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토끼가 보는 풍경 (112/200)
  •  # 112

    토끼가 보는 풍경

    곽부는 며칠 만에 돌아온 자신의 마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화룡검은 검날이 상한 것은 물론이고, 날카롭던 이가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용을 닮은 문양은 보이지 않는다. 전부 쓸려나갔다. 얼마나 치열한 사투가 있었던 걸까. 검에 남은 흔적은 감히 상상하기 힘든 정도다. 검과 검의 경합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강도의 무기와 겨룬 거겠지. 화룡검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 안쓰러운 느낌이 든 곽부는 조심스레 검신을 만졌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고칠 수야 있네. 하지만 몇 번을 고친다 해도 다시 이 모양이 될 걸세.”

    “다음부터는 좀 더 얌전히 다루겠습니다.”

    “그 문제가 아니네.”

    검의 주인, 알베르트를 보며 곽부는 고개를 저었다.

    “이 검신을 보게나. 날이 상하고 이가 빠졌지. 그래도 이건 큰 문제가 아닐세.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다른 도공이 오더라도 충분히 수선할 수 있지. 문제는 검의 안쪽일세.”

    “안쪽이요?”

    “이 문양이 닳아 없어졌다는 건 말이네. 내 자식이 자네의 내공을 견디지 못한 걸세. 검신에서 흐르는 내공을 버티지 못하고 바깥으로 기운을 방출했다는 말이지. 모르긴 몰라도 자네가 펼쳐낸 초식을 감당하지 못한 거야. 겉만 고쳐서 가져간다면 몇 번은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한계야. 마지노선을 넘어버리면 이 아이는 그대로 끊어질걸세. 미안하군. 자네는 진짜였지만, 나는 진짜가 아니라는 이야기일 뿐이네.”

    “어르신.”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냐? 다음에 다시 와라. 그때는 이 친구와 함께 내 최고의 명검을 만들어주지.”

    찻잔을 들고 온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실종되었던 도공 주영풍이다.

    아직 몸이 쾌차한 건 아닌지, 그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주영풍은 망자화가 진행되고 있던 환자 중 한 명이었다.

    도시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 선녀는 망자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들을 성마력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신교로 향했다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흑토와 뒤에서 접촉했고. 여러 가지 사전 이야기를 들은 후에 월각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 같다. 다행히 그는 선녀가 가져온 월편을 먹고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어르신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냥 제가 차를 타는 게…….”

    “손님에게 그럴 수는 없지. 자네에게는 신세를 졌어.”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 친구에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우리 같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를 위해서, 자네 같은 젊은이가 노력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네.”

    괴팍한 곽부와는 달리 여러모로 괜찮은 사람이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주영풍의 몸짓이나 행동은 본받을만한 점이 많았다.

    “그 아가씨는 같이 안 온 건가?”

    “연희라면 요양 중입니다.”

    “흠, 그런가. 하긴, 그리 건강해 보이는 안색은 아니었지. 잘 챙겨주게나. 자네가 아니면 밥도 제때 안 먹을 것 같은 인상이니.”

    “그런가요?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는 편인데.”

    흠, 하고 곽부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깊은 맛은 없다. 그래도 하나뿐인 친우가 타준 차다. 그는 말없이 찻잔을 비웠다.

    “다음에 한 번 더 들려라. 그때는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이 아이를 진짜 명검으로 만들어 놓겠다. 네 허리춤에 있는 그 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녀석을 준비해 두겠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문양이 사라진 화룡검은 곽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녀석을 다루는 건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

    장인의 거리를 뒤로한 알베르트는 신당으로 향했다.

    신당 주변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일련의 무리가 외문을 앞에 둔 채 편을 가르듯이 서 있었다. 십자패를 양손에 꼭 쥔 이가 있는가 하면, 신당에 침을 뱉는 이도 있었다.

    “선녀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몹쓸 녀석들. 몇 명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망자를 다 구할 수는 없는 거네. 살아온 이가 있는 게 어딘가?”

    “그런 개 같은 말을 또 믿고 있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신교의 지지자와 반대자다.

    라피엘은 가급적 이번 사태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 입단속을 했다고 들었는데,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진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으리라. 이들이 아는 사실은 신교로 향한 이들 중 몇 명은 그대로 망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돌아왔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두 무리가 서로를 향해 내뱉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별로 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신당을 찾아가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외문 앞에서 손님을 거절하는 관병을 본 알베르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툭, 하고 누군가가 그 손목을 잡았다.

    유피가 그랬던 것처럼 긴 로브를 입은 사람은 살짝 후드를 위로 올렸다.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귀가 뾰족한 초록 머리의 여인이었다.

    “에일린?”

    “안녕, 알베르트. 길이 엇갈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알베르트는 무심코 신당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은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됐다.

