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늑대와 꽃(2)
약방 안쪽에서는 란랑이 지아의 진맥을 짚고 있었다.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그녀는 알베르트와 유피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맞은편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진맥은 생각 외로 긴 시간이 걸렸다. 눈을 뜬 란랑의 손은 여전히 지아의 맥을 짚고 있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소식부터 듣고 싶으신가요, 황녀님?”
“나쁜 소식부터.”
“혈도가 완전히 뒤틀렸습니다. 불타버렸다고 해도 좋아요. 그것도 모자라서 몸 안쪽으로 침투한 기운이 뇌까지 파고들었어요. 황녀님의 신성력이 마기를 제거한 것까지는 좋은데, 역으로 그 힘이 독이 된 거예요. 잔류한 신성력이 환자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어요,”
“좋은 소식은?”
“황녀님의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진작 마기에 침식당해서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유피의 조치는 틀리지 않았다. 의녀의 대답에 마녀는 물었다.
“살릴 수 있겠어?”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힘들어요.”
란랑은 작은 그릇을 꺼냈다. 그릇 위에는 얇은 침이 준비되어 있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황녀님의 피를 받을 수 있을까요?”
“내 피가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치료에만 사용하겠습니다.”
가만히 그릇을 바라보던 유피는 침을 들었다. 은침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붉은 핏방울이 그릇 위로 떨어졌다. 피를 찍은 란랑은 입으로 가져갔다. 유피의 피가 란랑의 혀에 녹아들었다.
“생각보다 신성력이 짙네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피가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견본을 구했으니 어머니가 오기 전까지 치료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집사는 마중 좀 다녀오세요. 밖으로 나가서 언덕 쪽으로 가시면 출타 중인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게 보일 거예요. 상황을 말씀해드리면 약초는 다음에 채집하실 거에요.”
“알았어.”
이 자리에서 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베르트는 약방을 뒤로했다.
*&*
란랑이 말한 언덕은 작은 뒷산에 가까웠다.
이름 모를 약초들이 자라고 있는 이곳은 푸른 녹음이 가득했다. 마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외곽 지역인 것과는 별개로 안전한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던 알베르트는 암석 위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체구가 작다. 소년이나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키다. 아란 씨는 아니다. 하지만 그 뒷모습은 기억 속의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더 다가가면 위험하다. 녀석의 영역에 들어간다. 본능에 가까운 경고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 소년은 낯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소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웃음을 본 알베르트는 깨달았다.
“아새끼가 조금 쓸만하게 성장했구먼? 꽤 먹음직스러워졌어.”
소년은 소하 언덕에서 만났던 사냥꾼이 확실했다.
“아랑 선배님입니까?”
“기래, 내다. 그 얼빠진 낯짝을 보아하니, 냄새를 맡고 온 건 아닌가 보군.”
알베르트는 무심코 월아에 손을 얹었다.
혹여라도 벌어질지 모를 일에 대비한다. 사냥꾼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이전에도 만나자마자 주먹부터 나왔던 사람이다. 경계해서 나쁠 이유는 없으리라.
“하모, 내가 키운 그것은 네가 제압한 모양이더군. 제법 여물었지 않더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기 말이다. 그기. 변변찮은 악마 놈 말이제.”
“악마라면……?”
“말귀 한 번 못 알아 듣는구마. 반쪽짜리 황녀님이랑 죽인 고 놈 말이다. 쪼매 아쉽구마. 그놈은 더 큰 걸 데려와야 했는데 말이야.”
“…….”
아랑은 월궁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왜 이 남자가 알고 있는 걸까. 이신설교에서 벌어졌던 일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단순히 몇몇 일이 있었다는 소문이 났을 뿐인 사건을…….
혹시 흑토와 무슨 관련이 있었던 걸까?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 아랑은 입가를 찡그렸다.
“또, 또. 잔머리 굴리는 소리 한 번 시끄럽네. 니는 말이다. 선배가 앞에 있을 때는 머리 좀 굴리지 말아라.”
“선배님은 그 악마랑 무슨 연관이 있으신 겁니까?”
“아새끼 보소.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을 하고 있구만? 내는 그런 잡병에게는 관심 없다.”
아랑이 다가오자, 알베르트는 그에 맞춰 걸음을 뒤로 물렀다.
언제라도 월아를 발검할 수 있게 자세를 낮춘다. 그 모습이 가소롭다는 듯 소년은 손을 휘저었다.
“마, 치워라. 아직 네 수준으로는 내 몸도 못 건드린다 아이가.”
“그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죠.”
“호오, 제법 싹수가 생겼구먼? 좋다. 니 콧대 좀 꺾을 겸 하나만 시험해볼까.”
무심한 아랑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베르트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수천의 칼날이 몸을 찔렀다.
저항은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알베르트는 죽었다.
목 아래까지 드리워진 검이.
심장을 통과한 칼날이.
목숨을 앗아갔다.
호흡이 멎는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숨이 끊긴 알베르트의 눈은 아랑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발을 떼는 아랑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다.
아직 그는 죽지 않았다. 죽음을 느낀 것은 착각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아랑이 자신의 기운을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렇지만 알베르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차가운 기운이 그 몸을 옥죄고 있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일대를 장악한 기운은 흡사 녹림왕의 기도를 떠올리게 했다.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이곳에서 움직이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알베르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살의인가. 그렇지 않으면 살기인가.
혹은 둘 모두인가. 모르겠다. 생각을 이어갈 수 없다. 멈춘 공간 속에서 아랑만이 움직이고 있다. 그가 다가온다. 금방이라도 그 손이 움직일 것 같다. 초식을 담을 필요도 없다. 아랑이 자연스레 손을 뻗기만 해도, 알베르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족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힘을.
