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반짝이 황녀님(1) (113/200)

 # 113

반짝이 황녀님(1)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다.

따뜻함을 넘어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는 계절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알베르트는 객잔에서 나오는 유피를 바라보았다. 흰색과 붉은색이 고루 들어간 드레스는 마족 특유의 전통의상이다. 코르셋 부분에 하얀 꽃이 있는 옷차림은 양양에서 봤던 바로 그 옷이었다.

하늘색 양산을 핀 유피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그녀의 외출은 근 반 달 만의 일이었다. 알베르트는 걱정스러운 내심을 숨길 수 없었다. 솔직한 말로 이 외출이 달갑지 않았다. 유피가 침상에서 일어난 지 이제 겨우 3일째다. 하루는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침상에서 떨어졌을 정도다. 가벼운 거동이라면 모를까, 적극적인 활동을 할 만큼 그녀의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천일소화가 준 약이 아니라면,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못 하리라. 아란 씨가 준 회정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약을 받기 위해서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그녀의 약방을 방문해야 했다.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말하는 거야. 오늘만 날인 건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 천일소화의 약은 잘 듣고 있어.”

“약 기운이 없으면 못 움직인다는 말이잖아.”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말이야. 알은 잔걱정이 너무 많아. 난 어린애가 아니야.”

“유피.”

“네, 네. 알았어요. 우리 집사님이 그러자면 잠자코 따라야지, 어쩌겠어.”

“약속한 거야?”

“상황에 따라서.”

확답을 주지 않은 유피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위태로운 발걸음을 보고 있던 알베르트는 묵묵히 그녀의 곁을 따라갔다.

두 사람이 이렇게 외출을 나온 것은, 유피의 촉매제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알베르트는 잘 모르지만, 본당에서 그녀가 사용한 촉매제는 꽤 귀중한 물품이었다는 모양이다. 마녀의 산이 아니면 구할 방법이 없다든가. 모처럼 낙양에 있으니 혹시 있을지도 모르니. 시간이 날 때 구해두자는 것이 외출의 발단이었다.

“일단 노점상부터 돌아보자. 전부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쓸만한 건 찾을 수 있을 거야.”

“약속 시간은 해가 지고 난 뒤였지?”

“응, 해가 질 때쯤 호랑나비 객잔에서 보자고 했으니까. 여유롭게 돌아보자.”

라피엘과는 저녁 약속이 있었다.

장소는 동쪽 거리에 있다는 호랑나비 객잔이다. 최근 주인장이 바뀌었다는 객잔은 인적이 드문 가게라 비밀스러운 만남을 갖기에는 좋다고 했다.

“촉매제를 구하려면 언니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분명 어쩌다가 쓴 거냐고 물어볼 게 뻔하거든. 소란스러워지는 건 피하고 싶어. 가능하면 거리에서 구해보자.”

“걱정 끼치기 싫다는 거네.”

“무슨 소리야? 내가 귀찮다니까.”

“내가 이래서 유피를 좋아해.”

“뭐, 뭐라는 거야. 정말…….”

살짝 얼굴이 붉어진 유피는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몸의 상태가 나쁘다는 걸 보여주듯이, 그녀의 발걸음은 위태로웠다.

[평소와는 반응이 다르군요.]

‘그런가?’

투덜거리는 그녀의 뒤를 쫓아 알베르트는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남쪽 거리였다.

특정 가게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거리에 자리를 잡은 노점상이 오늘 목표였다. 유피는 거리에 나온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노점상이 취급하는 물건은 각양각색이다. 먹을 것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생필품, 노리개들은 물론이고. 몇몇은 무기까지 취급하고 있었다. 물건들을 천천히 살펴보던 유피는 이윽고 목적으로 했던 것을 발견했는지 발을 멈췄다.

몸을 수그린 그녀가 잡은 물건은 검게 빛나고 있었다.

작은 소쿠리 안에 담긴 건 버섯처럼 보이기도 하고, 과일처럼 보이기도 하는 괴상한 식물이었다.

“조금 오래되긴 했는데……. 그래도 상태가 괜찮네. 아저씨, 여기 꺼낸 게 전부인가요?”

“젊은 소저가 이런 것에 관심도 있는 건가? 내가 자네라면 당장 그 손을 놓을 것 같은데.”

화려한 아가씨가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은 아니다.

상인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유피를 보았다.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아가씨가 살만한 물건이 아니다. 장난이라면 다른 곳에 치라는 듯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맨드레이크의 뿌리잖아요. 숲 깊은 곳에서만 돌아다니는 영악한 녀석들이죠. 사냥하려고 해도 적의를 쉽게 느끼는 녀석들이어서. 생각 외로 잡기도 힘들고요.”

“눈썰미가 제법이군. 그렇다면 알고 있을 텐데. 단순히 소저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잡동사니는 아니지.”

