차라리 죽는 게 편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괴롭힐 때는 나도 불러줘.”
역시 이 부녀는 어딘가 이상했다.
정상인은 알베르트밖에 없는 모양이다.
[누가 누굴 보고 이상하다는 건지. 저 아이는 말입니다. 마스터가 그렇게 그리워하는 아리시엘 루드비히와 똑 닮아 있습니다.]
‘아가씨와 말인가?’
알베르트는 란랑을 보았다.
싸움을 기대하는 소녀의 모습은 어느 모로 봐도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긴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자각이 없는 겁니까? 마스터는 왜 저 아이를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군요.]
‘으음……. 조금 쉽게 말해줄 순 없겠나? 자네는 말은 너무 두리뭉실하게 하네.’
[됐습니다. 안 그래도 이쪽 공간은 저한테 피곤한 곳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시죠. 그 모순을 느낄 수 있다면 아리시엘 루드비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릴지도 모르죠.]
가시 돋친 천칭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유피가 보고 싶었다.
*&*
알베르트는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타닥타닥, 하고 작아지던 불씨가 다시금 넘실거렸다. 야영지를 덮고 있던 한기가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여름이라는 계절과는 달리, 산길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추웠다. 화마처럼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알베르트는 입김을 토해냈다.
곧 동이 틀 시간이다.
아직 주변은 어둡기 짝이 없지만, 해가 뜨면 어둠을 몰아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간밤을 보낸 야영지는 빈말로라도 좋은 잠자리는 아니었다. 짐승이나 마물이 나올 위험을 피하려고 산길에 자리를 잡은 탓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얇은 모포 한 장으로 이겨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불쏘시개로 모닥불의 불씨를 완전히 살려낸다.
장작을 양식 삼아 타오르는 불길에서 알베르트는 시선을 돌렸다. 주변 공기가 따뜻해지는 걸 느꼈는지, 꿈속에서 헤매고 있던 란랑이 조심스레 몸을 뒤척였다. 소녀의 기척이 달라진 걸 느낀 알베르트는 물을 준비했다. 불 위로 물을 올린다. 밤을 새우다시피한 알베르트와는 달리 란랑은 아침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자의 아침은 남자보다 바쁜 법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소녀라도 마찬가지다. 알베르트는 따뜻해진 물을 란랑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아랑 사형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명상을 취하고 있던 그는 지리를 확인하러 나갔다. 동이 트기 전까지는 온다고 했으니, 곧 돌아오지 않을까.
사형이 오기 전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자.
마차에서 가방을 찾은 알베르트는 아침을 준비했다.
먹음직스러운 수프의 냄새가 난 지 얼마나 흘렀을까? 란랑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베르트?”
“좋은 아침이네, 란랑.”
잠에 겨운 란랑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차분히 대답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란랑은 천천히 주변을 확인했다. 모닥불과 알베르트, 머리맡의 온수. 간단한 짐과 아침 식사를 본 그녀는 정신이 들었는지 온수를 끌어와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오늘도 부지런하네요.”
“눈이 일찍 뜨여서 말이지.”
알베르트는 세수를 끝마친 란랑의 앞으로 수프 그릇을 건넸다. 완성된 수프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수프를 한 수저 입에 머금은 란랑이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요리 하나는 정말 수준급이네요. 혹시 황녀님도 요리로 꼬신 거 아니에요?”
“음,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정하기 어렵다.
유피의 식도락을 떠올린 알베르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란랑은 말을 이었다.
“황녀님의 어디가 그리 좋은 거예요?”
“듣고 싶어?”
“아뇨. 실언이었어요.”
그래도 듣고 싶은 눈치로 보이는데.
차마 말은 못 하고 꼼지락거리는 란랑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아가씨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아가씨도 연애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다.
첫사랑을 하신 것도 꽤 이른 나이였지. 그의 기억이 맞다면 6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을 것이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아가씨가 한 남자에 관해서 물어본 것은. 저택 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남자였다. 검 실력은 물론이고 얼굴도 잘생긴 사람이었으니까. 그 남자가 지나가고 나면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꺅꺅거리는 소리가 많이 나왔었다.
