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성녀 아르웬(2)
「음, 그러니까……. 안녕, 유피에르. 나는 네 엄마란다. 쿡, 쿠쿡. 엄마래, 엄마. 세상에나. 이거 너무 웃긴데요. 아직 애가 태어난 것도 아닌데, 제가 엄마라니. 아이가 보면 당황하지 않을까요?」
「늙은이의 쓸데없는 참견이라면 미안한데.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래도 아이는 처음으로 보는 엄마의 얼굴일 텐데 말이야.」
「또 잔소리하시네. 근데 이거 색깔이 이상하네요. 누리끼리한 게 꼭 쓰레기 같아요. 왜 이렇게 구식인가요? 이 수정구. 마탑에서 나오는 수정구는 깔끔하게 기록되던데. 아, 그런가. 마족이 마법을 못 한다는 건 사실이었군요.」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둬라. 그것도 비싼 거다.」
「늙은이 또 삐져서는. 누가 안 한다고 했어요?」
콜록, 하고 그녀는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기침은 쉽사리 멈추지 않는다. 서너 번 정도 콜록거린 그녀는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다시 시작할게, 유피에르. 엄마의 이름은 아르웬이라고 한단다. 아마 네가 이걸 볼 때면 엄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란다. 엄마는 보다시피 건강이 별로 안 좋거든. 다프네 여신님도 너무하지. 이왕 챙겨줄 거면 수명까지 신경 써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성녀 아르웬.
볼에 손을 얹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란다. 엄마처럼 예쁘고, 머리도 좋고, 신성력도 완벽하고. 무릇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오래 살면 안 되는 거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일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엄마의 자식이니까 말이야. 뭐, 그 사람의 피가 섞였으니 건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 사람은 바보지만, 튼튼하게 장점이니까.」
「이거, 나중에 마황 폐하도 보실 겁니다.」
「엑, 진짜야? 이거 어떡하지. 다시 찍어야 할 것 같은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무래도 위나 바토리인 것 같다.
다급한 말이 오가고, 두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수정구를 숨겨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자, 우리 딸. 아마 날 닮은 너는 머리가 아주 비상할 거란다. 보통 사람과는 아마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어. 흔히들 말하잖아. 어떤 일이든 과정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너는 그 과정이라는 걸 생략할 거야. 무엇을 보든 결과가 바로 보이겠지. 이 엄마가 바로 그러거든. 그런 불합리한 존재의 피를 이은 거야, 우리 딸은. 하지만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만큼, 그 속에 녹아들기가 힘들 거란다. 평범하지 않다는 건 그런 거야.」
「제가 봤을 때 성녀님은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단순히 눈치가 빠른 겁니다.」
「그게 아니라 눈치도 빠른 거네요.」
베에, 하고 아르웬 성녀는 현자님 몰래 혀를 쭉 내밀었다.
뭔가 유피와는 다르다. 그보다 아르웬 성녀님은 원래 이런 분이었던 건가?
「하지만 우리 딸은 엄마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단다. 제국도, 루미에르 교도. 마족도 전부 잊고 평범하게 살아가렴. 그리고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앞을 보고 살아가려무나. 걱정하지 말렴. 내 딸이니까,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단지, 그 시기가 언제일지 모르겠구나. 엄마도 이렇게 늦게서야 만났거든. 있지, 이 엄마는 신부가 된 널 볼 수는 없겠지만, 엄마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아, 그렇다고 유령이 된다는 건 아니고. 언데드는 기분 나쁘잖니?」
무엇보다 못생겼고, 하고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못생겼다고 하니까 말하는 건데. 만약 네가 생각보다 얼굴이 별로라면 그때는 엄마가 아니라 그 사람을 원망하렴. 내 피가 더 짙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잖아. 이거 너무 무책임한가?」
「이 할아범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유피에르. 아니, 이건 별로 어감이 안 좋구나. 좋아. 지금부터 우리 딸은 유피라고 부를게. 그럼 유피. 잘 들으렴. 이제부터 엄마의 정체에 대해서 알려줄게.」
아르웬 성녀는 탁, 하고 양손을 부딪쳤다. 눈부신 하얀 날개가 그녀의 등에서 솟아났다.
「짜잔! 무려 제국의 성녀님이란다!」
무심코 알베르트는 유피를 보았다.
“…….”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이런 분이었어.”
“재밌는 분이네.”
“그렇지?”
수정구를 바라보는 유피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그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어머니를 좋아하는지 느껴졌다.
