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성찬식(聖餐式)(4) (10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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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聖餐式)(4)

월아와 악마의 손톱이 교차했다.

충격이 몸 전체에 실린다. 회복된 몸은 놈의 공격을 받아냈다. 강도는 호각. 월아의 빛이 역으로 놈의 손톱을 파고들었다. 손톱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잘린 손톱이 순식간에 복구되고, 거구의 몸이 움직인다. 그 발아래에서 흑토들이 짓뭉개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는 그 행동 하나하나가 위협적이다. 그래도 흑토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도 알고 있다. 자신들이 물러서는 순간 위험해지는 건 신성력을 다루는 유피다.

『버러지들이.』

필사의 항전도 의미가 없다.

흑토의 공격은 녀석의 발목을 괴롭히는 선에서 끝난다. 놈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다. 간신히 발을 묶는 것 정도만 가능할 따름이다. 내공을 쏟아붓는다. 월아의 빛이 강해진다. 잠깐의 시간을 벌어준 흑토 위로 알베르트는 도약했다.

다가오는 알베르트를 본 악마의 손톱이 휘둘러진다.

기둥을 부수며 다가오는 그 손톱 위로, 알베르트는 뛰어올랐다. 손등에서, 팔로, 팔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머리까지 질주한 알베르트의 월아가 번뜩였다.

참격이 아니다. 파괴에 가깝다. 월아는 악마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알베르트가 차분히 쌓은 충격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목 반쪽이 날아간 녀석은 흐물흐물 무너졌다. 머리가 터졌다. 피가 튀고, 부서진 파편이 흩날린다. 얼굴이 너덜너덜해졌다. 피로 물든 눈이 알베르트를 본다. 안심해서는 안 된다. 녀석은 이 정도로 멈추지 않는다. 알베르트는 악마의 무릎을 밟고 물러났다. 그 위로 손이 떨어졌다. 쿵, 하고 지면이 부서졌다.

“큭!”

등부터 떨어졌다.

일순간 숨이 막힌다. 호흡을 고를 시간은 없다. 재차 일어나는 알베르트를 노리고 악마의 손이 다가온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그 앞에 검은 등이 나타났다. 흑토들이다. 물론 그들이 악마를 멈출 수 있을 리 없다. 손과 부딪친 그들의 몸이 반으로 부서졌다.

시간을 번 것도 아니다. 길어야 2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시간. 그러나 그거면 충분했다.

제자리에서 몸을 수습한 알베르트는 녀석의 손 위로 뛰어올랐다.

월아의 빛이 강해진다. 타오르는 빛이 손가락을 잘라낸다. 다섯 손가락을 잃은 녀석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손끝에서 피 대신 검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검은 촉수가 잘린 손가락에서 자라난다. 손을 대신한 촉수가 주변으로 뿌려졌다.

흑토들의 몸을 바닥에 꿰뚫는다. 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흑토들은 지면에 꽂혔다. 재생이 의미가 없다. 수복되는 그 몸으로 검은 마기가 짓눌렸다. 재생되던 몸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 숨이 끊긴 흑토들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알베르트는 유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화려한 복주머니에서 촉매제를 꺼내고 있었다. 빛나는 붉은 가루를 얼굴에 바른다. 기하학적인 그림과 문양이 마녀의 볼에 그려졌다. 문신과도 같이 새겨진 문양에서 은빛이 흘렀다. 세피로스의 지팡이에서 자라난 푸른 덩굴이 지면과 얽혔다. 상반되는 적과 청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치 그녀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다.

뻗어 나가는 뿌리처럼. 세피로스의 지팡이를 따라 나아간 선에 선명한 은빛이 남았다. 신성한 마법진이 천천히 완성되어 간다. 세계수를 모방한 열 개의 원. 술식의 주체가 되는 유피는 그 가운데에 섰다.

그녀는 영창에 들어서지도 않았다.

이제 준비가 끝났을 뿐이다. 술식의 완성까지는 아직 멀었다. 유피가 말한 5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알베르트는 비로소 깨달았다. 악마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일단 녀석의 기동력을 빼앗는다.

지면에서 솟아난 촉수를 피해 나아간 알베르트는 놈의 발목을 노렸다.

녀석의 다리에는 흑토들이 입힌 상처가 가득했다.

회복이 조금 더뎌지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월아의 빛이 강해진다. 베는 것으로는 안 된다. 이 발목은 베어내도 다시 회복된다. 그렇다면 발목째로 날려버릴 뿐이다!

월아를 치켜든다.

앞으로 내민 발에 일순간 무게를 실은 알베르트는 그대로 월아를 휘둘렀다.

서걱!

검은 발목이 날아간다. 녀석의 마기가 피처럼 치솟았다. 무너진다. 오른쪽 발목을 잃은 놈의 거구가 뒤로 넘어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흑토들이 그 몸에 뭉개졌다. 제단이 무너졌다. 튀어 오르는 파편 사이에서 선녀를 안은 흑토장이 알베르트의 옆에 착지했다.

