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치우(蚩尤)
약방으로 돌아온 알베르트는 제갈윤 공자가 준 지도를 유피에게 보였다.
지도는 대략적인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픈 완성도를 자랑했다. 거기에 알베르트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기호와 그림이 가득했다. 일종의 암호화라고 봐야 할까. 혹여라도 적의 손에 넘어갔을 때를 대비한 것이겠지. 다행인 것은 유피가 독도법(讀圖法)을 익히고 있었다.
“꽤 머네. 위치만 봤을 때 마녀의 산과 비슷한 거리에 있어.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걸릴 거야. 왕복까지 생각한다면 두세 달은 잡아야 할 것 같아.”
「여로에 오르면 황녀님의 몸 상태가 더 나빠지실 수도 있어요. 무덤은 저와 란이 다녀오는 거로 할게요.」
“어딜 간다는 거야, 어머니. 북부에서 가까운 지역이야. 여로가 너무 위험해.”
란랑이 아란 씨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괜찮단다. 여차하면 란이 지켜줄 거란다.」
“단순히 약초를 확인할 사람이 필요한 거잖아. 됐어. 그런 거라면 내가 다녀올게.”
「네가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단다.」
“어머니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해. 호신술도 익히고 있으니까.”
모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껄끄러우면 언니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어. 바쁘지만 않다면 오히려 그쪽이 괜찮을지도 몰라. 마녀의 산에서 가까운 편이기도 하고.”
“이미 한 번 신세를 졌잖아. 전선의 일로 손을 빌리기도 했고. 여기서 더 부탁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알. 드래곤이 있다면서. 진짜인지는 둘째치고.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건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야.”
드래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2차 대전쟁 시기다.
마계도 다를 것이 없다. 유피는 제갈윤 공자가 봤다는 고룡이 환상이나 다른 것에 가까울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마주할 일은 없을 거야. 중심부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구나. 역시 내가 같이 가는 게 좋겠어.”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거야.”
“알이 걱정할 정도로 힘들진 않아.”
“내 앞에서 약한 모습 정도는 드러내도 괜찮아.”
그녀의 몸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다.
유피는 알베르트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네가 할 말은 아니야,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구마.”
방으로 들어온 것은, 란랑의 뒤를 몰래 따라오고 있던 걱정 많은 아버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가를 구기는 딸아이의 옆에 앉았다. 란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랑의 옆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었던 듯 아란의 옆에 앉았다.
“우리 공주님이 간다면 내도 함께 가지.”
“아버지가 왜?”
란랑은 입술을 삐죽였다. 가시 돋친 딸아이의 태도에도 아버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말그라. 이 아부지가 함께 가믄 아무 문제도 없을기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게 더 문제야.”
“우리 공주님은 오늘도 까칠하구마.”
“웃지 마, 기분 나빠.”
귀갓길에서 딸아이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 웃음은 평소보다 더 짙었다.
반면, 란랑은 아버지의 기분이 왜 좋은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다.
“아랑 선배님이 함께 가신다면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죠. 감사합니다.”
“니 좋으라고 가는 기 아니다. 내는 우리 공주님이랑 산책하러 가는 게다. 네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
“물론 농담이지 않겄나. 내가 같이 가니 다들 무사히 돌아올 기다.”
“…….”
천진난만한 아란 씨의 모습에 아랑은 말이 급선회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
알베르트는 약방 마루에 나와 있었다.
해가 진 외곽 지역의 풍경은 도심과는 달랐다. 소란스러운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인위적인 소란 대신 들리는 것은 벌레들의 지저귐과 동물들의 소리였다.
맑은 밤하늘이다. 떨어지는 별무리와 달을 안주 삼아 사냥꾼은 홀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싸구려 노주를 드는 그 옆에 알베르트는 백주와 만두를 내려놓았다.
호랑나비 객잔에서 단예가 억지로 안겨준 술이다. 노주를 치운 알베르트는 아랑의 잔에 백주를 채웠다. 힐끔 잔의 냄새를 확인한 아랑은 알베르트의 잔을 확인했다. 비어 있다. 백주를 받은 그는 알베르트의 잔을 채웠다.
두 무인은 말없이 대작했다.
유피는 잠자리에 든 지 오래였다. 아란 씨가 챙겨준 약을 먹은 그녀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 몸 상태가 더 나빠진 그녀다. 약 기운이 없다면 가급적 몸을 움직이는 일은 피하고 있었다. 10대 소녀인 란랑은 자기 방에 들어갔고, 아란 씨는 탕약을 먹은 지아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두 사람뿐이다.
잔을 기울인다. 투명한 백주가 입술을 적셨다. 목을 타고 불길이 달리는 것 같다. 뜨거워지는 안을 달래듯이 알베르트는 만두를 들었다.
“내랑 아란이는 말이데이. 치우(蚩尤) 일족의 마지막 생존자다.”