로엔 발 나하드.
루드비히 가문이 자랑하는 사자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에일린 나이트워커의 연인. 요컨대 아가씨의 첫사랑은 실패했다. 애초에 나이도 맞지 않는다. 그냥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갖는 동경심과도 비슷한 거겠지. 로엔 경은 마치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기사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정말 서럽게 우셨지.
에일린도 좋고, 로엔도 좋으니까. 아가씨인 자기가 양보하겠다고.
둘의 사이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정말로 잘 됐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라셨다.
물론 현실은 반대였다. 싸늘하게 식은 두 사람의 사체를 아가씨가 보지 못하게 막은 일은, 알베르트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알베르트는 혹시 나이가 좀 있는 거 아니에요?”
“생각보다 어린 편이야.”
“거짓말이죠? 유피에르 황녀님보다 연상으로 보이는데, 최소 25살은 된 거 아니에요?”
“비슷하네. 하지만 유피가 나보다 연상이야.”
“으음…….”
란랑은 모르겠지.
지금 나이만 놓고 본다면 알베르트는 그녀와 비슷한 또래였다.
17살.
그런가. 정말로 몇 년 흐르지 않았다. 몇 년 안 된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마계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들의 도시인 양양과 낙양을 오갔다.
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족들과 여로에 오를 정도로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일상에서의 변화도 있다. 사람에 맞춰 쓰던 가면이 더는 피곤하지 않았다. 정신연령은 겉으로 보이는 용모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학자가 주장했던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베르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 또. 노친네처럼 웃고 있네요.”
수프를 비운 란랑은 얼굴을 찌푸렸다. 알베르트는 표정을 관리했다.
“그게 더 이상해요.”
“…….”
못하는 말이 없는 아가씨다.
빈 그릇을 받은 알베르트는 식기를 정리했다.
생각보다 아랑 사형의 귀환은 늦었다. 수프가 거의 식어갈 때쯤 돌아온 그는 굳은 얼굴이었다. 단번에 수프를 비운 아랑 사형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캘러미티다. 아새끼들 주제에 머릿수가 좀 있다. 진지까지 구축해 놓았어.”
“피해갈 수는 없습니까? 수가 많다 해도 숨어 있는 녀석들이니, 진지는 작을 것 같은데요.”
“너무 돌아가게 된다. 좀 더 외곽 지역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러면 세상의 끝과 닿을지도 모른다. 내는 강행 돌파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다.”
“돌아가게 되더라도 안전한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캘러미티의 진지를 돌파하려면 교전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이고, 죽이는 전쟁은 란랑이 볼만한 것이 못 된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다른 길을 모색하면 좋겠다. 알베르트의 제안에 아벨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게 되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그럴 수는 없지. 황녀도 그런 건 바라지 않을 게다.”
“며칠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며칠? 당치도 않은 착각을 하고 있구마. 며칠이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 사제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우리 동포들은 세상의 끝으로는 여행을 떠나지 않아. 공간이 불안정한 탓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곳에 발을 잘못 담갔다가는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날아가는 수가 있지. 시공간의 축이 비틀어진 공간이다. 옛 중원의 모습을 보고 왔다는 동포가 있을 정도야.”
“…….”
“포기해라. 란랑은 내가 지킬 테니, 니는 길이나 뚫어라.”
“알겠습니다, 아랑 사형.”
각오하는 편이 좋겠다. 교전을 피할 수는 없다. 알베르트는 허리춤의 지팡이 검을 쓰다듬었다.
캘러미티의 특징에 대해서는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북부의 야만인들에 관한 소문은 수도 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광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도 집단. 사교를 숭배하고 같은 동족마저 산제물로 바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서로를 죽이고 그 고기를 탐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캘러미티는 야만적인 종족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어느덧 떠오른 해는 야영지를 밝히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눈 부시다는 듯 란랑은 손을 들었다. 눈을 가린 손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