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늑대와 꽃(3)
방 안은 농밀한 마나로 가득 차 있었다.
유피는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던 건지, 그녀의 손끝에서는 은빛 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들어오는 두 사람을 느낀 그녀는 눈을 떴다. 마나에 일렁이던 머리카락이 가라앉았다.
붉은 두 눈이 인사를 올리는 아란 씨를 보았다.
「유피에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조금 피곤해 보이네, 힘들면 진료는 내일 해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항상 하는 일이니까요. 란랑은 어디에 있나요?」
“란랑이라면 저기. 아는 객잔에서 요리를 좀 사 왔는데, 그걸 보고 있어.”
호랑나비 객잔에서 사 온 음식이다.
포장된 요리를 하나하나 꺼내고 있는 란랑의 얼굴은 신이 나 있었다. 그중에는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 꼬치나 만두도 있었다. 살짝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꼬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어른스러운 척해도 아직 어린 나이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겠지.
“이런 외곽 지역에서 사는 거라면 좀 더 챙겨올 걸 그랬네.”
「아니에요. 충분하답니다, 황녀님.」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나누는 유피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수고했어, 하고 작게 말했다.
「상태는 황녀님부터 볼까요?」
“아니, 나는 괜찮아. 이 아이가 우선이야. 일단은 란랑이 확인하긴 했는데.”
“좋은 상태는 아니야, 어머니.”
입가에 묻은 고기 양념을 닦은 란랑은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왔다.
의식이 없는 지아의 손목에 아란 씨는 손을 올렸다. 맥을 확인한 그녀는 눈을 떴다.
「란랑의 생각은 어떻니?」
“신성력이 몸 안에 그대로 잔류해 있어. 혈도를 태워버린 쪽은 어떻게 제거한다고 해도, 머리까지 흘러 들어간 쪽은 문제야. 뇌척수액이 전부 침범당했어.”
「그래, 중추신경계가 전부 침범당했구나. 살아남은 신경은 얼마나 있다고 보니?」
“호흡이 괜찮은 걸 보면 네 번째 목 신경까지는 살아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좋은 상태는 아니야. 호흡도 얕고, 손상이 너무 심해서 이대로 몸만 회복시킨다고 해도 좋은 모습은 보지 못할 거야. 재활을 피해갈 길이 없어.”
「그럼 전부 살려내야겠구나.」
“다행인 건 이 아이가 혼혈이라는 점이야. 이만한 신성력을 순혈 마족이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일단 황녀님의 피를 조금 받았어. 마기와 적절히 융합하면 일시적으로나마 회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잘 다룰 수 있겠니? 배합이 약간만 달라도 위험한 힘이란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어떻게든 해봐야지.”
란랑의 대답에 아란 씨는 미소를 머금었다.
「똑소리 나게 성장했구나, 우리 딸. 매번 혼자 둬서 걱정이 많았는데. 엄마는 기쁘구나.」
“흥. 빈말은.”
어머니의 칭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살짝 얼굴이 붉어진 게, 썩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 탕약에 그럼 황녀님의 피가 섞여 있는 거니?」
“응, 일단 수중에 있는 약초를 섞긴 했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어.”
아란 씨는 탕약을 확인했다.
먼저 빛깔을 보고, 냄새를 맡고. 탕약을 입안에 머금었다. 란랑은 긴장된 기색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혀를 굴리던 그녀는 란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어머니에게 하얀 천을 건넸다. 아란 씨는 먹었던 탕약을 뱉었다.
「배합을 잘했구나. 잘 만들었어. 이 정도면 명약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
“그럼 될까?”
기대에 찬 딸아이의 목소리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명약으로는 안 된단다. 환자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단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강한 약을 만들면 환자의 몸이 버티질 못할 거야. 잘해야 내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걸.”
「알고 있단다. 그러니 명약보다 더 뛰어난 약을 만들어야겠지.」
“…….”
지아의 상태는 확인했다. 아란 씨는 유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진맥을 마친 그녀는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판에는 빼곡한 글씨가 차올랐다.