“무사한가요, 란?”

“전 괜찮습니다.”

흙먼지 속에서 놈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은 일어나고자 지면을 잡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발목은 재생되지 않는다. 불길이 번진다. 타오르는 다리가 방해라는 듯 녀석의 손날로 발을 잘라냈다. 떨어져 나간 살점이 타올랐다.

발은 어떻게 되었는가? 월아의 빛에서 벗어난 녀석의 발목은 다시 회복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설마 유피에르 황녀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선녀는 술식에 집중한 유피를 보고 있었다.

발을 되찾은 악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유피의 마법은 준비되지 않았다. 그녀는 알베르트에게 전위를 맡겼다. 그렇다면 묵묵히 시간을 벌뿐이다. 다시 발을 당할 생각은 없는 건지, 놈의 발목에서 날카로운 뿔이 솟아났다.

「응하여라, 재해를 가져오는 고귀한 이여. 지고한 왕관이 그대를 찾노라.」

영창이 시작된다.

악마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유피를 볼 시간은 없다. 녀석의 시선이 떨어진 지금이 기회였다. 발목에서 자라난 뿔을 밟고 놈의 무릎으로 뛰어오른다. 그대로 벤다. 완벽히 잘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처에서 불길이 시작된다. 불을 진화하기 위해 검은 마기가 일렁였다. 마무리를 가할 필요는 없다. 목적은 녀석의 발을 잡는 것. 악마의 움직임이 멎는다. 녀석의 팔이 내려온다. 알베르트는 그 손을 역으로 타고 올라갔다.

어디를 어떻게 베느냐, 어디를 어떻게 잘라내느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악마를 쓰러뜨리는 건 알베르트가 아니다. 이런 공격으로는 놈의 숨통을 끊어낼 수 없다. 그런 건 알베르트도 알고 있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유피의 마법이 준비될 때까지 놈의 발을 묶을 뿐이다.

악마의 움직임에 맞춰 알베르트의 몸놀림이 바뀐다. 어깨를 쓸어내는 손톱을 피한다. 좌측 어깨에 상처를 남기고, 반대쪽으로 건너뛴다. 어깨선을 타고 아래팔로 내려간다. 월아의 검로가 바뀐다. 틈을 주지 않는다. 쇄도하는 검격은 놈의 살을 베어내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도와 같다. 월아를 내려친다. 팔이 반쯤 잘려나가고, 살점 안쪽이 드러난다. 마기가 피어오른다. 수복하는 것처럼 혈관을 감싸 안더니, 안쪽에서 검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촉수는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검은 창이 알베르트의 몸을 노렸다. 일순간 쏟아지는 창을 잘라낸다. 다시 모양새를 갖추는 창 앞으로 연약한 꽃잎이 떨어졌다. 검은 창과 하얀 꽃. 흑백이 교차한다. 믿을 수 없게도, 피어난 꽃은 창을 막았다. 알베르트의 발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그가 달려나간 자리에서 꽃잎이 흩날렸다. 솟아난 창은 여지없이 그를 제거하려 든다. 발자취를 따라 하얀 꽃잎이 피어났다. 꽃에 무뎌진 창끝은 알베르트의 몸에 닿지 않았다.

그리고 검무가 시작됐다.

나아가는 발걸음. 선회하는 월아.

불길이 녀석의 팔을 집어삼킨 건 한순간이었다.

검 끝에서 나타난 꽃이 일순간 수를 불렸다.

봉우리가 맺히고, 하얗게 피어난 꽃잎은 악마의 몸을 찢었다.

달콤한 난초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렇기에 우리는 꽃과 같다. 화려하게 피어나고, 질 때는 덧없이 떨어지는 법이다.』

중후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천마신공 오의

백화혈무(白花血舞)

강기를 머금은 하얀 꽃이 알베르트의 주변에서 피어났다.

흩뿌려지는 꽃은 멈추지 않는다. 떨어지는 꽃과 닿은 악마의 몸에 긴 자상이 남는다. 월아의 힘이 깃든 꽃과 맞닿은 살이 불타오른다. 불길이 끝나지 않는다. 한 번 시작된 기세는 멈출 줄 모른다. 피부를 불태우고, 드러난 살이 녹아내렸다. 난도질당한 것처럼 팔이 너덜너덜해졌다.

악마의 손이 알베르트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닿지 않는다. 전력을 발휘하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통증을 안고 간다. 하지만 그 판단은 실수다.

반대쪽 팔을 전부 오른 알베르트의 검이 놈의 눈을 꿰뚫었다.

『-!』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피가 치솟았다.

마기가 아니다. 녀석의 눈에서 뿜어진 피가 천장과 맞닿았다. 뱀의 그림이 더럽혀졌다.

떨어지는 고개와 함께 녀석의 몸이 무너졌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알베르트는 반응하지 못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넣은 순간, 휘둘러진 손바닥이 몸을 덮쳤다. 날아간다. 기분 나쁜 부유감. 길지 않았다. 본당 문과 충돌한 알베르트는 크억, 하고 피를 토해냈다. 목이 타오른다. 겉과 속이 뒤바뀐 것 같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땅으로 떨어진 그는 지면과 부딪친 몸이 마치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 잡는다. 간신히 고개를 든다.

