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시녀의 고민
모름지기 사용인들의 아침이 그러하듯, 시더 황자의 전속 시녀인 라피엘 슈네르의 아침도 빠른 편에 속했다. 그녀의 하루는 수탉이 울기 전부터 시작된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침대에서 살며시 눈을 뜬 라피엘은 몸을 일으켰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경치가 어둡다. 평소와 같은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욕실로 향했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머리의 물기를 닦아낸다. 단발을 말끔하게 말린 뒤, 잠자리를 정리했다.
이부자리를 깔끔하게 치운 라피엘은 준비해놓은 시녀복으로 갈아입었다.
라벤더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머리를 고친 라피엘은 거울을 확인했다.
구김 하나 보이지 않는 시녀복.
흠잡을 곳 없이 깨끗한 머리.
살짝 피부가 거칠어진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합격점은 줄 수 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그녀의 전장으로 향할 차례다.
창문 밖에서 떨어지는 햇빛을 본 라피엘은 방 밖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준비된 조식을 챙겨간다.
다른 사용인들과 마찬가지로 다진 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빠오즈를 챙긴 라피엘은 집무실로 향했다. 한 손에는 빠오즈를, 다른 한 손에는 어제 검토하고 남은 서류를 살펴본다. 여유가 없다.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오전 내로 「반으로 갈라진 황하 사후 처리 안내」 사안을 처리하지 못하면 점심은 포기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본래는 그녀가 처리해야 할 안건이 아니다.
아무리 시더 황자님이 어느 정도 권한을 위임해줬다지만,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 건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북부 전선에서 내려온 건 그녀 혼자가 아니다. 원활한 사건 처리를 위해서 시더 황자님은 두 남녀를 붙여줬다.
무력만 놓고 본다면 부대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철혈명도 다니엘 아이네르.
그녀의 부관이자 현자님의 뒤를 이어 대도서관의 사서를 보고 있는 주술사 콜린 디아트리스.
힘이 필요하다면 힘으로. 머리가 필요하다면 머리로.
황자님의 혜안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사건이 끝나기 전까지는 라피엘도 그렇게 여겼다.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지만.
태연한 소꿉친구의 얼굴을 떠올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피부의 상태가 점차 나빠지고 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익숙한 집무실로 돌아온 라피엘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도로 문을 닫았다. 고개를 든 그녀는 방문을 확인했다. 복도를 둘러본다. 다른 방과 착각한 건 아니다. 분명 어제까지 자신이 일하고 있던 집무실이 맞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마음 한 편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윽고 현실을 받아들인 라피엘은 집무실을 살펴보았다.
분명 어젯밤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말끔하게 정리했던 방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애써 정리한 서류가 흩날려있는 건 물론이고, 그녀가 정자로 새겨넣은 족자도 반으로 찢겨 있었다. 너덜너덜한 그 모습이 안쓰럽다. 망연히 서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라피엘의 얼굴에 떨림이 생겨났다. 시선을 돌리자 그쪽에는 두 동강 난 벼루가 보였다. 안에서 흘러나온 검은 먹이 집무실 바닥에 흥건했다. 몇몇 서류는 그 난장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 결재만 남은 서류.
이제 결재가 올라가야 하는 서류.
오늘 있을 정기 보고에서 시더 황자님께 보여야 할 서류들이, 전부 쓰레기더미가 되어 있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는데.
밤을 새워가면서. 매일 새벽에 잠이 들면서 간신히 처리한 서류였는데.
눈앞이 새하얘진 라피엘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발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짓밟혔다. 으악, 하고 작은 비명이 났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못쓰게 된 서류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집무실 한쪽에 준비해둔 찻잎을 달인 그녀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허브향이 콧가를 간질였다.
완전히 해가 뜬 창문 밖을 라피엘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슬프게도, 오늘따라 하늘이 맑아 보였다.
“으히, 으히힛. 라피엘도 같이 노오올자.”
“더, 더는 못 마셔요. 살려주세요, 아이네르 님.”
끙끙 앓는 두 남녀의 목소리에 라피엘은 집무실 안을 바라보았다.
바닥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 남자와 집무실 책상을 침대 삼아 누운 소꿉친구. 그녀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헤벌레 입꼬리를 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시녀는 창가에서 벗어났다.
