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전조(2) (123/200)

 # 123

전조(2)

달도 보이지 않는 야심한 새벽. 란랑은 눈을 떴다.

물 먹은 수건처럼 몸이 무겁다. 팔도, 다리도. 무엇보다 엉덩이가 아팠다. 아직 여독은 풀리지 않았다. 마차에 앉아만 있던 탓이다. 엉덩이를 쓰다듬은 란랑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체형을 보면 그녀의 몸이 성장할 가능성은 없다. 그나마 자신이 있는 부분은 뒷모습 정도인데, 이러다가 뒷모습마저 망가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마차 여행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일어나기 싫다.

따뜻한 온기를 갈구하듯이 란랑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무거운 몸과는 달리 잠기운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바깥이 시끄럽다. 뒤숭숭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마물이 마을을 습격한 모양이다. 그녀가 나갈 이유는 없다. 여기에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알베르트도 있다. 어떤 마물이 왔다고 해도 둘이 나서면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그래. 정말로 어렵지 않아.

그러니까 그녀가 일어날 이유는 없다.

난초 향이 나는 꽃이 어떤 색으로 물들지, 정말로 관심 없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란랑은 한숨을 쉬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잠옷 위로 바람을 막을만한 옷가지를 걸쳤다. 집을 나오자 문 앞에는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체구가 작은 남자인데도, 이 사람의 등은 한없이 커 보인다. 아버지의 뒤로 다가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아, 공주님도 깨버렸구만. 미안하데이. 눈치도 없는 녀석들이지. 아무래도 먹다 남은 뼈다귀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을 방책을 넘어 들어온 마물은 헬 하운드(Hell Hound)였다.

빠른 발과 강철도 씹어먹는 이빨. 산길에서 만나면 고전을 면할 수 없다는 마물이다. 마기에 노출된 녀석들의 크기는 거의 곰과 맞먹었다. 광장을 누비고 다니는 머릿수는 어림잡아도 스물이 넘어가고 있었다.

헬 하운드의 사냥감은 알베르트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 같다.

가까이 있는 의자를 당긴 란랑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한쪽에는 찻주전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아버지와 알베르트가 차를 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손을 멈췄다.

차가 아니다.

코끝을 찌르는 이 불쾌한 냄새는…….

“술이 그리 좋아?”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마.”

“어머니에게 다 말할 거야.”

“그건 좀 피해 주면 안 되겠나?”

곤란하면 마시질 말라고. 란랑은 곤란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꼬치 다섯 개.”

“두 개로 하믄 안 될까?”

“세 개.”

“알았다. 세 개로 통치마.”

잔을 내려놓은 란랑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두 눈을 감은 그는 헬 하운드의 발톱을 피하고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수가 아무리 불어나도 놈들의 이빨은 닿지 않는다. 아버지와 무언가 이야기가 되어 있는 걸까. 그 손은 움직이지 않는다. 회피에 몰두한 알베르트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그저 피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광장이 넓은 편이라고는 해도 이곳에 모인 마물의 수는 적지 않다. 녀석들은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늑대의 그것을 닮은 사냥 방법이다. 자연스레 포위망이 만들어진다. 고지대에서 헬 하운드의 사냥을 바라보는 두 부녀의 모습에는 활로가 보인다. 하지만 포위망 안쪽에 있는 알베르트에게는 그 길이 보이지 않겠지. 더군다나 두 눈까지 감은 그는 시야를 포기한 상태였다.

“기초부터 가르치나 보네.”

“주춧돌이 튼튼할수록 건물을 짓기 편한 법이제. 녀석의 무공은 단계가 뒤죽박죽이야. 지가 쓰는 무공이 몇 성인지도 모르는 무인이 어디 있다는 건지. 쯧쯧. 란 사제, 이제 제압해도 좋데이!”

아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세가 바뀌었다.

허리춤의 검을 뽑은 알베르트의 손이 움직였다. 주인을 잃은 마물의 발톱이 날아왔다. 아랑은 손으로 그 파편을 받았다. 잘린 발톱이 아버지의 손에서 박살 났다. 알베르트가 든 검은 눈에 익숙하다. 평소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검이 아니다. 곡도처럼 살짝 휘어진 지팡이 검은 집에 있던 물건이었다.

“저거 우리 일족만 써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마, 사제는 그럴 자격이 있다.”

“사제는 무슨. 제자겠지.”

