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늑대와 꽃(1) (118/200)

 # 118

늑대와 꽃(1)

알베르트는 언덕 아래로 펼쳐진 낙양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중심부에 있는 내성을 중심으로 거리가 나아가는 구조다. 원을 그리듯이 퍼지는 낙양 성은 외벽을 따라 여덟 개의 거리로 나뉘어 있었다. 내성 벽이 중간중간마다 자리하고 있는 낙양 성은 양양 성과는 또 다른 구조였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일까. 고지대에서 확인해보지 않는 한, 내성으로 향하는 길을 파악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만약, 외세가 침략한다고 하면 외성을 뚫고, 미로와도 같은 거리를 돌파해서 몇 겹이나 되는 성벽을 뚫어야 했다.

마족의 수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에 가까웠다.

언덕 아래에서 한 마차가 다가왔다.

마부는 익숙한 곱슬머리의 남자, 콜린이다. 마차 지붕에 앉은 여인은 알베르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던 유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반짝이 황녀님!”

“약속 시간은 좀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황녀님. 의국에서 수속을 밟는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가볍게 지면에 내려온 아이네르는 유피에게 다가갔다.

유피의 어깨로 올라가는 손을 알베르트는 막았다. 눈이 마주쳤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 떠올랐다. 아이네르는 다시 손을 뻗었다. 알베르트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녀는 힘을 쥐었지만, 집사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쳇, 하고 손을 내린 아이네르는 혀를 찼다.

“집사는 과보호가 심하네.”

“황녀님의 의사입니다.”

“진짜야?”

“…….”

“알았어. 만지는 건 그만둘게. 그런데 의외네. 집사는 독점욕이 강한 편이구나.”

한 발자국 물러난 그녀를 향해 유피가 물었다.

“환자는?”

“마차 안에 있어요.”

콜린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안쪽에는 한 아이가 누워 있었다. 키가 작고 피골이 상접한 아이는 수의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하얀 천이 덮여있었다. 알베르트와 유피는 약속한 것처럼 콜린을 쳐다보았다.

“죽었어……?”

“네?”

무슨 말이냐는 듯 콜린이 아이를 보았다.

그는 아이의 얼굴을 가린 천을 보더니, 아이네르를 향해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제가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아이네르 님.”

“장난친 적 없어. 의국에서 환자들이 나갈 때는 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데?”

“그건 환자가 죽었을 때 그러는 거예요.”

아무래도 무지가 불러온 참사인 듯 싶다.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쉰 콜린은 천을 치웠다.

천 아래에서 볼살이 야윈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딱히 특색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얼굴이다. 머리가 짧기는 하지만, 턱선이 갸름한 것이 여자아이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잠시 그녀를 살펴보던 알베르트가 말했다.

“지아?”

“또 아는 사이야? 이쯤 되면 내 세상이 작은 건지, 알의 세상이 작은 건지 구분이 안 되네.”

기가 찬다는 목소리를 낸 것은 유피였다.

“슬럼가를 안내해줬던 아이야.”

“어련하시겠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월편을 먹었다고 생각해. 내가 조치한 것도 있지만.”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가슴과 달리 소녀는 눈을 뜨지 않는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모습은 유피를 떠올리게 했다. 알베르트의 초조함이 느껴졌던 걸까, 상황을 지켜보던 콜린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의국에서 말하기를, 상태가 급변하지 않는 이상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어요. 최악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으셔도 될 거에요.”

“반대로 말하면 목숨만 붙어 있다는 말이잖아. 썩 좋은 상황은 아니네. 혹시 그런 이야기는 없었어? 의식을 되찾지 못하면 백치(白癡)가 될 확률이 높다든가.”

“백치?”

그게 뭐냐는 아이네르의 물음에 유피는 대답했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야. 행동이나 말이 덜떨어지고, 정신연령이 어려지게 되는 일종의 병과 비슷해. 내가 이 아이를 발견해서 조치한 것이 거의 한 달이 되어가니까. 슬슬 위험할지도 몰라.”

“반짝이 황녀님은 유식하네요.”