「여전히 좋은 상태는 아니에요. 몸은 어떻게든 회복시킨다고 해도, 이후가 문제입니다. 황녀님의 신성력을 생각했을 때, 이런 일이 반복될 거에요. 거기에 제가 준 약에 몸이 벌써 적응하기 시작했어요. 항체가 감지되는 것이 회정단에 곧 내성이 생기실지도 몰라요. 근본적인 부분을 치료하려면 다른 약을 사용해야겠어요.」
“부작용은 없을까? 이것보다 더 강한 약이라면 몸에 부담이 심할 것 같은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쓰고자 하는 약에는 용종(龍種)의 약초가 들어갈 거에요.」
“어머니, 설마 사룡초(死龍草)를 말하는 거야? 하지만 그걸 무슨 수로 구할 생각이야?”
“사룡초?”
알베르트의 반문에 아란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종의 시체에서만 자라나는 전설적인 약초랍니다.」
“하지만 용은 더는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양양에서 들었어요. 세상의 끝과 맞닿은 북동부 어느 지역에 용의 무덤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찾아냈다는 그 유적지를 갈 수 있다면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용의 무덤. 귀에 익은 지명이었다.
알베르트는 유피와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 제갈윤 공자가 언급했던 장소였다.
*&*
알베르트는 란랑과 함께 낙양 거리로 내려왔다.
원래는 유피가 같이 갈 예정이었지만, 아란 씨 왈. 황녀님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란랑이 있었다. 혹시 사룡초와 비슷한 약초를 보았는지, 제갈윤 공자에게 물어보기 위해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호랑나비 객잔은 아란 씨의 약방에서 멀지 않았다. 객잔은 점심시간이 넘었음에도 문고리를 걸어놓고 있었다. 오늘은 영업하지 않는다는 듯 방이 붙어 있다. 란랑은 미심쩍은 눈으로 알베르트를 보았다.
“여기가 맞나요?”
고개를 끄덕인 알베르트는 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잠시만요, 하고 예의 바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작은 발소리와 함께 낯익은 소녀가 나왔다. 귀화루의 기녀였던 송이다.
“알베르트 님?”
“미안, 내부를 정리하느라고 바쁜가 보구나.”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아침에 사 가신 요리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제갈윤 공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형부는 안쪽에 있어요.”
들어오세요, 하고 송이는 문을 열었다.
객잔 안쪽은 인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낡은 테이블을 치우고 그 자리를 새로운 테이블이 대신한다. 홀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있는 여인은 가희, 희연(熙燕)이다. 그 옆에는 단예가 서 있었는데. 무언가 혼이 난 듯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송이와 함께 들어온 알베르트와 란랑을 보고 다가왔다.
“아침에 보고 또 보네요.”
“있잖아요. 들어봐요, 알베르트 님. 희연이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윽박지르면서 아직도 그 버릇을 못 버렸냐고 그러는 거 있죠? 누가 보면 그냥 잡아먹겠다니까요.”
“이 가시나가. 자존심도 없는지, 그걸 또 고자질하고 있네.”
“뭐가. 잘못한 건 너잖아. 여기에 무대를 만드는 게 뭐가 문제인데?”
“그럴 거면 그냥 객잔이 아니라 기루를 만들어.”
“기루를? 음, 그것도 괜찮네. 루주 소단예. 뭐가 어감이 좋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언니, 그건 아니에요.”
순식간에 말소리가 커진다.
풀이 죽었던 단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기루에 있었을 때처럼 아름답게 치장한 세 사람의 모습은 꽃이 핀 것처럼 예뻤다. 쏟아지는 세 여자의 목소리에 란랑은 알베르트에게 물었다.
“왜 이리 아는 여자가 많아요?”
“양양에서 조금 일이 있었거든.”
“아는 여자 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 알베르트 님의 애인이란다. 내가 1호고, 얘가 2호. 쟤가 3호야. 어때? 취향 별로 전부 모여있단다.”
“또 시작이네. 그 버릇을 아직도 못 버린 거야? 오해 살 말은 하지 마.”
한숨 섞인 희연이의 목소리도 상관없다. 단예의 말에 란랑의 눈빛이 변했다.
땅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말 뼈다귀를 보는 것처럼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짐승. 황녀님께 음흉한 시선을 보낼 때부터 알아봤당게.”
“…….”
란랑은 감정이 격화되면 자연스레 말투가 바뀌는 모양이다.