아직 뜨거운 차를 잔에 받은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꿉친구의 얼굴에 부었다.
오늘은 분명 피곤한 날이 될 것이다.
*&*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무실을 정리하는 데는, 꼬박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콜린이 도와줘서 다행이었다. 숙취에 시달리는 그녀의 소꿉친구는 방을 더 어지럽히기만 했다. 숙취에 시달리지 않았어도,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환기를 마친 라피엘은 집무실의 의자에 앉았다.
다 식어버린 차를 든다. 책상 위에는 아이네르가 먹다 남은 백주가 남아 있었다. 총 6병. 많이도 사 왔다. 빈 병이 네 병. 아직 내용물이 남아 있는 병이 두 병이다.
술병 너머로는 무릎을 꿇고 앉은 아이네르와 콜린이 보였다.
“저기 라피엘.”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좋습니다. 못 들어줄 것도 없죠. 한 번 해봐요, 변명.”
날카로운 시녀의 목소리에 콜린이 히익, 하고 몸을 떨었다.
차갑게 식은 라피엘의 시선은 변명을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사과다. 일단 두 손부터 싹싹 빌고 봐야 한다. 콜린은 자신의 상관을 보았다. 아무리 아이네르가 바보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것이다. 변명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간절함이 담긴 부관의 시선을 받은 아이네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말이야. 사실은 이 백주, 너한테 주는 깜짝 선물이야.”
“깜짝 선물?”
“응. 요즘 매일 고생하고 있으니까. 술이라도 마시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피로도 조금 날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봐, 안주도 잔뜩 준비했어. 내 봉급을 털어서 말이야.”
“대부분 제 봉급이겠죠.”
아이네르의 손이 움직였다.
부관의 복부로 들어간 주먹은 깔끔하게 명치로 들어갔다. 순간 숨이 막힌 콜린은 몸을 수그렸다. 그래도 목소리를 내려 하는 부관의 입을 그녀는 후려쳤다. 쓰러진 콜린이 꿈틀거린다. 라피엘이 질렸다는 시선을 받으며, 아이네르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너무 늦게 와서 말이야. 집무실에 오고 보니까 새벽이더라고. 그냥 돌아가는 것도 그래서 어쩔까 하다가. 라피엘은 일찍 일어나잖아? 그래서 준비해두면 될 것 같아서 차려놓았는데.”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상황을 짐작한 라피엘이 말했다.
“술이 당겨서 먼저 먹었다는 거군요.”
“그래, 역시 라피엘이라니까!”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꿉친구가 한 명.
아니, 정정한다. 바보다. 바보가 한 명 여기 있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황자님과 똑같습니다.”
“왜 또 갑자기 칭찬하는 거야.”
“칭찬한 거 아닙니다.”
“황자님을 거론했다는 건 칭찬이잖아.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부끄러워하기는.”
“…….”
라피엘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화를 대변하듯이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대답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라피엘이 노려보자 아이네르는 고개를 돌렸다. 되지도 않는 휘파람을 불고 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소꿉친구다.
그녀의 사생활이 너무 쉽게 연상된다. 콜린을 괴롭히고. 수련한다. 콜린을 괴롭히고. 수련한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 그러다가 볼일이 보고 싶어지면 해우소를 간다. 콜린을 괴롭히고. 수련한다. 따분해지면 그녀를 찾아온다.
...
......
바보를 진지하게 상대하는 건, 바보밖에 없다.
“아이네르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라피엘 정도는 아니야.”
이런 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단순할 수 있는 걸까.
조금 안쓰러운 기분마저 든다. 그녀는 차라리 지저에 남아 있는 쪽이 더 좋았던 게 아닐까?
그때의 아이네르는 그래도 날카로운 맛이라도 있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것도 그 황자님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그분의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라피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눈은 조금 기분 나쁜데. 칭찬한 거 아니지?”
“칭찬하고 있는 겁니다.”
“진짜야?”
“물론이죠.”
진심이다.
라피엘의 대답에 아이네르는 방긋 웃었다.
라피엘의 화가 풀렸다는 걸 느낀 아이네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러진 콜린을 툭툭 건드린다. 대답이 없다. 단순한 시체인 것 같다. 의식이 없는 콜린을 갖고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소꿉친구를 내버려 둔 채, 라피엘은 일을 시작했다.
