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반짝이 황녀님(2)
“설마 황녀님께서 저희 가게에 방문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런 영광이 또 있을까요? 그러니까, 아 맞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죠. 차, 그러네요. 차부터. 일단 차부터 내올까요!?”
“유피.”
“나도 몰랐어.”
유피는 고개를 저었다.
흥분한 호접희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우연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객잔의 이름이 호랑나비였지. 알베르트는 들떠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낙양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여기서 일하는 거야?”
“일? 그렇군요. 모르고 오신 거군요. 그래요. 저도 참,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황녀님이 저 같은 걸 만나러 일부러 올 리가 없는데.”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그녀의 기분이 단번에 내려갔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 화장을 할 만한 여유도 없는 걸까. 연지는 물론이고, 백분조차 바르지 않은 얼굴이다. 이렇게 보니 유곽에서는 그렇게나 아름다웠던 기녀가 평범한 여인으로 보였다.
기운 없는 그녀의 모습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듯 유피는 눈가를 찌푸렸다.
“호접희라는 예명(藝名) 말고, 본명은 어떻게 돼?”
“단예, 소단예(蘇端藝)라고 합니다, 황녀님.”
“예쁜 이름이네. 모처럼 유곽에서 벗어난 거니까, 좀 더 웃고 지내.”
“네?”
“네 장점은 밝은 것뿐이니까. 웃으라고 말한 거야.”
“…….”
유피 나름대로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던 거겠지.
차가운 말과는 달리 부드러운 그녀의 어조에 단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전에 알베르트는 말했다.
“설마 낙양에서 객잔을 냈을 거로는 생각도 못 했어. 근데 객잔이라면 가희의 꿈이지 않았어? 단예는 가게를 내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 풀리지 않더라고요.”
“혼혈이어서 거절당한 거네.”
“세상사라는 게 참 힘드네요.”
“혼혈에 대한 낙양의 인식은 그대로니까.”
“괘, 괜찮아요! 오히려 더 좋은 건지도 몰라요. 잡화점도 아니고 객잔을 양도받았는걸요!”
객잔과 작은 잡화점.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대부분은 사람은 객잔을 더 높게 쳐주리라.
“제갈윤이라고 했던가? 네 남편이 고생을 많이 했겠네.”
왜 그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단예는 두 눈을 깜박였다.
“너 모르게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야. 혼혈 출신의 아가씨가 손쉽게 객잔을 넘겨받을 수 있을 리 없잖아. 보나 마나 뒤에서 손을 쓴 거겠지. 과연 제갈세가의 사람이야.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모양이네. 하긴, 그러니까 이런 어처구니 없는 도피행도 생각했겠지. 돌아오면 상이라도 주는 건 어때?”
“아, 알베르트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슬럼가에서 만났던 지아의 이야기를 떠올린 알베르트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혼혈이라는 출신은 양지에서의 활동을 막았다. 그것은 일종의 족쇄였다. 마치 귀족과 노예 같다. 순혈과 혼혈이라는 건 제국의 신분 제도를 보는 느낌이었다.
“귀화루의 사람들과는 연락하고 있어?”
“아직은요. 이쪽 일이 안정화되면 연락하려고요.”
“그게 아니겠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겠지. 잘살아 보겠다고 기루에서 나간 건데, 막상 밖에서 이런 식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걱정할 게 뻔하니까.”
“우, 우우……. 아, 알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노력했는데, 그래도 이런 걸 어떡해요.”
결국, 단예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목이 터져라 울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유피가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녀의 눈치를 보니 맞받아칠 줄 알았는데, 정말로 울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단예는 생각보다 더 궁지에 몰려있었던 모양이다. 유피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다. 유피는 알베르트를 불렀다.
“알.”
“빚 하나 진 거야.”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알베르트는 단예에게 건넸다.
손수건을 받은 그녀는 눈가를 훔쳤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모처럼 예쁜 얼굴이 망가지고 있다. 말은 따로 필요하지 않다. 알베르트는 깨끗한 손수건을 다시 건넸다.
손수건을 몇 개나 썼을까. 한차례 눈물을 쏟아낸 단예는 감정을 수습했다.