요컨대 상인이 하고 싶은 말은 가격이 상당하다는 말이다.

“얼마나 드릴까요?”

“최소 삼십 냥이다.”

“생각보다 싸네요. 악성 재고였나 보죠? 여기 있는 거 전부 주세요.”

알베르트는 유피에게 받은 주머니를 꺼냈다.

안쪽에서 전표를 분류한 그는 상인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 안의 전표 세 장을 확인한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뿌리는 열 개. 확실한 대금이다. 맨드레이크의 뿌리는 유피의 복주머니로 들어갔다.

“다른 건 더 없나요?”

“촉매제를 찾는 거라면 안쪽으로 더 들어가 봐. 나는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이 아니야. 마귀할멈이 오늘 나왔을 거다. 그 노파는 이상한 물건을 취급하니까, 아가씨가 바라는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

“고마워요. 많이 파셨으면 좋겠네요.”

“아가씨가 사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오늘은 빨리 들어갈 수 있겠구먼.”

상인이 말한 거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슬럼가로 들어가는 것처럼 노점상의 물건이 바뀐다. 일상용품을 주로 다루던 물건들이 위험한 느낌을 주는 물품으로 변했다. 수상쩍은 냄새를 풍기는 풀부터 시작해서, 독 기운이 올라오는 액체. 하얀 천으로 가린 단검. 이 자체가 톱날처럼 되어 있는 암기도 보인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손님들도 얼굴을 가린 이들이 많다.

이목이 쏠린다.

유피와 알베르트의 모습은 이곳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 같은 아가씨와 집사가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니다. 차라리 유피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입는 로브가 어울리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왜 오늘은 로브를 입고 나오지 않은 걸까? 이런 곳이라는 걸 그녀가 몰랐을 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라피엘을 만나러 가는 데 변변찮은 옷차림으로는 갈 수 없잖아.”

그 물음에 유피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애초에 오늘 자리는 공식선 상이 아니다. 또 라피엘을 만나는 것뿐인데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시더 황자라면 모를까, 엄연히 유피가 윗사람이다.

의문은 해결할 수 없었다.

유피는 지나간 노점상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잡은 것은 기분 나쁘게 생긴 인형이었다. 짚으로 만들어진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노점상 주인을 향해 물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어디서 구한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살 건가?”

“대답해주시면 살 수도 있어요.”

“그쪽에 있는 인형이라면……. 마녀의 산에서 나온 물건이네. 유통하냐고 힘들었지. 수고비까지 해서 전부 5장이네. 그래도 살 건가?”

“물론이에요.”

“…….”

봉투에 담는 인형은 총 다섯 개다.

인형 하나에 전표 1장. 즉 이 기분 나쁜 인형은 머릿수당 100냥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다른 물건은 더 없으신가요?”

“아가씨의 흥미를 이끌 장물이 있을지 모르겠군.”

인형을 치운 노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쌓아놓은 짐을 푼 상인은 유피의 앞으로 물건을 깔았다. 붉은빛의 가루가 담긴 작은 자루와 광택을 잃은 뿔. 동물의 심장을 담은 통. 무엇이 담겨있는지 꿈틀거리는 자루 등. 알베르트는 이해할 수 없는 장물이 바닥에 깔렸다.

조심스레 물건을 확인하던 유피는 입을 열었다.

“자매들과 아시는 사이였나 보네요.”

“이상한 말만 늘여놓을 건가? 안 살 거면 가라.”

“아뇨, 할머니가 가져온 물건. 제가 전부 살게요.”

“이걸 전부 말인가?”

“절 믿고 팔아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스무 장의 전표가 노파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두꺼웠던 주머니가 가볍다. 안에 남은 전표는 다섯 장에 동전 몇 닢이 전부다.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유피는 노점상을 떴다. 복주머니 안을 확인하는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운이 좋네. 촉매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인은 만나기 힘들거든.”

“덤터기 쓴 거 아니야? 아니면 원래 이렇게 비싼 거야?”

“평균 시세보다 비싸게 사기는 했어. 그렇지만 별수 없어. 시세대로 사려면 마녀의 산과 닿은 연줄을 써야 하는데. 그쪽으로 빠지는 돈을 생각하면 그게 그거야. 애초에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공급도 많지 않거든.”

짚인형을 꺼낸 유피는 옷을 벗겼다.

낡은 의복 안쪽에서 붉은 피가 묻은 짚이 드러났다. 그 짚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꼬챙이처럼 날카로워지는 짚을 보며 유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장난질이 심하네. 누가 그 애 아니랄까 봐.”

손에서 흘러나온 은빛 마나가 인형과 닿았다.

붉은 피가 빛나며 인형이 쪼그라들었다. 기다란 가지 같은 것이 그녀의 손바닥 안에 남았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알베르트를 본 유피는 입을 열었다.