이것도 아버지인 아랑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만 해요, 언니. 형부가 울 것 같은데요.”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제갈윤 공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상한 오해를 사는 건 피하고 싶다. 송이와 이야기를 시작한 란랑을 뒤로한다. 테이블로 향한 알베르트는 제갈윤 공자와 마주 보고 앉았다.
“당연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황녀님께서 해주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용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알베르트의 요청에 제갈윤 공자는 선뜻 대답했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이 문제입니다. 용의 무덤은 세상의 끝과 맞닿은 곳에 있습니다. 주변에 마물은 물론이고, 망자도 있습니다.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길잡이를 해드리면 좋겠지만, 객잔 상태가 이래서 자리를 비우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공자님이 지금 자리를 비우실만한 상황은 아니죠.”
“그래도 희연이가 와서 다행입니다. 그녀가 있으면 객잔을 부활시키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습니다. 이런 방면에서는 능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어디에서 죽이 맞았는지, 네 여자는 깔깔거리면서 웃고 있다.
가끔 이쪽을 보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좋은 이야기가 나온 거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윤 공자의 얼굴에 피곤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단예와 눈이 마주친 그는 웃음을 띄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혼이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것 같아서 알베르트는 안심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세 여자와 대화를 마친 란랑은 알베르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제갈윤 공자님. 치우 란랑이라고 합니다.”
“예의가 바르구나. 알베르트 님과 함께 온 걸 보면 평범한 아이는 아닐 것 같은데.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하거라. 내 최대한 도와주마.”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차후 몸이 안 좋아지면 소화 약방을 자주 이용해주세요. 저렴한 가격에 모셔드리겠습니다.”
란랑은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약방에 대한 홍보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손님을 얻기 위해서는 발품을 파는 일도 중요했다.
“공자님은 용의 무덤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세가 전체에 함구령이 내려진 일이다만, 나는 파문당한 몸이지. 그래, 물어보거라. 무엇이 궁금하냐?”
“무덤에서 실제 용종을 보셨는지요? 생사는 관계없습니다. 용종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용종이라는 건 비룡이나 이무기도 포함하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용을 말하는 건가?”
“이무기까지는 괜찮습니다만, 제가 말하는 건 후자입니다.”
“비룡이라면 꽤 봤지만, 다른 용종은 보지 못했다네.”
역시 그런가요, 하고 란랑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마계 내에서 비룡도 흔한 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 용종과는 천지 차이라고 해도 좋을 격차가 있었다.
“용의 무덤 바깥에서는 말이지.”
“바깥이요? 그럼 안쪽에는……?”
“그래. 무덤 안쪽은 이야기가 다르다. 처음 보는 마물에, 고대 병기로 보이는 골렘도 있었지. 무덤의 중심부까지는 괜찮았다. 탐사대의 분위기도 좋았고, 분명 이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생길 정도였다. 전력은 충분했다. 우리 세가의 정예 인원들은 물론이고, 받아들인 낭인은 하나 같이 이름이 있는 대협들이었으니까. 소소검, 환우도, 낭파권. 설마 그분들이 모두 그곳에서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가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 함구령을 내렸지.”
낭인들의 이름은 알베르트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양양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무인들이다. 싸움판에서 꽤 이름을 날렸던 이들이다.
“무엇이 있었습니까, 제갈윤 공자.”
알베르트의 물음에 제갈윤 공자는 찻잔을 들었다.
“고룡(古龍)이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룡?”
그 대답에 란랑이 눈을 크게 떴다.
“살아 있는 용과 마주한 건가요!?”
“그렇단다.”
“고룡. 진짜 용……. 알베르트. 당신은 강한 무인이잖아요. 용 정도는 당연히 잡을 수 있죠? 잡고 난 뒤에 나오는 시체는 우리에게 줘요. 용의 피, 비늘, 심장 모두 약으로는 값어치를 따질 수가 없는…….”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군.”
흥분한 란랑과는 달리 알베르트는 침착했다.
메마른 입술을 적신 제갈윤 공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베르트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고룡의 자비가 없었다면 저희는 전멸했을 겁니다. 녀석은 계승자가 아니면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곳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호기롭게 도전했던 대협들이 쓰러지고 난 뒤에야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건 진짜 용이었습니다.”