「당연히 엄마의 딸인 우리 유피도 신성력을 다룰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단다. 마족들은 신성력에 약하거든.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마족을 지워버릴 수도 있을 거야. 항상 조심하렴. 신성력을 사용하면 루미에르 교의 못된 영감탱이들이 그 기척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할아범의 결계가 지켜주는 여기까지 찾아올 일은 없을 것도 같지만. 그 능구렁이 같은 놈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거든. 뭐, 그 난리를 피고 왔으니까. 새로운 성녀를 찾냐고 정신이 없을 거야.」
아르웬 성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알베르트는 그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 나쁜 생각을 하는 얼굴이다. 유피가 짓궂은 장난을 생각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이것저것 알려주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이 별로 없구나. 이거 다음에 또 할 수 있죠, 현자님?」
「대금은 마황 폐하께 신청해놓으마.」
「고마워요. 그럼 오늘은…… 그러네. 마지막으로 춤이나 알려줄까? 우리 유피는 엄마를 닮아서 예쁠 테니까. 나중에 사교회에서 망신당하면 안 되잖아.」
「자네가 아는 춤도 있던가?」
「은근 무시하네요? 저 이래 보여도 교단 내에서는 신무로 이름을 날렸던 성녀예요.」
얼굴이 멀어진다. 수정구에서 멀어진 아르웬 성녀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나비가 너울거리듯이 그녀는 춤을 시작했다.
루미에르 교의 신무.
유피의 춤 실력은 어머니를 닮았던 모양이다.
신무가 끝나고, 주름 많은 손이 수정구 위로 올라왔다. 팟, 하고 수정구의 영상이 꺼졌다.
“유피는 어머니를 좋아해?”
“당연하지.”
즉답한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눈부신 얼굴에 끌려간다.
알베르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식사는 죽으로 준비할게.”
“매번 고마워, 알.”
*&*
늦은 점심을 해결한 두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났다.
알베르트가 밖에 나가보니, 한 소녀가 문 앞에 있었다.
하얀 옷차림을 한 손님이었다.
앳된 용모와 작은 체구. 검은 머리를 올린 소녀의 나이는 많아 봐야 10대 중반이지 않을까. 나무 가방을 든 그녀는 객잔에서 일하는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유피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는 사람이야? 내 손님은 아니야.
유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모른다면 방을 잘못 찾아온 손님 같다.
“당신이 알베르트 란인가요?”
정정한다. 유피를 찾아온 게 아니라 알베르트의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신세를 졌네요. 오늘은 그 말을 하러 왔어요.”
“어머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소녀는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라는 듯, 당돌하게 말한 소녀는 몸을 돌렸다. 복도 끝으로 그 모습이 사라진다. 멍하니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베르트는 그녀가 끌려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방으로 다가오는 건 작은 여인이다. 그것도 아는 얼굴이다.
천일소화.
마족의 신의라고 불리는 치우 아란이다.
“안녕하세요, 아란 씨. 오랜만에 뵈네요.”
「안녕하세요, 란. 잘 지냈냐고 묻고 싶은데, 안색이 별로 안 좋네요.」
“죄송합니다. 아란 씨를 볼 때면 항상 몸이 좋지 않네요.”
「사과할 필요는 없답니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아란 씨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쪽은 제 딸아이랍니다. 인사해야지, 란랑.」
“인사라면 아까 했어.”
「정말이니?」
“거짓말할 이유가 어딨어.”
그러고 보니 라피엘이 그랬다. 실력이 뛰어난 의원을 보내준다고 했었다.
그녀가 아는 의원이 아무래도 아란 씨였던 모양이다. 천일소화인 아란 씨가 왔다면 안심이다. 알베르트는 방 안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탁, 하고 란랑은 아란 씨에게 손을 내미는 알베르트를 가로 막고 섰다.
“어머니에게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란랑. 미안해요, 란. 딸아이가 실례를 끼치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 나이 때의 아이들이라면 당연한 거니까요.”
가시 돋친 소녀의 태도는 사춘기에 들어섰던 아가씨를 떠올리게 했다.
“웃겨, 정말.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황자님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우리 어머니를 이렇게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어요. 설마 우리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건 아니죠?”
코웃음 치는 란랑의 모습에 알베르트는 아란 씨에게 말했다.
“아란 씨와는 별로 안 닮은 것 같네요.”
「성격은 애 아빠를 닮았답니다. 여자아이니까 좀 더 조신하면 좋을 텐데. 이것도 부모의 욕심이라는 걸까요?」
“그 사람이랑 닮았다는 말은 하지 마, 어머니.”
심통이 난 란랑은 알베르트를 지나쳤다.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유피를 보았다. 유피와 시선이 마주친 란랑은 멀뚱멀뚱 두 눈을 깜박거렸다.
얇은 옷차림.
한 방에 있는 남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짐승! 백주 대낮부터 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던겨!?”
“…….”
한숨을 쉰 건 유피였다. 대답하기도 귀찮다.
몸도 안 좋은데 시끄러운 손님이 방문한 건 반기고 싶지 않다. 소녀의 물음을 무시한 그녀는 아란 씨를 보았다. 유피를 본 아란 씨는 치마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유피에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천일소화.”
란랑은 사전에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그녀는 어머니가 쓴 글자와 유피를 보고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뭔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듯, 소녀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그 시선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13황녀 유피에르 바토리 황녀님이시다. 나는 집사인 알베르트 라나야.”
“…….”
알베르트의 소개에 란랑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똑똑, 하고 차분한 노크 소리가 났다. 차분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란랑은 아란 씨가 그런 것처럼 치마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치우 란랑(欒狼)이라고 합니다. 유피에르 황녀 전하.”
“…….”
“…….”
거북한 침묵이 찾아왔다.