“아니데이. 저 놈의 스승은 따로 있다.”

“그럼 왜 사제라고 부르는 거야. 그 사람이 아버지의 스승은 아니잖아?”

“당연한 말을 하는구마. 하지만 동문인 건 부정할 수 없데이.”

동문? 란랑은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의 말이 맞다면 이제 세상에 남은 치우 일족은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 외에는 일족의 피는 남지 않았을 터다. 무엇보다 저 남자는 치우 씨도 아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일족이 몰래 받은 제자라는 걸까? 하지만 그의 무공은…….

“그랬구나. 이상하게 알베르트의 혈도가 익숙하다 했어. 혈도 전체를 단전으로 대체하는 무공이 두 개나 있을 리 없지.”

“똑똑하구마, 우리 공주님. 그랴. 저건 우리 일족의 비기이니라.”

“외간 남자가 아니었네. 하지만 스승은 누구야? 아버지가 그랬잖아. 일족의 검에게 전해지는 무공은 일인 전승이라고. 검이라고 해봐야,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다면서.”

“그래, 다 죽었지.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행방?”

“그걸 알려주면 재미없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렴. 그 답을 풀고 나면 갖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무슨 말이냐는 딸아이의 시선에 아버지는 웃었다.

알베르트의 검을 피해 도망쳐 온 걸까? 커다란 이빨이 그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 머리에 아랑의 주먹이 꽂혔다. 쿵. 헬 하운드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볼썽사나운 피는 튀어 오르지 않았다. 축 늘어진 놈의 몸 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발경(發勁). 내부가 부서진 녀석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알베르트의 주변에서는 난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쁘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도 그렇지만, 피어나는 꽃과 맞닿은 헬 하운드의 몸이 깨끗하게 잘려나가고 있었다. 눈을 돌릴 수가 없다. 흩어지는 선혈과 하얀 꽃이 대비를 이룬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메마른 입술을 적시듯이 란랑은 혀를 내밀었다.

잠자리에서 나온 보람이 있었다.

*&*

야밤의 일 때문인지, 란랑의 기상은 매우 늦었다.

준비를 마친 그녀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따사로운 해가 중천에 걸려있었다. 거리로 나온 송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밤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마을 풍경이 그녀의 눈에 담겼다. 작은 마을이었다. 노점상이나 객잔도 보이지 않는다. 밖에 나온 주민들은 피로 얼룩진 바닥을 닦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떨었다.

헬 하운드를 잡은 건 내가 아닌데. 그보다 감사의 인사를 받아야 할 처지인 거 아닌가?

곰곰이 생각하던 란랑은 이내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그들은 외지인이다. 무서운 마물마저 쉽게 제압해버렸으니, 역으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건 당연했다. 만약 그들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가져가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알베르트와 아버지는 광장 중앙에 붙은 방문(榜文)을 보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다. 청소하고 있던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모인 것 같다.

“무슨 일 있어?”

“별일 아니데이. 전선에서 온 소식이다. 시더 황자가 북부의 야만인들을 내쫓았다는구마.”

전쟁이 끝났다.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란랑은 방문을 읽어봤다.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북부의 캘러미티가 물러갔으니, 징집되었던 병사들이 곧 회군할 거라는 소식이 담겨있었다.

“이겼다는 이야기는 없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캘러미티의 뒤를 제국이 쳤다는 모양이야.”

“제국이? 이해할 수가 없네. 녀석들이 왜?”

“제국이 자랑하는 마법사 나부랭이들이 움직였다는 소문이 있다. 그쪽도 바보는 아니라는 거겠지. 캘러미티가 너무 요란스럽게 움직였으니, 그걸 경계하기 위해서 뒤를 친 모양이야.”

“처음 듣는 이야기야. 우리가 제국과 협공을 하다니.”

“적의 적은 친구지. 물론 일시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역사가 말해주지 않나? 하고 덧붙인 아버지는 재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다. 이해를 위해서 내가 또 강의를 해줘야겠구만.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 선조들이 많이 써먹었던 전략이지.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부르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말이다. 우리의 힘이 아닌 다른 민족의 힘을 빌려 그 민족을 제압하는…….”

란랑은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도 조금 질린 눈이다. 어쩐 일로 의견이 맞은 듯 싶다. 란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아랑을 내버려 둔 채 둘은 마차로 향했다. 마을 주민들이 열심히 듣고 있으니, 강의가 끝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마차로 오자 세 마리의 바이콘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래, 누나 왔다. 경(頸), 흉(胸), 요(腰).”