유피의 마법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의 앞을 지켜주는 사람은 누가 있는가.

보이는 것은 악마.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놈은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없다.

악마를 따라잡던 흑토들도 보이지 않는다. 만신창이가 된 녀석들은 놈의 발을 잡는 일조차 할 수 없다. 일어난다. 몸이 비명을 지른다. 의식이 끊어질 것 같다. 아픔으로 흐려지는 알베르트의 시야에, 선녀가 들어왔다.

“괜-. 전-. 됐-.”

이명이 울린다. 필사적인 그녀의 몸에서 성마력이 피어올랐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곧 그녀가 꺼내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은빛 달이 드리워진 창 너머에서, 한 마리의 수룡이 악마의 배후로 쇄도하고 있었다.

「용제강림(龍帝降臨).」

제단 뒤쪽의 창이 박살 났다.

본당으로 들어온 수룡은 악마의 가슴을 꿰뚫었다. 마녀를 지키듯이 몸을 돌린 수룡은 악마를 보았다. 분노로 가득 찬 용안이 악마를 향했다. 악마는 흔들리지 않는다. 놈은 불타는 팔을 들었다. 손날은 이미 하나의 검이다. 수룡의 목을 노린다. 검이 내달렸다. 움직이는 악마의 팔에 푹, 하고 수창(水槍)이 꽂혔다. 지면과 연결된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상관없다. 아직 다른 한쪽 팔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아간 팔은 주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창이 떨어졌다. 하나, 둘, 셋, 넷…….

끝나지 않는다. 그치지 않는 비를 육안으로 세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다.

수십이 넘는 창이 악마의 몸을 꿰뚫었다.

폭음이 울렸다. 떨어지는 창에 자비는 보이지 않는다. 머리에 창이 꽂히고. 흔들리는 고개를 바로잡듯이 다른 창이 뒤따른다. 목, 어깨, 위팔, 아래팔, 손목, 손등. 견디지 못한 악마의 몸이 흔들린다. 하지만 분노한 수룡은 녀석이 쓰러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넘어가는 몸에 꽂힌 수창은 녀석을 강제로 지지했다.

『감히 죄인 주제에……. 이 몸을, 탐식의 벨제붑을 죽이려는 건가, 죄인!』

신성한 힘이 깃들어 있던 걸까. 수창에 관통당한 녀석의 몸이 불타오른다.

그래도 악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마녀를 보았다. 수룡을 제어하는 마녀는 코앞에 있다. 그 몸을 부수면 모든 게 끝난다.

푸른 불길에 뒤덮인 녀석의 손이 움직였다.

꽂힌 창을 무시하며 나아간다. 근육과 살이 찢겨나간다. 그 움직임이, 수룡의 역린을 건드렸다. 푸른 발이 악마의 머리를 잡았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이 꺾였다. 수룡의 분노는 끝나지 않는다. 수룡의 몸이 악마를 칭칭 감았다. 곳곳에 창이 꽂힌 녀석의 육체는 버티지 못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뼈가 부러지고, 몸을 뚫고 나온다.

이윽고 악마는 몸의 자유를 빼앗겼다.

수룡은 그 머리를.

수룡은 그 팔을.

수룡은 그 다리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파괴했다.

물줄기는 끝나지 않는다. 움직일 수 없는 악마의 위로 물의 창은 끝없이 떨어졌다.

악마는 투명한 수룡의 몸 너머로, 마녀를 보았다. 지면에서 살짝 뜬 그녀는 하얀 손을 들고 있었다. 그 작은 움직임에, 악마를 꿰뚫은 창이 얼어붙었다.

「동결(凍結).」

본당에 싸늘한 한기가 차올랐다. 악마의 몸을 덮은 수룡이 얼어붙었다.

얼음 속에 갇힌 악마의 눈동자가 움직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음을 깨며 놈의 몸이 움직인다. 산 채로 육체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천천히 움직인 녀석은 마녀를 죽이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노기로 가득 찬 그 눈을 보고도 마녀는 태연했다.

용제의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빙폭(氷瀑).」

모든 것이 깨져나갔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예술품과도 같았던 얼음이 깨지며, 눈꽃이 흩뿌려졌다. 떨어지는 얼음 파편이 보석처럼 빛난다. 본당을 가득 채운 빛무리가 반짝거렸다. 흩날리는 은빛과 함께 유피에르는 손을 내렸다. 고요히 피어오르던 신성력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등에서 솟아났던 날개가 사라지고, 살포시 떠 있던 발이 지면에 닿았다.

균형을 잃은 세피로스의 지팡이가 지면에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걸까, 유피에르는 쓰러졌다.

일어나지 않는다.

“유피?”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뜨지 않는다.

살짝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숨이 끊긴 것처럼 하얗고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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