    현재 신교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서 관계자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건 선녀의 직속 부하인 그녀도 다를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중요 참고인 중 한 명이다. 월중 장로가 왜 그랬는지, 무슨 일을 벌이고자 했는지, 그녀라면 대강 꿰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알베르트의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에일린이 말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사실은 나, 파문당했거든.”

    “파문?”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그녀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선녀님의 배려구나.”

    “그래. 신교가 조용해질 때까지 휴가를 주신다고 하네. 내부 정비까지 마치려면 못해도 몇 년은 걸릴 것 같으니, 천천히 세상을 둘러보고 오라고 하셨어.”

    “뜻하지 않게 선녀님의 곁을 비우겠네. 에일린은 그래도 괜찮겠어?”

    “아쉽게도 지금의 나는 도움이 안 돼. 선녀님은 강한 분이니까. 혹여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제들이 도와줄 거야.”

    에일린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가벼웠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쪽은 여전히 난리야. 하루에도 몇 번씩 조사원들이 왔다 가고. 황자님의 깐깐한 시녀가 이것저것 물어보고. 월각의 감옥이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 둔 거지만. 월궁은 그렇지가 않거든. 이야기가 마무리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거야.”

    “이상한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그곳에 있는 건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잖아.”

    “괜찮아.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선녀님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 그렇다면 우리는 믿고 기다릴 뿐이야. 그게 이신설교의 신도니까.”

    “선녀님은 신이 아니야, 에일린.”

    “당연한 걸 말하고 있네? 그러니까 그분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나는 여행을 떠나는 거야.”

    머뭇거림이 없는 에일린의 대답에 알베르트는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에일린은 선녀와 제대로 마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이런 사람이니까. 선녀는 곁에 두고 중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북부로 갈 생각은 없어. 너라면 모를까, 나 혼자서 그곳을 가는 건 무모하거든. 그래서 제국으로 가볼 생각이야. 선녀님의 명으로 좀 돌아본 적이 있거든. 마계보다는 덜 위험하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아.”

    “제국은 마족의 적이잖아. 오히려 더 위험할 것 같은데.”

    “의탁할 곳이 있어. 운이 좋게도 괜찮은 가문에 신세를 졌거든. 그러네. 혹여 황녀님이랑 갈라지게 되면 금지된 숲의 경계선에 있는 저택으로 찾아와. 너에게는 신세를 졌으니까. 내가 따로 이야기해둘게.”

    “배려는 고맙지만 사양해둘게.”

    “그래? 하긴, 네가 황녀님의 곁을 떠날 것 같지는 않네.”

    에일린이 말한 가문은 분명 루드비히 가문이겠지.

    그녀가 루드비히 저택에서 알베르트라는 이름을 꺼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는 원하지 않았다. 에일린의 후드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린다. 그녀의 얼굴 옆에서 실프와 운디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베르트를 본 두 정령은 미소를 지었다.

    사라락, 하고 알베르트의 코앞으로 날아온 두 정령은 그 볼을 찌르기 시작했다.

    “꽤 사랑받고 있네.”

    “이런 사랑은 받고 싶지 않은데.”

    괴롭힘과 뭐가 다른 건지 알 수 없다.

    실프와 운디네의 장난을 보고 있던 에일린은 품에서 작은 돌을 꺼냈다.

    “받아둬.”

    초록빛이 도는 하얀 돌은 알베르트의 기억에 있는 물건이었다.

    “정령석(精靈石)이라는 물건이야. 이 돌이 있으면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어. 알베르트는 정령들과 친화력이 있어 보이니까. 아마 괜찮은 장소만 찾으면 정령들이 네 부름에 답해줄 거야. 그렇다고 마계에서 의식을 치르지는 말고. 여기서 계약을 맺었다가는 어둠의 정령 말고는 대답해주지 않을 거야.”

    “에일린은 어디서 계약을 맺었는데?”

    “나야 여기서.”

    “조금 전과는 말이 다른데.”

    “난 특별한 경우니까. 이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엘프거든.”

    그녀의 친화력이라면 딱히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거겠지.

    실프와 운디네가 그녀의 후드 속으로 돌아간다. 두 정령을 챙긴 그녀는 말했다.

    “일각 뒤쪽에서 선녀님이 기다리고 계셔. 몰래 담을 넘어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물론이야.”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일린은 한 발짝 다가왔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알베르트는 그 손을 맞잡았다.

    “무운을 빌게, 에일린. 네 앞에 달토끼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랄게.”

    “너도 마찬가지야, 알베르트. 천지신명이 항상 널 보고 있기를 바랄게.”

    에일린은 몸을 돌렸다.

    신당을 떠난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신당 뒤쪽으로 돌아간 알베르트는 담을 넘었다.

