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성녀 아르웬(1) (110/200)

 # 110

성녀 아르웬(1)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살금살금 졸음이 밀려오는 그런 한낮. 그늘 밖으로 나가면 땀이 흐를 것 같은 날씨. 어느새 여름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알베르트는 멍하니 눈을 떴다. 깜빡 잠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잠기운을 털어내듯이 머리를 젓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침대로 다가갔다.

부드러운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은 유피에르였다.

본당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녀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숨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가슴. 의식을 되찾지 못할 뿐이지. 그녀는 살아 있다. 과민반응인 건 알고 있다. 선녀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알베르트를 짓누르고 있었다.

유피가 의식을 잃은 지 벌써 이틀째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라피엘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사건의 뒤처리를 위해서다. 원래는 아이네르에게 뒷수습을 부탁했던 것 같은데, 정리는커녕 일이 더 커졌다는 모양이다. 방에서 나가기 직전 그녀는 유명한 의원을 불렀으니, 알베르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실종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월각의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실종자들은 망자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스스로 바깥으로 나오는 걸 거부했다. 그들은 잡혀 온 것이 아니라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뒤늦게 도착한 선녀가 상황을 정리했다는 모양이다.

놀랍게도 망자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들을 치료했다든가.

정체 모를 절편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아마 그녀가 만든 월편이 치료에 사용된 것 같았다. 성찬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그런 까닭이었던 모양이다. 그 뒤 살아남은 흑토장은 관아로 향했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월중 장로지만, 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는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마 선녀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겠지.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든, 결과적으로 많은 이가 다치고 죽었다. 피해를 확인하는 건 물론이고, 수습도 하루 이틀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결말은 없겠지. 그래도 되도록 많은 이들이 웃으면 좋겠다고.

선녀는 그렇게 말했다.

알베르트는 고이 잠든 유피를 보았다. 신성력을 다루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생각해보면 전조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마족이 다루는 의술은 제국의 치료법과는 다르다. 의원들의 치료를 받은 알베르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경을 헤매던 그를 치료해준 것은 의술이 아니다. 아마 그녀가 다루는 신성력이 목숨을 구해준 거겠지. 천칭의 말은 사실이었다.

양양에서 그녀가 선보였던 춤도 마찬가지다.

루미에르 교의 사제들이 다프네 여신님께 바치는 신무(神舞). 물론 춤의 세세한 면까지는 같지 않았다. 본래 신무에는 몸짓과 손짓 하나하나에 여신님을 향한 기원이 깃들어 있다. 곡조가 바뀔 때마다 춤의 내용도 바뀌기 마련이지만, 유피의 춤에는 그런 변화는 없었다.

신무에서 여신님을 향한 기원을 뺀 춤이, 유피의 춤이었다.

어머니가 남겼다는 수정구를 보고 그녀는 춤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피의 어머니는 루미에르 교의 사제일 가능성이 크겠지. 다프네 여신님에 대해서도 그때 알게 되었고, 물려받은 사제의 피가 신성력을 개화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유피에르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그녀가 다뤘던 신성력은 제국 내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만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신전기사단(Temple Knight)는 아니다. 최소 고위 신관급 출신이다.

고위 신관.

고위 사제라고 한다면…….

“설마…….”

알베르트는 무심코 유피를 보았다.

별무리지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시선을 잡아끈다. 거리를 돌아다니던 마족 중에서 은발을 가진 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은빛. 루미에르 교에서는 신성함의 상징.

프랑소와 성녀도 그녀를 닮은 은빛 머리였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해보자. 만약 그녀가 그쪽이라면. 그 핏줄을 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한지. 유피의 나이는 많지 않다. 그와 나이 터울이 7살이니, 올해로 24살. 그럼 최소 2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기에 사라진 루미에르 교의 고위급 신관이 있었던가.

있다.

그것도 최고위급 인물이다.

성녀 아르웬.

지금까지도 행적이 묘연한 전대 성녀.

그녀가 유피에르의 어머니라면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바토리라는 성을 쓰는 것도 이해가 간다. 성녀에게는 성이 없었으니까. 시더 황자와 아벨 황자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쓰는 성은 모친 쪽이겠지.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없었던 그녀가 스승님의 성을 따른 것은 당연했다.