“소수 민족에 관한 이야기라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살며시 흘러나온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그랴, 아란이는 일족의 의녀였고, 내는 표면적으로 역사학자였다. 뭐,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라는 기다. 그 사람은 조금 얼빠진 면이 있어서 내 진짜 정체는 몰랐지만.”
백주 한 병을 다 비운 그는 아직 따지 않은 새로운 술을 찾았다.
“치우는 귀신의 피가 깃드는 소수 민족이다. 일족 전체가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 태어나는 건 물론이고, 몇몇 아이들에 이르러서는 정신 질환도 앓고 있다. 그 사람이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신체의 성장이 멈춘 것도 그 몸에 깃든 피 탓이지.”
“마왕의 저주입니까?”
“저주? 아, 그라믄 이야기가 재밌겠지. 동정의 여지가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치우의 몸에 깃든 피는 말이다. 일족이 스스로 자처한 결함이다. 외부와 접촉하는 걸 피하고, 산으로. 산자락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계곡까지 향한 그들의 말로지. 니는 고여있는 물을 본 적이 있나? 아무리 깨끗한 물이더라도, 흐르지 않는 물은 결국 썩어버리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거다, 치우 일족이 짊어진 피라는 건.”
“순혈(純血)주의. 피를 짙게 하기 위해서였군요.”
“이해가 빠르군. 그 말대로다. 치우라는 일족은 서로의 피를 거듭하고, 짙은 피를 만들기 위해 계속 섞였다. 100명을 낳으면 80명이 미치고, 20명을 건지면 10명이 죽었다. 10명을 연마하면 5명이 남고, 2명을 건지면 1명의 고독(蠱毒)이 탄생했지. 그렇게 탄생한 검을 중원으로 보내는 것이 일족의 사명이었다. 진정한 무를 추구하고, 그 순환의 끝에 닿을 수 있는 것은 무림이 아니라 우리 일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왕이 이곳에 강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잔을 든 아랑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삼신기(三神器)를 들고 사라진 일족 최강의 검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주와 함께 피를 거듭한 일족은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지. 결국, 무림은 사라지고 더는 사명을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치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일족이 살아가는 이유였으니까. 그 방식 말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던 게야. 이렇게 말하는 내도 말이다. 이 몸에 흐르는 피를 견딜 수 없을 때가 억수로 많다.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건 그런 까닭이야. 보다 강한 자와 싸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을 때가 많아. 그 갈증을, 그 허기를 달랠 길이 없어.”
“치우 일족은 심을 잃어버렸군요. 사부님이 그러셨습니다. 심을 잃은 무인은 단순한 사냥꾼이라고.”
“심을 잃은 게 아니다. 우리 일족은 삼신기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심을 연마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심을 없애야만 삼신기가 없어도 그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내도 말이다. 한때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았지. 하나를 죽이고. 다섯을 죽이고. 열을 죽이면서 최강의 검이 되어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긴 것은 무너진 중원에 나왔을 때였다.”
백주를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잔을 입안에 털어놓은 그는 말을 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았지.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 중요한 건 무의 순환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는 세상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지. 그래서 내는 일족을 등졌다. 이 미친 순환의 종지부를 찍었다. 일족 최강의 검인 내가 아니면 아무도 끝낼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치우는 전멸했다.
남은 혈육은 낡은 약방에서 기거하는 세 사람이 전부다.
“내가 왜 자네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는가?”
“후배는 모르겠습니다.”
“마, 멍청하그마. 네가 다루는 검 때문이다.”
“월아 말씀입니까?”
천마가 다루었다는 전설적인 신검.
알베르트가 칼자루로 손을 옮기자 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아는 치우 일족의 삼신기 중 하나다. 실허의 경계를 구분하는 흑령인. 부정한 모든 것들을 베는 월아. 천지신명의 이름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신석. 이 셋을 지닌 자만이 일족의 검을 대표할 수 있지. 그리고 월아의 인정을 받은 니는 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
“월아가 치우 일족의 검이라는 겁니까? 하지만 월아의 주인은…….”
“눈치 한 번 드럽게 느리구마. 그래. 그 검의 주인은 천마다. 그럼 그 천마는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나? 자네의 사부는 어째서 사냥꾼을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그만한 무인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하나?”
“…….”
“전승을 들어보면 천마는 항상 삿갓을 쓰고 다녔다고 하지. 그게 단순히 그가 삿갓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지. 치우의 거듭된 피는 신체적 결함을 피할 수 없다. 천마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랑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런가. 어째서 압도적인 신위를 가진 천마의 이름이 그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치우라는 소수 민족. 일족 최강의 검인 그가 나와서 본 무림과 현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보다 조직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곧 그가 천마신교로 향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마신교라는 조직은 강자의 율법이 지배하는 곳이데이. 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건 그 시대 최강의 무인뿐이다. 그 무인이 바깥에서 들어온 돌이라고 해도 말이다.”
“…….”