투레질하는 경의 갈기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갈기가 손안에서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들은 바이콘의 특성 때문에 멀리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의외로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먹을 걸 주면 잘 챙겨 먹기도 하고.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행선지로 가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와 있기 껄끄러울 때면 마부석에 앉아서 녀석들을 보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이제는 완전히 친해졌네.”

“왜요? 부러워요?”

“그냥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 말이야. 그 남자도 동물과 매우 친했거든. 란랑과는 반대로 키도 그렇고, 덩치도 정말 큰 남자야. 말수는 적었지만, 이상하게 동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남자여서 말이지. 저택 내에서는 꽤 유명인이었어.”

“바이콘은 동물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

사람의 손길을 탔다고는 하지만 마물이다.

세 사람의 무력이 약했다면, 저 발길에 짓밟히는 것은 땅이 아니라 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바이콘을 쓰다듬던 란랑은 마부석에 앉았다.

짐은 이미 전부 옮겨놓은 걸까. 알베르트는 마차에 오르지 않는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요로부터 눈을 뗀 그녀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란랑은 치우 일족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알베르트가 아는 것보다는 많이요.”

무슨 이야기를 꺼내나 했더니,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화제가 나왔다.

“아랑 사형에게 대충 듣기는 했는데. 아직 궁금한 게 많아서, 조금 물어봐도 괜찮을까?”

“외간 남자에게는 대답하고 싶지 않네요. 치우 일족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우리 일족이 되는 길부터 모색하고 와요.”

물론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무리다. 란랑의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일족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할 생각은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란랑은 란랑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들은 자신의 일족은 망가지다 못해 너덜너덜한 일족이었다. 서로의 피를 거듭해 인위적인 천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소수 민족이라니.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한데, 란랑의 대답을 들은 알베르트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뭐라고 할까. 부끄러워하는 느낌?

“나는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이해할 수 없다. 쑥스러워하는 알베르트의 목소리가 짜증 난다.

별로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란랑은 자신이 한 말을 떠올렸다.

일족이 되는 길부터 모색하고 와요.

이상하지 않다.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건 돌려 말한 셈이다.

…….

…….

잠깐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일족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는 없다. 그 일족과 하나가 되면…….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란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착각을 하는교!? 누가 당신 같은 남자랑!?”

“아니, 나는…….”

란랑의 손이 알베르트를 향해 나갔다. 알베르트는 손을 들었다.

무심코 진심이 담긴 걸까? 그녀의 손은 가볍게 볼 움직임이 아니었다. 손바닥을 쳐내도 그 기세가 죽질 않는다. 알베르트는 볼을 향해 날아드는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란랑은 반대쪽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실패했다. 란랑이 그럴 의도가 있다는 걸 파악했으니, 반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두 손이 묶인 란랑은 알베르트를 노려보았다.

부끄러움 때문일까, 혹은 다른 감정 때문일까. 그녀의 두 눈은 살짝 젖어 있었다.

“일단 진정부터 하자, 란랑.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얌전히 한 대 맞는 게 그리 싫은교?”

“맞을 이유가 없잖아.”

억지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한 대 때려주지 않으면 화가 안 풀릴 것 같다. 떼를 쓰듯이 란랑은 몸을 틀며 저항했다. 알베르트는 힘을 뺐다. 떨어진 란랑은 있는 힘껏 그 다리를 걷어찼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태평스러운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고 싶다. 가학심이 꿈틀거렸다.

“아랑 사형이랑 사이가 안 좋은 건, 역시 일족이 얽혀 있기 때문이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 사람은 그냥 아버지 자격이 없는 남자예요.”

“말이 좀 지나친데. 서툰 사람인 건 맞지만. 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건 맞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말하지 마요.”

바보 같은 소리다.

괴물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을 이유는 없었다.

란랑은 쏘아붙이듯이 알베르트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뒤로 작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새끼. 지금 우리 공주님에게 뭘 하는 건지 물어도 되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 뭘 좀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마, 그렇지. 오해지. 우리 공주님이 우는 것도 내 눈의 착각이지. 그러니까 니는 피눈물부터 흘리고 보자.”

“…….”

아랑이 딸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베르트는 그날 몸으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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