진짜 드래곤과 마주했다면 대처할 방법은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 전력이다.
신화의 시대를 살아갔던 인물들이 살아온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검성도 드래곤을 쫓은 뒤 돌아오지 못했다. 그만큼 불합리한 존재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서 드래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용이 있다면 사룡초가 있을 확률도 높겠네요. 용이 탈피한 비늘이나 가죽에서도 자라거든요. 다행이네요. 희망을 품을 수 있겠어요.”
“일단 제가 가진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드리겠습니다. 확실한 위치까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끝이 가까워지면 근처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제갈윤 공자.”
“더 도움이 못 되어드려서 죄송할 따름이죠. 또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기를. 최대한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제갈윤 공자의 호의를 받아들인 알베르트는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는 건 일주일 뒤다.
가능하면 참석해달라는 단예의 제안을 끝으로, 알베르트와 란랑은 호랑나비 객잔에서 나왔다. 란랑의 양손에는 희연이가 챙겨준 음식이 가득했다. 한 손에는 꼬치를, 한 손에는 봉투를 든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먹성만 놓고 본다면 유피와 비슷한 아이일지도 모른다.
“왜 여자가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그래요?”
“유피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저랑 황녀님이요? 에이, 무슨 소리예요.”
몸을 배배 꼬면서 말하는 모습이 싫은 건 아닌가 보다.
생각 외로 알기 쉬운 아이다. 꼬치를 전부 먹어치운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진짜 고룡이 있다는데. 걸리지 않고 가져올 수 있을까요?”
“거기에 악마가 있든, 드래곤이 있든 상관없어. 유피의 몸이 나으려면 사룡초가 필요하다면서. 그럼 난 구해올 뿐이야.”
망설일 필요는 없다.
정원에 있는 꽃을 꺾어온다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소녀는 물었다.
“하나 묻고 싶었는데요. 알베르트는 혹시 황녀님을 좋아해요?”
“사랑하고 있어.”
“…….”
알베르트의 즉답에 어째서인지 란랑이 당사자라도 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살짝 고개를 돌린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우와. 이 사람, 즉답했어.”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란랑은 헛기침을 터뜨렸다. 새된 목소리는 가다듬었으나, 그 얼굴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알베르트도 용을 이길 수는 없다면서요. 생각해둔 방법이라도 있으신가요? 가령, 힘이 되어줄 만한 사람이 있다든가.”
“한 사람 있지. 바로 네 아버지.”
“왜 여기서 아버지가 나와요?”
란랑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진짜 용이 있다고 하면, 네 아버지와 함께 가는 게 최선이야.”
“웃기지 마요. 아무리 황녀님을 위해서라지만 우리 아버지를 데려갈 수는 없어요.”
“아버지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싫어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버지가 다치는 게 더 싫어요.”
“…….”
심통이 난 소녀의 목소리에 알베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싫으면서도 미워할 수 없다는 사춘기 특유의 심성일까? 생각해보면 아가씨도 란랑만한 나이 때에는 철없이 군 적이 많았다. 저택의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응석받이였던 아가씨니까 말이다. 그때는 속을 썩이는 일도 많았지.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욕을 먹었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감성은 아가씨의 그것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알베르트의 과민 반응일까?
“그런 아버지라고는 해도,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다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슬퍼할 게 뻔히 보이니까요. 전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무공 따위 안 쓰면 좋을 텐데. 왜 무인의 길을 걷는 건지 모르겠어요.”
“무공을 배우지 않는다고 해서 다치지 않는 건 아니야. 역으로 네 아버지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 무공을 배운 건지도 몰라. 힘이 없으면 지키고 싶은 것도 지킬 수 없으니까. 란랑은 아버지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구나.”
딸과는 달리 아버지 쪽은 확실히 서투르다.
알베르트는 약방에서부터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 인기척을 느끼며 말했다.
“아버지와 나눌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솔직하지 못한 딸아이를 데리고 있는 아랑 선배도 고생이네.”
“누가 솔직하지 못해요? 이러니까 무인들은.”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소녀는 봉투 안으로 손을 옮겼다.
그 손에는 꼬치가 하나 잡혀 있었다. 또 먹을 생각인 모양이다. 부모님을 닮아 조그마한 저 몸 어디에 그만한 양이 다 들어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