“아이네르 님이 무식한 거예요.”

아이네르의 손이 콜린의 뒤통수를 갈겼다. 후두부를 부여잡은 부관이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마차는 제가 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집사. 내 부관이 마차 하나는 잘 몰거든. 지난번 일도 사과할 겸, 황녀님이랑 같이 안쪽에서 쉬고 있어.”

“…….”

끙끙거리는 콜린의 뒷덜미를 잡은 아이네르는 마부석으로 향했다.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인 두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지아의 맞은편에 유피가 앉는 걸 확인한 알베르트는 비좁은 공간에 앉았다. 살짝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피는 자신의 옆자리를 보았다. 이쪽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호랑나비 객잔에서 라피엘을 만났던 날의 이야기인데.”

지아의 상태를 살펴보는 알베르트를 향해 유피는 입을 열었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거든. 혹시 내가 이상한 말을 하진 않았어?”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어. 그냥 세상 사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야.”

“정말이야?”

“내가 비밀로 할 이유도 없잖아.”

“…….”

못 미더운 시선이 돌아왔다.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꺼낸 그녀는 쉽사리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말해봐.”

“유피가 내게 서운했던 이야기나, 평소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 정도려나.”

아예 거짓말은 아니다. 약간의 사실을 섞는 건 처세술의 기본이었다.

자연스러운 알베르트의 대답에도 뭔가 탐탁지 않다는 듯 그녀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유피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날의 일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다. 조금 부자연스럽지만 여기서는 화제를 돌려보자.

“그보다 유피,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봐.”

“마녀라는 건 어떤 존재인 거야? 원래 중원에는 마법사가 없었잖아.”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눈치를 보아하니, 당연히 그 날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다. 착실한 그녀는 알베르트의 물음에 대답했다.

“구시대에는 말이지.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신녀(神女)를 비롯해 소수 민족이 받드는 신녀가 있었어. 서로 모시는 신도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달랐던 이들이지만. 영적인 능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저주를 받고 난 이후, 가장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신녀들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들이 교감하는 신이 타락한 것인지, 혹은 마기에 의해 무언가가 뒤틀린 건지는 아무도 몰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의 신녀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몸 안에 들어온 마기와 타협하는 길을 찾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죽었다는 것뿐이야.”

“살아남은 신녀들이 마녀의 기원이라는 말이구나.”

“그래.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신녀들은 태산(泰山). 지금은 마녀의 산이라 부르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동포를 위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어. 의학에 밝은 자, 주술에 밝은 자, 역사에 밝은 자. 서로 다른 신을 모시는 신녀들의 지식은 방대했고, 이들의 지식을 아우르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현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위나 바토리.”

유피의 스승님인 마족 최후의 현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설명을 이어갔다.

“본래 신녀 중에서 주술에 밝았던 이들은 이를 연마해 전설로만 칭해지던 기적을 재현할 수 있게 만들었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스스로를 신녀가 아니라 마녀라고 자칭했어. 더는 신의 말을 대변하는 이들이 아니라, 신비한 힘을 쥐고 다루기 시작했으니까.”

그것이 마녀의 시작이다.

요컨대 루미에르 교의 사제들이 마법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인가 보다.

“너희가 다루는 마법과 우리가 다루는 마법이 다른 것은 그런 까닭이야. 우리 마녀들이 다루는 마법은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해. 교감을 통해서 그 힘을 빌려오는 것이 우리가 발하는 기적의 정체야. 하지만 너희의 마법은 다르지. 그건 세계를 일그러뜨리고 강제로 힘을 가져오는 마법이야. 일찍이 드래곤들이 사용했다는 용언(龍言) 마법과도 비슷해. 그들도 마법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파멸을 맞이하고 말았지. 서클 마법도 마찬가지야. 언젠가 세상에 커다란 균열을 가져올지도 몰라. 가령 시공간을 어지럽히는 금단의 술을 구사한다든지 말이야.”

“…….”

[제법이군요. 과연 마스터가 사랑하는 여자답습니다.]

금단의 술.