“천일소화.”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잘 타일러둘게요.」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꾸벅,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란 씨가 안쓰러웠다.
*&*
유피의 옆에 앉은 아란 씨는 치료를 시작했다.
란랑은 챙겨온 의료 가방에서 기다란 침과 환약을 꺼냈다. 방을 의료구로 채워가는 사이 아란 씨는 유피의 맥을 짚었다. 집중하는 그 모습을 보고 알베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치료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자.
“어디 가요?”
알베르트의 발을 잡은 것은 란랑이었다.
“치료가 끝날 때까지 나가 있을게.”
“귀찮게 하지 말고 거기 앉아 있어요.”
“유피가 치료받는 중인데, 내가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유피? 환자에게 의원의 말은 무엇보다 우선이에요. 잠자코 따르세요. 환자 주제에 어디를 가 있겠다고.”
제법 눈썰미가 괜찮은지, 그녀는 알베르트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했다.
아란 씨가 손을 내민다. 란랑은 말없이 어머니의 손에 은침을 올렸다.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침과 약재가 오가고,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는지 소녀는 알베르트의 앞에 앉았다.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제법 볼 줄 알아요. 그리고 당신 집사라면서요. 집사라면 모름지기, 황녀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보좌하는 게 기본이지 않나요? 어머니에게 들어보니까 꽤 실력이 괜찮은 무인이라던데. 어떻게 황녀님을 이 모양으로 만든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렇네. 내가 미숙한 탓이야.”
알베르트는 변명 하나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좀 더 자신이 강했다면 그녀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월아의 힘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면……. 아직 갈 길은 먼 걸까. 오늘따라 사부님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변명하지 않는 모습은 좋네요. 어머니가 그랬어요. 잘못했으면 이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좋은 어머니구나.”
“당연하죠. 누구 어머니인데.”
시술이 끝났는지, 아란 씨는 침을 내려놓았다.
판으로 손을 옮기는 어머니를 본 란랑은 유피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런 식으로 몸을 굴리시면, 제가 드리는 회정단(回情丹)으로도 회복하기 힘들어요. 저와 같은 의원이 언제나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황녀님의 몸에 흐르는 신성력은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고 있어요. 아무리 혼혈이라고 해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건 힘들어요.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이번에는 의식을 잃는 선에서 끝났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저도 장담해드릴 수 없어요.」
“고마워. 가능하면 노력해볼게.”
「노력으로는 안 돼요.」
“어머, 그럼 죽으라는 말이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었나요? 이 힘을 다루지 않으면 죽을 정도로.」
“그랬지.”
으음, 하고 아란 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판에 쓴 글자를 몇 번이나 지우고, 쓰고를 반복했다.
「그럼 란이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겠네요.」
“왜 그런 결과에 다다른 건지 모르겠네.”
물론 알고 있다.
아란 씨의 글자는 은연중에 두 사람이 같이 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참, 란의 치료는 란랑에게 맡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만한 실력이 되는지 모르겠네.”
「괜찮아요. 절 닮아서 아주 영특하답니다.」
유피의 허락을 받아낸 아란 씨는 딸을 보았다. 란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으니까, 하고 란랑은 알베르트의 손목을 잡았다. 맥에 손을 얹는다. 말과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알베르트의 혈도로 들어왔다. 란랑의 기운이 전신을 돈다.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돈 기는 곧 회수되었다.
“좀 이상한 혈도네요.”
「어느 면이 이상한지 알겠니?」
“네. 무인이라면 혈도가 단련된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사람은 단련된 걸 넘어서 혈도가 팽창되어 있어요. 단전을 주로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고요. 오히려 혈도를 단전으로 대체하는 무공처럼 보이는데. 잠시만요. 이 무공은 분명…….”
「그럼 이 몸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니?」
“일단 혈도를 달래고 기의 순환을 도와야겠죠.”
스며들어온 기운이 알베르트의 혈도를 달랜다.
아란 씨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부드러운 느낌이 강했던 그녀의 기운과는 달리, 란랑의 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자기주장이 강한 그녀의 성격과 비슷한 기운이다. 몸 전체를 쓰다듬은 기운이 빠져나가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마워.”
“기본이죠, 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란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척척, 하고 쓰고 난 침과 약재를 챙긴 그녀는 가방을 들었다. 순식간에 정리를 마친 그녀를 아란 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직 황녀님의 체력이 돌아오지 않아서, 본격적인 치료로 들어서는 건 힘들 것 같아요. 다음에 시간이 괜찮을 때 다시 호출해주세요.」
“호출? 아니에요, 어머니. 다음에는 황녀님이 직접 찾아오세요. 안 그래도 바쁜데, 방문 진료는 진짜 아니라고요.”
「란랑. 지금 엄마에게 말대꾸한 거니?」
아란 씨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진다.
싸늘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딸은 히익, 하고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아니, 다음에는 내가 찾아갈게. 봐줬으면 하는 아이도 있거든.”
「그건 너무 죄송해서…….」
“원래 그런 약속이었잖아. 맛있는 거라도 사 들고 갈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바람도 쐴 겸 말이야, 하고 유피는 알베르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