“자, 니가 일족의 검을 이은 무인이라는 걸 안 이상. 내는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다. 만약 월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죽이는 것이 어떨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군. 약초를 구하러 가는 동안 단디 각오해라. 그 이름에 걸맞은 무인으로 만들어 줄 테니. 사제가 생기면 내 허기도 달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분명 후자가 목적이다.
알베르트는 사심 가득한 아랑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이미 사부님이 있습니다, 아랑 선배.”
“누군지 짐작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사형이라고 불러라.”
“거부권은 없습니까?”
“거부권? 아, 물론 있지.”
사냥꾼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네가 날 이긴다면 말이다. 도전이라면 언제든지 받아주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랑 사형.”
처세술은 언제든지 필요한 법이다.
알베르트는 아랑 사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갈 줄 알았다.
*&*
라피엘이 준비해 준 마차는 투박하지만 튼튼해 보였다.
마차를 끄는 말 또한 일반 종마가 아니다. 양양에서 아벨 황자가 내주었던 바이콘이 무려 셋이다. 투레질하는 바이콘을 란랑은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소녀의 손길을 거부하는 바이콘의 기분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란 씨는 그런 딸아이를 보더니, 무언가를 적은 판을 보여주었다.
“벼, 변태 아닌교, 이 말들!?”
란랑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은 유피도 판의 글자를 읽더니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그랬지, 참.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당신은 알 필요 없데이!”
“알이 알만한 이야기는 아니야.”
기대하지도 않았다. 두 여인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아란 씨의 판을 확인했다. 판을 든 그녀는 무언가를 새로 적더니 알베르트에게 보였다.
「응원하고 있어요. 힘내요, 란.」
“…….”
보고 싶었던 내용은 아니었다.
“긴 여로가 될 거야. 잊은 물건은 없어?”
“없어. 내 짐은 몇 개 안 되니까. 부족한 건 가는 길에 장만해도 될 것 같아. 그보다 유피는 괜찮겠어? 일단 겉옷은 겉옷대로. 속옷은 속옷대로. 외출복은 외출복대로 분류해놓긴 했는데. 혹시 구분이 안 가면…….”
“난 어린 애가 아니야. 그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서투르잖아.”
“뭐든지 만능인 사람은 없어.”
잔소리가 많은 집사를 보며 유피는 입가를 찌푸렸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신설교의 일이 있을 때도 그랬다. 찻잎을 찾아 짐을 완전히 들쑤셔놓았던 방의 모습을 알베르트는 잊지 않았다.
“유피.”
“알.”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웃음을 머금었다.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이 묘한 거리감이 알베르트는 싫지 않았다. 그리고 유피도 그렇게 느끼고 있겠지. 연미복이 아닌 무복 차림의 알베르트는 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받아줄 수 있겠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작은 함이다.
알베르트의 손에서 함을 받은 유피는 안을 확인했다. 하얀색으로 빛나는 반지는 선녀 한소망이 건네준 월편이었다. 반지를 본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둔하다지만, 반지에 담긴 의미마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한동안 반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설마 내가 이걸 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굳이 낄 필요는 없어. 선녀님이 준 선물이거든. 유피의 몸을 보호해줄 거라고 했어.”
“…….”
함 한쪽에는 목걸이 줄이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거다. 못마땅한 그녀의 시선에 알베르트는 웃었다. 예전이라면 단번에 거절했을 유피가 조금이나마 고민했다는 사실에 그는 만족했다. 반지를 목걸이 줄에 건 유피는 손을 옮기다가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럼 손 좀 빌려줄래?”
“손?”
“목걸이.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유피는 알베르트에게 목걸이를 넘겼다.
그녀는 뒷머리를 앞으로 넘겼다. 별무리 지는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던 목덜미가 드러났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빨리해주면 안 될까?”
“내가 해도 괜찮겠어?”
“너니까 부탁한 거야.”
유피의 허락을 받은 알베르트는 뒤로 돌아갔다.
그녀의 앞으로 목걸이를 돌렸다. 은빛 머리카락이 손에 닿는다. 목걸이 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머뭇거리면서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유피는 따로 말하지 않는다.
이건 허락해줬다고 봐도 될까. 손가락 안에서 별무리가 흩어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에서는 홍차를 닮은 그녀의 방향이 났다.
“됐어.”
“그래?”
입가를 가린 알베르트는 유피에게서 떨어졌다.
얼굴이 뜨겁다. 뒷모습만 보이는 유피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녀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하고 보니, 부끄러운 행위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이쪽은 끝났데이. 아직 멀었나?”
아랑의 목소리가 울렸다.
거북한 분위기가 깨져나간다. 으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린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양 볼에 홍조를 띄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참, 이걸…….”
유피는 소연에게 부탁해서 받은 물건을 건네려다가 그만뒀다.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괜히 알베르트의 콧대를 세워줄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선물을 줬다가는 무언가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이 물건은 그가 돌아온 뒤에 주자. 얼굴이 붉어진 알베르트를 보며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갔다 와, 알.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올게, 유피. 공주님처럼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
장난기 어린 알베르트의 대답에 유피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