    본당을 기준으로 좌측이 일각이고, 우측은 월각이다. 회랑을 돌아다니는 관병과 신도를 피해 건물 뒤쪽으로 돌아간다. 일각 뒤편에는 초상 장로와 선녀가 있었다. 장로와 눈이 마주친 알베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란. 제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요?”

    “에일린은 선녀님이 울상이라고 했는데, 이제 보니 거짓말이었나 보네요.”

    “네? 무슨 소리예요. 그 아이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아닌걸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에일린은 선녀님의 생각보다 영악한 사람인데.”

    “…….”

    선녀는 살짝 고민하듯 턱에 손을 얹었다. 도움을 청하듯 초상 장로를 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 지나쳐요.”

    “생각보다 기운이 있어 보여서 다행입니다, 선녀님.”

    선녀는 예의를 차리는 알베르트의 모습에 볼을 매만졌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낸 건, 그 나름대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기운을 북돋아 줄 셈으로 부른 거였는데, 역으로 위로를 받아버렸다.

    “아마 이제부터는 만나기 힘들 거예요. 제 처우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신설교가 지위를 되찾으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봉문에 가깝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그래서 란을 찾은 거예요.”

    선녀는 작은 함을 알베르트에게 건넸다.

    달칵, 하고 함을 열어보니 안쪽에는 하얀색으로 빛나는 반지가 있었다.

    “황녀님에게 드릴 수 있을까요? 이번 사태를 도와준 감사의 선물이에요.”

    “월편이군요. 한데, 왜 이런 모양을……?”

    “란의 등을 밀어드리고 싶었어요.”

    “…….”

    그렇게나 티가 났던 걸까.

    선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괜한 참견이었나요?”

    “아닙니다.”

    알베르트는 함을 품 안으로 챙겼다.

    “그 반지를 갖고 있으면 신성력으로부터 몸이 상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특별히 만든 월편입니다. 효과는 보증해드릴 수 있어요.”

    “선녀님의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건 제가 드려야 할 말씀이네요. 이신설교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신복 끝자락을 잡은 선녀는 알베르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신설교의 선녀 한소망이 알베르트 란과 유피에르 바토리 황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달토끼님과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합니다. 현 시간부로 이신설교는 손이 닿는 데까지 두 분의 힘이 되어줄 것을 약조합니다. 동포의 피에 어린 모든 저주를 걷어내는 그 날까지. 이 약조는 향후 두 분이 동포들의 안위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전까지 유효할 겁니다.”

    “참관인 초상 장로. 선녀님의 뜻을 받듭니다.”

    “…….”

    알베르트는 멍하니 선녀를 바라보았다.

    치맛자락을 내린 그녀는 알베르트의 표정이 마음에 든 듯 목소리가 밝았다.

    “혼자서 걸어갈 필요는 없어요, 란. 저는 물론이고 달토끼님이 당신의 길을 밝혀드릴 겁니다. 지치고 힘들 때면, 언제든지 주변을 둘러보세요. 천지신명이 힘을 빌려줄 겁니다. 란이 가진 십자패에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선녀는 면사를 벗었다. 이국적인 용모와 함께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뿌리는 검은빛, 바깥으로 갈수록 탈색된 것처럼 하얗게 물든 머리색은 알베르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란이 가진 십자패는 이신설교의 초대 성물입니다. 아마도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물건이겠죠. 당시의 이신설교는 십자패의 뒤에 따로 문양을 새겨넣지 않았어요. 이미 몇 번 열화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그 힘을 되찾을 겁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선녀님.”

    언젠가 위대한 자를 올바른 길로 이끈다는 전승이 담긴 가보.

    붉게 불타오르던 신석은 힘을 잃었다. 아가씨가 안배한 회귀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녀는 고개를 저었다.

    “신석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신화의 시대를 거쳐온 그 성물에는 위대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힘은 신석보다 우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알베르트는 로사리오로 시선을 내렸다.

    거무튀튀한 신석이 달린 가보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녀는 면사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흑백의 머리카락이 사라지자, 알베르트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선녀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황녀 전하는 괜찮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선녀는 대답했다.

    알베르트가 묻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황녀님은 좋은 분으로 성장했어요. 그분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시련을 멋지게 통과하셨습니다.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했을 고난입니다. 그 역경을 이겨낸 것은 란이 곁에 있어 줬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이제 그분의 길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랍니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아요, 란.”

    어머니처럼 인자한 목소리였다.

    면사에 가려지지 않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선녀님은 정말 뭐든지 알고 계시군요.”

    “그렇지도 않아요.”

    쑥스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돌리는 선녀를 보며 알베르트는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선녀님의 나이는 어떻게 되십니까?”

    꼭 묻고 싶었다.

    용모나 체구만 놓고 본다면 2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분위기는 그 나이 때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알베르트의 물음에 선녀는 대답했다.

    “못 들은 거로 할게요, 란. 숙녀의 나이는 함부로 물어보는 게 아니에요.”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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