만약 그녀의 어머니가 정말로 아르웬 성녀라면 추문 거리 정도가 아니다.

루미에르 교는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고서도 성녀의 딸인 유피에르를 내버려 두고 있었던 걸까?

의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유피의 눈썹이 떨렸다.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간다. 흐릿하게 풀린 붉은 눈이 알베르트를 보았다.

“유피.”

“…….”

그 입술이 움직였다.

“정신이 들어?”

“엄마가.”

“응?”

“엄마가, 보였어.”

“…….”

엄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던 알베르트는, 그게 유피의 잠꼬대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럴 것이 정신을 차린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음, 하고 유피는 헛기침을 터뜨렸다.

별거 아닌 그 행동만으로도 가슴이 당겨오는 것 같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알.”

“그런 표정이야?”

“응, 마치 죽은 사람을 앞에 둔 것처럼 끔찍한 얼굴이야.”

“심각하네.”

“정말로 누가 죽기라도 했어?”

“아니.”

유피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등을 뒤에 기댄 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무리해버렸네.”

“정신을 차렸으니 됐어.”

“천일소화가 싫어하겠어. 또 몸을 함부로 굴렸다고.”

“그래도 말로는 안 하시는 사람이잖아.”

“글자가 많아서 더 피곤하지. 읽는 사람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그녀는 메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목소리를 자아내는 일도 벅찬 모양이다. 그러나 유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며칠이나 지났어?”

“이틀.”

“잠자는 공주가 되었네.”

“그러게.”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 한 건 아니지?”

“뭔가 해줬으면 했어?”

“그랬으면 진심으로 화냈을 거야.”

“말했잖아. 그런 건 허락 받고 할 거라고.”

“평생 못하겠네. 좋아. 고생한 알을 위해서 상을 줄게. 지금은 해도 좋아.”

“…….”

여전히 안색은 어둡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

“유피.”

“응?”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유피를 끌어안은 알베르트는 그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알?”

홍차와 비슷한 달콤한 향이 났다.

유피의 몸은 작아서, 양팔 안에 들어오는 그녀가 정말로 작게 느껴져서 이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당황한 유피의 시선이 공중을 맴돌았다.

손을 맞잡는 정도만 생각했지. 이런 포옹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까.

화를 내는 것이 맞을까? 지금이라도 떼어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알베르트의 등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작은 어깨를 끌어안은 알베르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뭔가 터무니없는 말이 나올 것만 같다. 스스로도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잃지 않기 위해서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실패하는 건 아닐까. 내 힘이 부족했던 건 아닐까. 그런 후회가 거듭 밀려와서, 알베르트는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넣었다.

유피에르 바토리는 이 자리에 있다.

알베르트는 실패하지 않았다.

“괜찮아, 알.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알베르트의 등을 유피는 토닥거렸다. 한 번, 두 번. 차분히 진정하기를 기다린다.

부드러운 손길에 답하듯이, 알베르트는 그녀를 한층 더 끌어안았다.

“아파.”

“…….”

어깨에 묻은 얼굴을 뗀다. 알베르트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이제 진정했어?”

“미안. 못 볼 꼴을 보여줬네.”

“사과할 필요 없어. 내가 허락했잖아. 그보다…….”

주변을 둘러보던 유피는 물었다.

“차 좀 갖다 줄 수 있겠어?”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이야, 그게?”

유피는 머쓱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살짝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이 예쁘다. 알베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알베르트가 가져온 찻잔이 유피의 입술에 닿았다.

향긋한 홍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못난 오빠 때문에 라피엘이 고생하겠네. 이쪽 일에 나는 개입할 수 없거든.”

“선녀님은 어떻게 될까? 따지고 보면 그녀도 휘말려 들었을 뿐이잖아.”

“정상참작이 되기는 하겠지만,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어. 신교를 이끄는 건 그녀야. 결국, 모든 책임은 선녀에게 있으니까. 당분간은 신교 전체가 마비된다고 봐야 할 거야. 뭐, 극단적인 상황까지 흘러가진 않겠지. ”

“그나마 다행이네.”