못 볼 모습을 보여줬네요, 하고 눈이 퉁퉁 부은 그녀는 알베르트를 보고 웃었다.
“기루에 있었다면 이런 일에도 귀가 밝았을 텐데. 사정이 안 좋은 이유라도 있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그런 쪽의 일은 주로 가희가 도맡아서 처리했거든요. 전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을 뿐이에요.”
확실히 꽃밭을 걷는 느낌의 단예와 달리 가희는 똑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기녀였다.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했던 걸지도 모른다. 상황이 그렇다면 사람을 수배하는 일이 먼저다. 호접희는 수완이 좋지 않다. 일단 셈이 빠른 사람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유피의 생각도 알베르트와 같았는지, 찻잔을 든 그녀가 말했다.
“그럼 가희부터 불러와야겠네.”
단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설명이 부족한 건 유피의 나쁜 버릇이다. 아리송한 단예의 시선에도 알베르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낙적에 드는 금액은 너랑 비슷하려나? 꽤 비쌀 테니, 변태 오빠의 돈 좀 당겨 써야겠네.”
“자,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낙적이라니요. 황녀님께서 왜……?”
“지인을 위해 힘을 써주는 건 평범한 거 아냐?”
“지인…….”
놀란 건 단예만이 아니다. 두 눈을 크게 뜬 알베르트도 유피를 보았다.
지금 그녀는 기녀 출신인 단예를 자신의 친구라고 말한 것이다.
“단예. 너는 네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야. 빚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러네. 가희를 데려오는 김에 송이라는 애도 데려오자. 그 아이라면 접객도 잘 할 것 같으니까.”
굳어버린 단예를 뒤로 한 채 유피는 전서를 휘갈겼다.
유려한 필체는 순식간에 서신을 완성했다. 돌돌 만 전서를 유피는 그녀에게 건넸다.
“양양으로 보내. 변태 오빠가 보면 바로 조치해줄 거야.”
“…….”
“왜 그래?”
유피를 멍하니 바라보던 단예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유피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과실에 맞닿은 유피의 얼굴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이 은혜는 대대손손 잊지 않을게요!”
“아, 알았으니까 좀 떨어져.”
어째 세실리아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이 분명하다. 그로부터 한참 기쁨을 표현하던 단예는 유피의 성난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리장은 따로 있지만. 이쪽도 손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여서, 손을 빌려주지 않으면 요리가 제때 나오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멀어진다. 안색이 창백한 유피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생각났어. 내가 왜 저 여자를 탐탁지 않아 했는지.”
“마음에 든다는 걸 잘못 말한 거 아니야?”
“알은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구나.”
“크든, 작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 가슴의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한 거야.”
“…….”
“말해두지만, 나는 유피라면 딱 좋다고 생각해.”
“누, 누가 물어봤어?”
손으로 가슴을 가린 유피로부터 당치도 않은 시선이 돌아왔다.
그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알베르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시선을 돌린 건 유피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그녀가 입을 열려던 찰나. 객잔 안으로 한 손님이 들어왔다.
두 사람을 본 손님은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유피에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괜찮아, 라피엘. 우리가 일찍 나온 거니까. 못 본 사이 피부가 많이 상했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최근 일이 바쁜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변명하지 않는 게 그녀다웠다.
알베르트는 의자를 끌어다 놓았다. 유피의 허락을 받은 라피엘은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모양이네. 신당 앞의 소란이 계속 커지고 있어. 최근에는 주먹이 오간다는 말도 있던데. 전부 사실이야?”
“신교의 영향력이 저희 생각보다 더 컸을 뿐입니다.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할 예정입니다.”
“오빠라도 내려오면 편할 텐데.”
“황자님이 전선에서 자리를 비우실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어. 하고 유피는 두 손을 모았다.
“그래서 이신설교는?”
“아직 제대로 된 조사는 시작도 못 했습니다. 월궁에 있는 건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신설교가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대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교와 이설교. 달토끼와 검은 뱀. 무엇 하나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알에게 들었어. 이신설교는 두 종파가 합쳐진 것이라고. 예전에 큰 종파 싸움이 있었고, 이설교가 곳곳으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도.”
“문제는 그 이설교가 섬기는 신이 캘러미티가 섬기는 신과 비슷합니다. 선녀님의 이야기로 추측해보았을 때, 이설교의 생존자들이 캘러미티의 광신도가 된 것 같습니다.”