간신히 힘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에게는 닿을 수도 없는 힘이었던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사부님에게서 무의 기본에 대해서 배웠다.
천마의 무덤에서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을 알았다.
양양에서 쓰러뜨려야 할 적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낙양에서 그는 이 길을 걷는 것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알베르트가 지금껏 겪어온 경험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가 짊어진 책무는 이런 곳에서 멈추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공이 주인의 의지에 답한다.
혈도에서 흐르던 기운이 몸을 압박하는 칼날에 대항한다. 기세는 일어나기 무섭게 꺾였다. 저항하는 기운이 우습다는 듯 역으로 압력이 강해졌다. 더는 무형의 기운이 아니다. 형체를 가지기 시작한 기운은 알베르트의 몸 전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으스러진다. 농후한 기운에 잠식되어 간다.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 포기해라. 속삭임이 짙어진다. 온몸이 떨린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간신히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멈췄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체감 시간뿐이다.
시간은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움직여라. 이 힘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알베르트가 쌓아온 길은, 이런 곳에서 멈출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신이 쌓아온 모든 힘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끼릭, 하고 알베르트의 오른손이 월아를 쥐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몸을 옥죄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다.
알베르트는 단숨에 발검했다. 빛무리가 떨어진다. 아랑의 얼굴을 노리고 들어간 월아는, 녀석의 볼에 옅은 자상을 남겼다. 아랑의 시선이 월아로 향했다. 싸늘한 한기에 상처가 얼어붙었다. 그는 한동안 월아를 바라보더니 그런가,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구마. 그랴. 이 정도라면 개새끼는 아니구만. 하지만 아직 멀었어. 신검을 쥔 녀석이 이 정도밖에 못 한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
“…….”
알베르트는 말을 자아내지 못했다.
원래 시간으로 돌아온 그의 입은 호흡을 고르기 바빴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아랑의 몸짓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은 고정되어 있다. 월아를 쥔 손이 밀려났다. 어느새 손을 든 것일까. 아랑은 두 손가락으로 월아를 잡고 있었다.
“치워라, 마. 오늘은 내랑 싸우러 온 게 아니지 않나?”
빙글, 발길을 돌린 아랑은 언덕 끝으로 다가갔다. 쪼그려 앉은 그는 언덕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무방비한 사냥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월아를 수납했다. 아랑에게서 전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싸울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는 알베르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알베르트는 아랑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낙양의 반대편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산길에는 뛰노는 벌레와 동물들이 보였다. 마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는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 안에서 한 소녀가 사슴을 타고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약가방과 목에 건 하얀 판. 아란 씨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사냥꾼이라는 건 비밀이다. 만약 저 사람이 그걸 알아버리면, 니 숨통은 그 시간부로 끊긴다고 생각해라.”
“네?”
언덕을 올라오는 소녀를 향해 아랑은 손을 흔들었다.
그 입가에는 알베르트가 처음 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따서 딸아이 이름도 정했답니다.」
문득 아란 씨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아란. 아랑. 그랬다. 두 사람의 이름을 따면 란랑이라는 이름이 완성됐다.
이 남자가 아란 씨의 남편이었다.
*&*
약방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탕약을 달이는 란랑을 볼 수 있었다.
아궁이 앞에서 부채질하던 소녀는 부모님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를 보고 밝아졌던 얼굴이, 그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고 어두워졌다. 다가오는 아랑을 본 란랑은 까칠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 아버지가 어쩐 일로 안 다치고 왔네. 오늘은 사냥감이 없었나 봐?”
“하모, 우리 공주님. 커다란 쥐새끼 말고는 보이질 않더라`.”
“저녁거리를 구해오지 못한 아버지는 굶어.”
“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우리 공주님은 언제까지 반항기일지 이 아부지는 궁금하구마.”
“고생했어, 어머니. 피곤하지는 않아?”
「란랑, 아빠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난 잘못한 것 없어.”
“내는 괜찮데이. 다 그리 크는 게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아랑의 대답에 란랑은 고개를 돌렸다.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은 것 같다. 그런 딸아이의 눈치를 읽은 아랑은 자리를 피했다.
“내는 서고에 가 있으마. 일이 있으면 부르래이.”
스쳐 지나가는 아버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란랑은 말을 이었다.
“황녀님이 안에 계셔. 새로운 환자도 있고.”
탕약을 든 란랑은 약방으로 들어갔다.
부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아란 씨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란.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줬네요.」
“란랑은 아버지를 별로 안 좋아하나 보네요.”
「딸아이는 그이가 하는 무공을 싫어하거든요. 호신용으로 배우고 있는 것뿐인데,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에요. 이러다 사이가 더 멀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랍니다.」
“호신용이요? 혹시 아란 씨는 남편분의 무공을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아랑의 무공은 문외한이 본다 해도 천외천으로 보일 수준의 실력이다.
아무리 그가 사냥꾼이라는 걸 모른다고 하지만, 차원이 다른 무공을 보고도 그렇게 여긴다는 말인가?
「물론 봤지요. 그이의 무공은 평범하기 짝이 없답니다. 란이 보기에는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겠네요. 초식만 흉내 내는 수준의 무공밖에 안 되거든요. 아, 그래도 수련은 게을리하고 있지 않아요. 내공을 마구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동작은 확실하거든요.」
“…….”
순진무구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분이 다쳐서 돌아온 적은 없나요? 무공을 배우고 있다면 잔 상처를 피할 수 없을 텐데요.”
「말했잖아요. 어디 가서 보일 만한 실력이 아니니,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검은 두 눈에서는 남편을 의심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베르트는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컨대 아랑이 사냥꾼이라는 걸 란랑은 알고 있고, 아란 씨는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남의 가족사는 흥미 위주로 파고 들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알베르트는 약방으로 들어가는 아란 씨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