홍차를 비운 유피는 알베르트에게 찻잔을 건넸다.

찻잔을 채우려 하자 그녀는 손을 들었다. 더 마실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붉은 두 눈이 알베르트를 보았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시선을 본 알베르트는 자리에 앉았다. 직감적으로 그녀가 중요한 말을 꺼내고자 하는 걸 깨달았다.

“이 힘은 있지, 알.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힘이야.”

그리고 유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많이 놀랐지? 아무리 그래도 마족의 황녀가 신성력을 다루다니, 말이 안 되잖아.”

“언제나 그랬던 거야? 신성력을 사용하고 나면 몸 상태가 나빠지는 건.”

그걸 물어보는 거야? 알베르트의 물음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일단은 신성력이잖아. 부담이 안 걸릴 수는 없어. 그래도 지금은 괜찮은 편이야. 예전에는 더 심했어. 신성력이 개화했던 14살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 할아범을 살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몹쓸 짓을 해버리고 말았거든.”

“…….”

죽는 순간 강한 힘에 노출된 마족은 사념으로 남게 된다.

위나 바토리를 사념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신성력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를 원망했다는 건 그 일 때문이었나 보구나.”

알베르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나도 어렸으니까. 언니가 아니었으면 아마 나쁜 길로 빠졌을지도 몰라.”

“나쁜 짓을 하는 유피는 상상하기 어렵네.”

“어머, 궁금해? 뭣하면 이 자리에서 보여줄까? 알의 호기심도 충족하고, 나는 기분이 좋아지고. 서로 좋을 것 같은데.”

“농담은 그만둬.”

웃음기 없는 눈이 무섭다.

“유피가 신성력을 다루는 건 또 누가 알고 있어?”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몇 안 돼. 언니랑 천일소화. 그리고 본당에 있던 이들 정도겠지. 아, 성의 아저씨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어머니랑도 알고 있었으니까.”

“루미에르 교에서 사제들이 찾아온 적은 없었어? 유피가 다루는 힘을 그들이 모를 리 없어. 내가 본 유피의 신성력은 거의 성녀님과 비슷했거든.”

“알은 정말 눈썰미가 좋구나.”

성녀.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우습다는 듯, 입가에 실소를 그렸다.

“운명이라는 게 참 재밌어. 마족을 다스리는 마황과 루미에르 교의 상징인 성녀가 사랑에 빠지고, 그 결실이 태어나 이렇게 마족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니 말이야. 정말 우스운 일이지. 바보처럼 눈이 맞아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유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두 분의 사랑이 가볍지 않았다고 생각해. 유피의 위치가 어떤지 두 분이 몰랐을 리 없잖아. 이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았을 테고. 그런데도 두 분은 유피를 낳았잖아. 그건…….”

“그래, 알고 있어.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어. 그러니까 이런 기억까지 남긴 거겠지. 자신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올바르게 자라길 바라면서 말이야.”

유피에르는 알베르트를 보았다.

그녀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후련하다는 듯, 알베르트를 바라보던 유피에르는 입을 열었다.

“너는 좋은 남자야, 알베르트.”

“유피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자책할 필요 없어.”

“자책은 무슨……. 그런 걸 할 나이는 진작 지났어. 그냥 불평이었을 뿐이야.”

유피는 아공간을 열었다. 검은빛의 공간으로 손을 집어넣은 그녀는 푸른 수정구를 꺼냈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스승님을 제외하고 처음이야.”

유피의 손이 수정구와 맞닿았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마나가 아니다. 신성력.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 들어가자 수정구 안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수정구 안에서는 곧 은빛의 실뭉치가 떠올랐다.

꼼지락, 꼼지락. 수정구를 가득 채운 실뭉치가 움직였다.

톡톡, 하고 작은 소리가 울리더니, 곧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기록되고 있는 건가요, 현자님?」

「그대로 기록되고 있으니 말하면 되네.」

실뭉치가 멀어진다.

수정구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유피와 꼭 닮은 눈매.

별무리가 지는 것 같은 은빛의 머리카락.

성녀 아르웬이 황금빛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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