아가씨가 행한 회귀 마법에 대해서 그녀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의문이 고개를 들었으나, 알베르트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유피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차는 낙양의 외곽 지역을 달리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다. 길은 다듬어져 있었지만, 마물의 배설물이 보이는 걸 보아 안전한 장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물의 시체가 눈에 밟힌다. 순찰병들과 마주친 것인지, 마차 밖에서 아이네르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몇 안 되는 소수 병력이 치안에 힘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천일소화는 상당히 위험한 곳에 살고 있네.”

곧 낡은 약방이 눈에 들어왔다.

콜린이 마차 문을 두들겼다. 도착했다는 목소리를 들은 알베르트는 문을 열었다.

마차 밖에는 한쪽 머리를 올린 소녀가 있었다.

약초를 채집하고 있었던 건지, 그녀의 얼굴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급한 대로 손을 옷가지에 닦은 소녀는 어설프게나마 예의를 갖췄다.

“유피에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란랑.”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안녕, 란랑.”

예의 바른 미소가 적의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몰상식한 집사분도 있었군요. 별로 반기고 싶지 않네요.”

“혹시 내가 너에게 뭔가 잘못 했니?”

유피를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란랑의 태도에 알베르트가 물었다.

“아뇨. 그냥 당신이 마음에 안 드는 것뿐이에요. 또 어머니를 힘들게 만들 거잖아요? 하여간 무인들이란. 왜 그렇게 이기적인지 모르겠다니까.”

“…….”

이미 전과가 있는지라 알베르트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늦게 오셨네요. 어머니는 약초를 캐러 출타 중이신데,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상관없어. 시간까지 정해놓고 온 건 아니니까. 그보다 이 아이 좀 봐줄 수 있을까?”

“새로운 환자군요. 진맥은 안에서 할게요. 거기 힘만 쓰는 언니. 안쪽으로 좀 옮겨주세요.”

“들었지? 콜린.”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란랑은 지아를 안은 콜린과 함께 약방으로 들어갔다.

불만 하나 표하지 않은 부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네르가 말했다.

“더 시킬 일은 없으신가요? 반짝이 황녀님.”

“됐어. 여기까지 해준 것도 고마워.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게.”

“부담 갖지 말고 말하세요. 황녀님은 제 마음에 든 분이니까, 특별히 이것저것 해줄 수도 있어요.”

“그래? 그럼 라피엘 좀 도와주지그래.”

“그건 싫어요.”

아이네르는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그녀는 약방에서 나오는 콜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적재적소라는 게 있잖아요. 전 머리가 나쁜 편이어서, 무식하게 힘을 쓰는 쪽이 알맞아요. 그쪽은 라피엘이 전문이에요. 그리고……. 그 애는 한 번 꺾이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천천히 쉬어가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피엘이 쓰러지고 난 후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거예요. 제 치맛자락을 잡고 울고불고해도 말이죠.”

“이상한 우정도 다 있네.”

“우리는 지저 출신이니까요. 들개에게는 들개만의 방식이 있는 법이에요.”

하얀 치아를 드러낸 그녀의 입가에 야수를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의 웃음과는 다른 무인에 어울리는 폭력으로 물든 웃음이었다.

“너희도 참 힘들게 사는구나. 이해하기 어려워.”

그래도 싫은 방식은 아니다. 유피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라피엘이 울고불고한 일이 있어?”

“그건 상상에 맡길게요, 반짝이 황녀님.”

아이네르는 콜린과 함께 마차로 향했다.

“재밌었어요, 반짝이 황녀님. 또 다음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 고생했어, 아이네르.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예의를 배워오면 좋겠네.”

“예의요? 저한테 그런 건 힘들다는 거 알고 계시죠?”

빙긋 웃은 아이네르는 콜린과 함께 마차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마차 위에서 끝까지 손을 흔드는 아이네르를 보며 유피는 지쳤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뭔가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네.”

“그러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지 않았어?”

“눈치가 빠른 것도 생각해 볼 일이구나, 집사.”

“아가씨의 의중을 읽어내는 것도 내 일이지.”

알베르트의 대답에 유피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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