“즉, 캘러미티가 이설교라는 거네?”
“그렇습니다.”
피곤해지는 이야기다.
캘러미티가 광신도라는 건 대륙의 모든 사람이 꿰고 있는 사실이다. 그 광신의 시발점이 된 게 마족의 종교라는 걸 동포들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웃을 수도 없는 이야기다.
“광신도인 캘러미티가 섬기는 게 이설교의 검은 뱀이라면 그 목적은 뭘까요? 검은 뱀은 조화를 추구하는 신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캘러미티의 목적은 조화를 원하는 거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캘러미티의 행동 원리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죠. 마기의 축복을 받길 원하고, 그 마기를 토대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거죠.”
마기의 축복.
다른 말로 하면 캘러미티는 마족처럼 마기를 다루고, 본신의 힘을 쓰길 바란다는 말이다.
“야만인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녀석들의 머리에는 마기밖에 없을걸?”
비꼬는 유피의 말에 알베르트는 대답했다.
“그렇지도 않은가 보구나.”
“그래, 정말로 그랬다면 녀석들이 전선까지 내려올 일도 없었을 거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전황은 어때? 진작 끝났어야 할 전쟁이 왜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건지 궁금한데.”
“국지전은 몇 번 벌어졌지만, 큰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선에서 서로 병력을 모으면서 신경전만 벌인 것이 요 반년간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 제가 전장에서 떠난 이후로도 큰 변화는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겨울은 전쟁을 치르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지. 녀석들은 기다리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이제 북부도 따뜻해지는 날씨니까요.”
“우리가 예상하는 적의 수는?”
“만약 야왕이 정말로 부족을 통일했다면, 짐작할 수도 없는 수가 국경선을 밟을 겁니다.”
“…….”
캘러미티의 부족 수는 최소 수백. 각기 전통은 물론이고 부족의 규모도 천차만별이다.
개개인의 힘만 놓고 본다면 야만인들은 동포의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과 싸움은 달랐다. 규모 자체가 다르다. 단순히 개인의 힘으로 패자를 가를 수 있었다면, 제국 또한 마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안식의 땅을 찾고 있을 때, 녀석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을 경험했지. 정말로 얕볼 상대가 아니구나.”
“황자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내려오지 못했지. 그만큼 녀석들이 위협적이라는 소리야.”
반가운 이야기가 아니다. 마족의 적은 캘러미티만이 아니다.
건장한 병사들이 전선으로 향할수록 후방의 경계는 얇아졌다. 척박한 마계의 땅에서 나타나는 마물은 물론이고, 제국의 움직임도 마음에 걸렸다.
“최근에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전선에서는 소규모 약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 큰 피해는 없지만, 캘러미티의 군세가 커지고 있으니 조만간 약탈이 본격화될 겁니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을 거야. 아무리 야왕이 전 부족을 통제하에 넣었다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적이었던 이들이야. 부족 사이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걸.”
“희망적인 관측입니다, 황녀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베르트는 말했다.
“황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캘러미티는 부족들끼리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합니다. 매년 겨울이 되면 세인트 월로 녀석들이 내려오는데, 약탈할 때도 서로의 등에 칼을 꽂는다는 일화는 제국 내에서는 유명합니다.”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선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야왕이 아무리 대단한 왕이라고 해도 부족 간의 적개심은 몇 년 내로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부모님과 형제를, 가족을 죽인 이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서로 등을 맡기고 싸우다가 그 칼에 목숨이나 잃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만약 그 적개심마저 야왕이 전부 해결했다면…….”
“그때는 전쟁이 일어나겠지.”
마족은 물론이고 제국까지도 전부 집어삼킬 전란의 파도다.
“자매들에게 이야기해둘게. 여차하면 마녀들이 전선으로 나설 거야.”
“감사합니다, 황녀님.”
“감사할 것 없어. 자매들이 전선으로 나설 정도라면 그때는 전국(戰國)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알고 있지? 그렇게 되면 마계 전체가 전시에 돌입하게 될 거야.”
그런 건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미개한 캘러미티들이나 바라는 끔찍한 시대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유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