“호수의 마녀가 만든 인형이야. 여행하는 마녀들을 위해서 뿌려놓은 일종의 보급품이지. 마녀들이 수행을 나가면 마녀의 산과 연락할 방법이 적거든. 그럴 때를 위해서 뿌려둔 물건 중 하나야. 촉매제를 사용해버리면 다시 구하기가 힘드니까.”

“그것도 촉매제의 일종이야? 뭔가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

“응, 글레이프니르의 생식기야.”

“생식, 뭐?”

“글레이프니르의 생식기라고. 성교할 때 쓰는.”

“…….”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다 큰 처녀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해.”

“언니랑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알베르트는 차분히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고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해가 질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유피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한 차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왕성근차관.

눈이 불편한 주인장이 달여준 차는 알베르트가 낼 수 없는 깊은 맛을 담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다과를 유피는 입으로 가져갔다. 혀끝에서 노는 맛이 즐거운 듯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졌다.

알베르트는 차를 마셨다.

반짝거리는 유피의 눈이 보기 좋다.

차에 몰두한 그녀를 뒤로 한 채, 알베르트는 주문판을 확인했다. 가벼운 다과류 외에는 차밖에 없다. 마족 특유의 음식을 살펴보던 그는 문득 마물 요리라는 칸에서 손을 멈췄다.

“특이한 걸 보고 있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주문해도 괜찮아.”

“아니, 먹고 싶은 생각은 없어. 마물 요리는 처음 봐서 흥미가 생겼을 뿐이야.”

“야만적이라고 생각하지 마. 우리에게도 마물 요리는 특별한 요리거든. 알도 알다시피 마물의 고기에는 마기가 깃들어 있어서,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가 아니고서는 만질 수도 없어. 애초에 마기를 뽑아낼 수 있는 마물도 한정적이고. 아무리 갈무리를 잘한다고 해도 몇몇 마기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제법 내성이 있으니 이를 감안하고 먹긴 하지만, 인족은 그렇지 않아. 아마 인족이 마물의 고기를 입에 담았다가는 발광하다가 죽게 될 거야.”

“마물을 먹는 건 루미에르 교의 교리에 반해.”

“알고 있어. 그렇지 않았다면 인족은 진작 전멸했을 거야.”

유피의 말을 알베르트는 이해했다.

실제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마물의 고기를 먹은 부락이 종종 있었다. 풍족한 수도와 달리 변방의 영지는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으니까. 문제는 허기를 채운 그들이 떠오르는 해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마물의 요리를 장려해서 먹는 곳이 있지. 그 안에 깃든 마기야말로 축복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북부의 캘러미티.”

“그래, 그 미개한 놈들은 마기가 정말 좋은 모양이야.”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야만족들을 이해할 길이 없다.

산제물을 바치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 녀석들이니까. 야만족이라는 이름은 괜히 붙인 게 아니다. 만약 놈들이 동족을 잡아먹는다고 해도 알베르트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똑똑, 하고 작은 노크 소리가 났다. 유피의 허락이 떨어지자, 손님은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차분히 눈을 감고 있는 여성은 이 차관의 주인장인 소연이었다.

“주문하셨던 물건입니다. 물품이 맞는지 확인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가져온 것은 작은 함이었다. 함을 확인한 유피는 입을 열었다.

“맞네요. 수배 기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구해주셨네요.”

“손님의 부탁이니까요. 대금은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어? 차관이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던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 여유는 있습니다. 대신 또 다음에 찾아오신다고 약속해주시면 그거로 충분합니다.”

그럼, 하고 주인장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유피는 그녀에게 받은 함을 주머니 안쪽으로 챙겼다. 차관에서 볼일은 그게 끝이었던 듯, 유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라피엘을 보러 갈까?”

*&*

차관에서 나온 두 사람은 호랑나비 객잔으로 향했다.

유곽에서 가까운 객잔이다. 2층으로 된 객잔은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는데, 손님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마중을 나오는 점소이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라피엘은 오지 않은 것 같다. 두 사람은 화분으로 가려지는 자리에 앉았다.

“확실히 은밀하게 만나기에는 좋은 객잔이네.”

“내가 보기에는 금방 망할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가게를 운영하면 수입이 나오지 않는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도 운영이 안 돼서 팔린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늦게 나온 점소이가 테이블 위에 주문판과 차를 올렸다. 유피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여기서 가장 잘 하는 요리로 3인분.”

주문은 그걸로 끝이다.

알베르트는 주문판을 다시 점소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점소이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니, 점소이가 아니다. 주문판을 들고나온 사람은 어딘지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었다.

“알베르트 님?”

“호접희?”

두 사람의 앞에 있는 사람은 귀화루의 호접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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