시작이 너무 늦어졌다.
처리해야 할 일이 배로 늘어나 버렸다. 정리해놓은 서류도 다시 처리해야 한다. 저녁에 올리는 보고를 미룰 수는 없다. 급한 대로 정리라도 해둬야만 했다.
응접실 바닥에 누워 있는 콜린의 위에 아이네르는 앉았다.
뭔가 안타까운 소리가 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콜린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과격해지고 있었다.
가끔 도가 지나치긴 하지만, 그게 소꿉친구의 애정표현이라는 걸 라피엘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상대와 접촉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물론 열이면 열. 그 상대는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 그래도 콜린은 꽤 오래가는 편이다. 이렇게까지 시달리면서도 버티는 걸 보면, 의외로 당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콜린의 취향은 그런 쪽인가.
별로 친해지고 싶은 성향은 아니다. 거리를 두는 편이 좋겠다.
“그것만 보지 말고 좀 같이 놀자.”
“해가 지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야 사랑하는 황자님 때문에?”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
드물게도 라피엘이 큰 목소리를 냈다.
이 서류는 전부 소꿉친구의 일이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사후 처리를 전부 라피엘에게 맡기고 도망쳤다. 그나마 쓸만한 부관까지 데리고 휴가를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직도 며칠 전에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표현을 안 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녀는 거의 한계에 가까웠다.
두 눈을 크게 뜬 아이네르는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라피엘은 깊게 숨을 토해냈다. 목소리를 고른다. 한 모금밖에 남지 않은 차를 다 마신 그녀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흥분했군요, 아이네르.”
어른스럽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던 아이네르는 대답했다.
“라피엘이 화내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네.”
“저도 사람입니다.”
“그래, 화가 나면 화도 내고 그래야지. 그래야 속이 좀 후련해지지 않겠어?”
“…….”
책상 위로 올라온 소꿉친구는 서류를 깔아뭉갰다. 시선이 마주치자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다.
처음부터 라피엘이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꿉친구의 의도를 뒤늦게 깨달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어렸을 때부터 미워할 길이 없는 친구다.
“어깨에 힘 좀 빼라고 매번 말하는데 말이야.”
“어깨가 무거운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래서 어깨가 망가지기 전에 온 거야. 그대로 곪아버리면 힘드니까.”
“곪게 된 원인을 만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닙니다.”
그녀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똑, 하고 백주를 딴 아이네르는 빈 찻잔에 술을 따랐다. 술병을 든 아이네르의 손을 본 라피엘은 술이 든 찻잔을 들었다. 서로 백주를 나눈 두 여인은 웃었다.
“그래서 진짜 목적은 뭔가요? 술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들켰어?”
“당연하죠.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녀의 등 어디에 점이 있는지까지 알고 있는 사이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천일소화가 방문할 예정이야. 신당에 구금되었던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가 봐.”
“또 빚을 지게 생겼군요.”
“빚?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평범한 의원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이름값이 다르니까요.”
단순히 보수를 지불하면 되는 다른 의원과는 다르다.
치우 아란은 치료의 대가를 받지 않는다. 적절한 보수를 줘도 거절하고, 물건으로 대체해도 그 자리에 두고 간다. 순수한 선의로 타인을 치료하고, 의술을 행하는 의녀다.
숭고한 그 행위는 어딘지 모르게 강박증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치 남을 치료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녀의 딸도 포함해서.
“의국으로 가겠군요.”
“아, 따님 쪽은 옥으로 간다고 했어.”
“그렇습니까?”
여전히 악취미다.
치우 란랑을 떠올린 라피엘은 고개를 저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반짝이 황녀님은 점심 먹고 방문한다고 했어.”
“네?”
“반짝이 황녀님이 놀러 온다고 했다고.”
“…….”
집무실을 청소하면서 시간은 점심을 훌쩍 넘겨있었다.
거짓말이죠? 하는 라피엘의 시선에 아이네르는 문을 가리켰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라피엘, 들어가도 되지?”
낯익은 황녀님의 목소리였다.
라피엘은 진심을 담아 서류로 소꿉친구의 머리를 때렸다.
웃는 얼굴 그대로 넘어간 아이네르는 콜린의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